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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52화 (5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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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밝혀지는 정체

아스탄은 복잡한 표정으로 윤을 응시했다. 자신을 기만한 이가 아픈 게 무어 대수냐고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신관을 닦달해 축성을 퍼붓기를 반복했다. 문득 치미는 감정에 윤의 방에 들어선 순간 아스탄은 이제까지의 결정을 후회했다.

‘이건 열병 수준이 아니지 않느냐, 솔라!’

얼마나 앓았는지 그 사이 홀쭉하게 얼굴 살이 내려앉아선 형편없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얼굴이 가련하게 보일 정도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핏기를 가진 부분은 열이 오른 뺨 뿐이다. 모양새 좋은 입술도 제 색을 잃고 거칠거칠하게 일어나있다.

무슨 꿈을 꾸는지, 보는 사람이 서럽게 윤은 소리 없이 울었다. 그에게 품고 있던 분노는 갈 곳을 잃고 말았다.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훔쳐냈다. 계속해서 윤의 슬픔이 솟아올라서 그 자리를 메웠다.

“이상한 일이야.”

제멋대로 다가와서 굳게 닫힌 아스탄의 마음을 휘저어놓고선, 제 속마음은 하나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검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배신감에 화가 치밀어서 날선 말을 내뱉고 말았다. 후회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지고 난 후였다. 그때 윤이 지은 아연한 표정이 칼날처럼 아스탄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렌이라…….”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아스탄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현제 레나디온을 말하는 건가? 자신을 보며 윤이 지었던 애틋한 표정은 쉬이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쌔액, 쌔액-. 마른 입술에서부터 가는 숨이 새어나온다. 아스탄의 손가락이 가볍게 입술을 쓸어내렸다.

“쯧.”

윤의 입가로 생채기가 보였다. 황제에게 뺨을 맞으며 생긴 상처로 생긴 상처로 보였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상처를 덧그렸다. 따끔한 감촉에 윤이 한쪽 눈을 찡그린다. 문득 이상하단 생각을 하였다.

초월자의 몸은 벽을 넘는 순간 재구성되며 보다 완벽에 가까운 육체가 된다. 덕분에 병마에 시달리지도, 웬만한 독에 중독되지도 않는다. 상처가 생겨도 빠른 속도로 낫는다. 그러나 이 상처는 무언가. 보통 사람처럼 아주 느리게 낫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자의 정체를 알 수 없군.’

아스탄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골몰하는데, 순간 따뜻하고 습한 것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말캉한 습격자의 정체는 혀였다. 입술이 마르자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인 것 같았다. 열기에 말라버린 혀가 아스탄의 손가락을 핥아 올렸다. 그리고 입을 벌려 물기를 찾아서 빨기 시작했다.

“!”

아스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었다. 마치 강아지가 어미의 젖을 찾듯 색기라곤 전연 찾을 수 없는 움직임이건만,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손끝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오르는 짜릿한 감각에 순간 아랫배가 저릿해지며 하초가 반응했다.

당황한 시선으로 윤을 노려보았다.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 해사한 얼굴을 지녔다하나, 같은 거 달린 남자란 말이다. 그것도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 헌데 왜……. 제 손을 노려보던 아스탄은 황급히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솔라는 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설 때의 흉흉한 모습과 달리, 지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드 익스퍼트나 되어서 몸살에 저리도 고생하다니. 담비 가죽을 보내겠다. 그것으로 좋은 옷이나 지어주도록 해.”

“예, 그리하겠습니다. 저하.”

방 안으로 들어가자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어있는 윤이 보인다. 대화를 나눈 것 같진 않은데, 무슨 일이었을까. 땀에 젖은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솔라는 계속해서 공작이 당황할만한 이유를 생각해보았지만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늦은 밤, 윤은 눈을 반짝 떴다. 어느새 머리의 둔통이 상당히 가신 것을 깨달았다. 근육통으로 여기저기 쑤시던 몸 역시 가벼워졌다. 그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감기가 다 나은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뒤 캐노피를 걷어 밖을 내다보았다. 감기로 고생했다는 것도 잊은 채 창문을 활짝 열자 써늘한 겨울바람이 뺨과 목덜미를 쓰다듬고 지나간다. 겨울 장마가 지나간 밤하늘은 맑게 개어있었고, 여인의 눈썹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푸르게 반짝였다. 고요한 밤을 나이팅게일이 지저귀며 노래했다. 밖으로 몸을 기울여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밤공기 특유의 촉촉하고 맑은 기운이 폐부를 채웠다.

어쩐지 기분 좋은 밤이었다. 한참, 기분 좋은 밤을 만끽하던 윤은 옷자락을 가다듬은 후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되기 전, 아직 모두가 잠들지는 않은 시간이다. 아마 아스탄 역시 깨어있을 것이다. 천천히 방을 가로질렀다.

솔라는 구석의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팔로 이마를 받친 불편한 자세에도 쿨쿨 잠든 모습에 윤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의 옆으로 이마에 얹는 수건과 대야가 있다. 물을 얼마나 자주 갈았는지 손을 담그자 정신이 번쩍 들만큼 싸늘하고 맑은 물이 달빛에 반짝였다.

“고마워, 솔라.”

침상의 이불을 끌어온 윤은 솔라에게 덮어준 후 방 밖으로 나섰다. 그는 기척을 숨긴 채 천천히 황성을 제 집처럼 거침없이 누볐다. 황성 본관까지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초를 서는 기사와 병사들이 빽빽했지만, 들키지 않고 지하 통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통로는 마치 입을 쩍 벌린 괴물의 입 같다. 이윽고 윤의 몸을 어둠이 집어삼켰다.

아주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없는 바닥은 먼지로 가득했고, 군데군데 거미줄이 듬성듬성 끼어 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길을 걷다가 여기저기 부딪힐 테지만 윤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캐한 먼지가 올라왔다. 청소가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장소는 비밀 탈출 용도로 만들어진 곳. 누군가에게 청소를 시켰다간 목숨을 앗는 것으로 비밀을 유지해왔다. 이 통로의 끝엔 황제의 방을 비롯한 루 로열의 침실이 있다. 윤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문을 열었다.

아스탄은 평소와도 같이 깊이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상념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처음엔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에 날선 말을 내뱉었지만, 곧 후회하고 말았다. 그란디아로 돌아온 것도 필경 무슨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되었다.

‘정말 검공이 배신당해 죽었고, 복수를 위해 그란디아로 돌아온 ……그건 아니야.’

아스탄은 황태자로서 길러진 것은 아니나, 제 형보다 더 뛰어난 후계자 감이란 칭송을 들어왔다. 사람을 보는 눈에 자신이 있었다. 그가 본 윤을 믿었다. 성품의 선악을 떠나서 무심한 그 성격에 복수심을 불태울 것 같지도 않았다.

우선 윤이 깨어나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누였다. 잠이 오지 않고, 잠들어봤자 악몽에 시달릴 거라는 걸 알지만 체력 보충이 필요했다.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는데, 자그맣게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은 대대로 황제와 황태자들에게만 알려진 비밀통로다. 자객인가. 베개 속에 숨겨져 있던 검을 살며시 움켜쥔 아스탄은 몸을 긴장시켰다.

책장과 연결된 비밀통로가 열리고 청년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야.”

“윤?”

해쓱한 얼굴의 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검을 쥐었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여긴 어떻게 왔지? …아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군.”

“미안. 나쁜 의도로 쓰려는 건 아니었어.”

“널 탓할 생각은 없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스탄이 윤에게 다가갔다. 감기로 드러누운 주제에 여전히 얇은 튜닉 차림이었다. 아스탄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윤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서 어깨쯤에 정수리가 위치한다. 뼈대가 가느다란 몸이다. 이전에도 소드 익스퍼트라 믿기 힘들었는데 이젠 초월자라 한다. 속으로 가만히 그의 나이를 셈해보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제국력을 기준으로 이미 백세를 넘긴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어렸다.

“몸은 좀 괜찮은 건가?”

“덕분에…. 솔라에게 찾아왔단 이야긴 들었어.”

망설이던 윤이 이내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단호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있지. 아스. 모두 말할게. 우선 부탁이 있어.”

============================ 작품 후기 ============================

실수로 52화 예약을 걸어놓은게 잘못 올라간 탓에....ㅠ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후와 선작이 19000이 넘었네요!!! 세상에 ㅠㅠ.... 이럴수가... 놀라워라... (봉산탈춤)

이 글을 읽어고 선추코를 주신 모든 독자님들과 후원쿠폰을 주신 튜란도트님,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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