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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51화 (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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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밝혀지는 정체

“네 정체가 도대체 무어냐. 어째서 황룡과 요정족 장로, 율리히를 알고 있는 거지?”

“아스.”

“황룡은 마치 네가 검공 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더군.”

“……그게.”

아스탄의 말에 윤이 머뭇거렸다.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기에 무섭다. 믿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한단 말인가. 자신은 사실 전설 속 검공이고, 대자에게 배신당해서 현실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이곳에 돌아온 건 늙지 않는 자신이 죽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믿을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리온, 아니 황룡이 날 아는 건…….”

윤이 다급한 마음에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아스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처음엔 부정하려했다. 그러나 그가 짓는 다급한 표정이, 절박하게 맞잡은 손이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검공이 정녕 눈앞의 청년이라면, 그간 묻어두었던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검공의 낙서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것. 나이에 맞지 않게 뛰어난 실력. 제국에 대해 잘 아는 듯 보이면서도 군데군데 구멍이 난 것처럼 비어있는 지식까지.

이 모든 힌트는 단 한 가지 답변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검공,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본인이라고.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 노화의 속도가 다를 수 있다. 대제 월스턴 회고록에서도 검공이이 무척 어려 보여서 후에는 자신이 형님처럼 보인다며 투덜거리지 않았던가. 만약 저가 살던 곳의 나이대로 먹는다면? 젊은 모습을 몇 십 년간 유지해온 것도 이해가 된다.

“그만 말하지 않아도 좋다.”

아스탄은 차갑게 웃었다. 붉은 눈이 매섭게 윤을 쏘아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그가 자신을 이렇게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싸늘한 눈빛에 숨이 막혀왔다. 마치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널 조상님이라고 불러야하나?”

“……아스.”

“설마 검공과 같은 세계에서 왔다고 생각한 이방인이 검공 본인이었을 줄이야. 황룡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눈치 채지 못할 뻔했군. 그래서 진실을 숨기니 재미있던가?”

아스탄의 신랄하게 빈정거리는 말에 윤은 아픈 표정을 지었다.

“넌 내게 친구가 되자고 했지. 친구가 이런 것이었나 보군.”

“아스, 그게 있잖아.”

“그리 부르지 마라! 네게 허락한 이름이 아니다.”

아스탄은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감정에 동요하는 일이 적었는데, 눈앞의 청년과 얽히게 되면 그게 어려워진다. 그는 제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다만 몹시 화가 치민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제껏 윤에게 털어놓았던 말을 떠올렸다. 저주의 시작이 검공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했다. 놀란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의아하게 생각했어야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의심했어야했다.

“친구, 친구라. 그래 난 네가 말했던 친구 놀이에 심취했어. 바보 같이.”

조상님께서 선심 쓰듯 제안한 ‘친구놀이’에 지나치게 몰입한 모양이었다. 진실을 숨겼다는 한심한 이유에 분노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스탄은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패도록 미간을 찌푸렸다.

“……널 가지고 놀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랬겠지. 내가 너의 상황이라도 쉽게 믿기 힘들었을 테니. 하지만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넌 말해주지 않았다.”

아스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비웃는 기색이 있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덜 아팠을 것이다. 친구가 맞느냐고 읊조리는 목소리가 무척 슬펐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입술을 아교로 붙여버린 것 같다. 윤은 먹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꼴사납군. 화풀이를 하고 말았어.”

“아니야. 내가, 내가 미안해.”

“……나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 오늘은 피곤했을 테니 이만 가서 쉬도록.”

아스탄이 뒤돌아섰다. 윤이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스탄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을 떨쳐냈다.

형체 없는 화살이 윤의 가슴을 꿰뚫는 것 같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관통하여 빠져나간 부분이 허했다. 무심결에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을 만큼.

중앙궁을 빠져나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서늘했다. 그 비를 맞으며, 윤은 자신에게 배정된 아파르트망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무슨 정신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윤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트가 물기에 젖어드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솔라가 호들갑떠는 걸 손을 들어 막았다. 솨아아, 멀리서부터 우울한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곳에 온 후 최악의 밤이었다.

**

화살은 단번에 산짐승의 목을 꿰뚫었다. 날쌔게 달려 도망치던 담비가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진다. 사냥개들이 컹컹거리며 그를 쫓아간다. 활을 등에 건 아스탄은 말을 몰아서 그에게 다가갔다.

화살에 목덜미를 꿰인 흑담비는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흥분에 팔딱거리는 심장 박동이, 떨리는 몸의 움칠거림이 가엽기 그지없으나 그것을 내려 보는 아스탄의 시선은 냉랭했다.

담비의 새까만 눈은 의문에 물들어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산짐승의 새까맣고 순한 눈동자는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아스탄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도록 단번에 그 숨통을 끊어주었다. 기수들이 뿔피리를 불어 사냥감을 잡았음을 알린다.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귀족들과 함께 사냥을 나왔다. 황성의 야트막한 뒷산에 미리 잡아놓은 사냥감들을 풀어놓고, 많이 잡았다며 잰체하는 허례허식이나 다름 없었다.

“오, 이건 흑담비 아닙니까.”

롭 이벨로크가 거대한 손을 뻗어 축 늘어진 담비를 들어 올려 여기저기를 살핀다. 귀신같은 활솜씨로 목을 꿰뚫은 덕분인지 모피가 거의 상하지 않았다. 모질을 보아하니 이정도면 상품 중에서도 극상품이다. 털옷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고, 남는 자투리는 붓으로 써도 좋을 만큼 훌륭하였다.

“이스트민스트 공녀께서 좋아하시겠군요.”

“……애비가일의 얘기가 왜 여기서 나오지?”

아스탄의 불쾌한 시선이 롭을 꿰뚫었다. 롭은 화살처럼 살벌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기며 어깨를 으쓱한다.

“거야, 공녀가 왜 노스트라드까지 왔고, 위험한 데도 같이 움직였겠습니까. 다 전하를 염두에 두어서 그런 것이지요.”

“그녀가 누구의 피를 이었는지 잊었는가?”

아스탄은 불쾌한 표정으로 롭의 손에서 담비를 뺏어들어 시중인에게 던지듯 넘겼다. 시종이 허둥지둥 받아들어 말 위에 얹는다. 사냥이 시작 된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사슴이 세 마리, 담비가 두 마리째였다.

사냥은 그 성과를 제법 올렸음에도 아스탄의 분풀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새까만 눈동자로 바르작거릴 때마다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 오를 뿐이다.

“그럼 전하께서 쓰시는 겁니까? 전하께 검은 색은 별로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내가 쓸 것이 아니다. 저것의 주인이 따로 있다.”

롭의 실없는 소리를 일축한 아스탄은 말에 올라탔다. 빠르게 말을 달리는 아스탄의 옆을 롭이 바짝 쫓았다.

“그나저나 하이어드 경의 고뿔은 좀 괜찮답니까? 며칠째 얼굴을 보지 못했군요. 무리했으니 탈이 날 만 하지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동료 아닙니까. 걱정할 수도 있는 거지요.”

롭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윤은 며칠째 고뿔로 와병 중이었다. 초월자의 몸에 병마가 들지 않는 다는 걸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었다. 꾀병 같지도 않았다. 열에 들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솔라의 보고를 받고 그 방문 앞을 서성이길 수일 째 반복하였다. 정작 얼굴을 들여다볼 용기는 없어서 애꿎은 의사와 신관들만 닦달했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좋아질 줄 몰랐다.

자신이 너무 심한 말을 퍼부은 건지 후회되었다. 처음이다. 미간을 좁힌 아스탄은 화살을 재어 단번에 새로운 사냥감을 향해 날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며 무거웠다. 윤은 간신히 눈을 떴다. 반투명한 베일이 너머로 천장의 음각된 문양이 눈에 들어온다. 시야의 구석으로 솔라의 얼굴이 침범한다. 그의 얼굴은 걱정과 초조함이 잔뜩 묻어나있었다.

이봐, 솔라. 일등 시종이 되려면 감정 조절도 잘해야 한다고? 그런 표정 시종으로서 실격이야. 장난스럽게 놀려야하는 데 목구멍이 따갑게 가물어 있었다.

“…뭐야.”

윤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드 마스터인 그는 만독불침이라 하긴 힘들었지만 거의 독에 내성이 있었고, 병마에도 고통 받지 아니하였다. 헌데 지금 상태는 무언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망치로 후려치는 듯하고, 온몸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그러게 왜 겨울비를 맞으셨습니까. 그것도 젖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주무시니 제 아무리 소드 익스퍼트라고 해도 호되게 감기에 걸리시는 겁니다.”

솔라는 툴툴거리면서도 다정한 손길로 윤의 입가에 쓴맛이 나는 액체를 흘려 넣었다. 약이었다. 윤은 그것을 꿀꺽 삼킨 후 피식 웃었다.

‘감기인가.’

이런 아픔이 낯설었다. 그가 아픈 경우는 대체로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이런 방식의 고통에 시달린 지 몇 십 년 만인가 하고 기억을 더듬던 윤은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최소한 십년이 넘은 것만은 확실하다. 근래에 이렇게 아팠던 건 레나드가 열다섯이 되던 해일 것이다. 장로가 된 율리히를 만나고 난 후, 그때도 오랜 몸살에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오늘이 며칠이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습니다. 열에 들떠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미안하네.”

“제가 응당해야 할 일인걸요. 그나저나 약도 드셨으니 좀 더 주무십시오.”

조심스럽게 휘장이 내려지고 사위가 어두워졌다. 윤은 계속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정신은 표면을 부유했다.

꿈을 꾸었다. 행복하던 시절의 꿈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때론 화내기도 했지만 대체로 즐거웠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화려한 관을 쓴 월스턴이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본다. 붉은 망토를 길게 늘어트린 그는 신화 속 왕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 4왕국과 16제후국을 복속한 후 그란디아가 제국이 됨을 선포하던 대관식이 치러지던 날이었다.

‘잘할 수 있어.’

윤은 웃으며 양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월스턴의 뒤에서 친우들이 웃고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브릭, 아론, 낸시, 제롬, 슈르카… 그리고 레나드.

이제 모두 세상에 없다.

“렌?”

윤이 뻑뻑한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을 때, 열기로 흐릿한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레나드다. 훌쩍 컸으나 미목수려한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너를 …사랑한단다.”

윤이 속삭였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접촉이 익숙하지 않은 듯 움칠 몸을 굳혔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열에 들뜬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네가 너무나 원망스럽구나.”

이제 그 마음을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았다. 그가 얽맨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마음이 무척 홀가분해졌다. 윤은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에게 벽을 세운 건, 겁쟁이였던 자신이 문제였다. 배신당하고 상처받는 게 싫어서 다가오는 이들을 밀쳐내며 레나드의 탓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윤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부풀어 오른 감정이 한 방울, 두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작품 후기 ============================

Q. 소설은 어느정도 진행이 되었나요?

A. 이제 슬슬 전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마 온만큼 더 가야할 것 같아요!

이 글을 읽고 추천과 감상을 남겨주신 모든 독자님들.

후원쿠폰을 주신 튜란도트님과 luwen님, 평량님께 감사드립니다. 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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