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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57화 (5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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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고발.

9장, 고발.

센트리움의 동쪽 지구, 몰락한 귀족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있다. 그들은 한때 권세를 누렸으나, 지금은 영락하여 부유한 평민들만도 못한 삶을 살아갔다. 로릭의 집은 그 중에서도 성벽에 가까운, 낡디 낡은 타운 하우스였다. 군데군데 오물이 진흙처럼 뭉쳐있고 오리가 바삐 돌아다닌다.

로릭의 누나, 로쟌느가 조심스럽게 닫힌 방문을 두드렸다.

“로릭, 잠시 들어가도 될까?”

대답 대신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공음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낡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가축들을 돌보던 탓에 그녀의 옷은 형편없이 더럽고 구겨져있었다.

황자의 호위가 되어 집안이 펼 거라 생각했던 것도 잠시, 동생은 어깨를 다쳐 기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행정직으로 보직을 변경하라는 제안도 받았다고 들었는데 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로쟌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술을 깨물었다.

갓 피어난 들꽃처럼 소박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로쟌느였지만, 지참금이 없어서 혼기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이제 혼인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동생을 지탱하느라 그녀의 어깨가 휘청거렸다.

대문에 설치한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가 황급히 문을 열자, 멋들어진 옷차림의 중년 신사가 콧수염을 문지르며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근위시종, 비어리드 남작이요.”

“처, 처음 뵙겠습니다. 남작님. 저는 로쟌느 도우슨입니다.”

“로릭 도우슨은 어디 있지?”

“그게, 저…….”

로쟌느가 말끝을 흐렸다. 비어리드 남작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황제 폐하의 부름이오. 로릭 도우슨은 당장 명을 따르시오. 지금 당장.”

한자 한자 짓씹듯 말하며 비어리드 남작은 뒤돌아섰다. 오물로 가득한 집에 들어오기 싫다는 듯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로쟌느가 바삐 움직였다. 황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지독한 술 냄새에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들어오지 말랬잖아!”

로릭이 고함을 질렀다. 로쟌느는 슬픈 눈으로 폐인이 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던, 순진하고 앳된 청년은 없었다.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로릭, 황제 폐하께서 널 찾으신대…….”

“황제가?”

로릭의 음울한 눈에 기광이 어렸다.

로릭은 눈을 가린 채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마차가 멈춰 섰다. 시종의 손을 붙잡고 습한 통로를 걸었다. 몇 번이고 비틀거리며 벽에 머리를 박았지만, 시종의 손길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걸어서 문을 건넌 후에야 눈을 가린 천을 벗을 수 있었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가 따갑다. 로릭이 눈가를 문질렀다.

“그대가 로릭 도우슨인가?”

안락한 의자에 기대어 있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가 30대 초반의 원숙미를 지니게 되면 저런 외모가 아닐까 싶었다.

“예를 표현하지도 않는 건가. 무례하기 그지없군.”

“……누구 때문에 다쳤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로릭이 술기운에 이죽거렸다. 황제가 하!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바보가 맞는 듯 보인다. 로릭 도우슨! 예를 취하라!”

황제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시종들이 강제로 로릭의 어깨를 꿇어 앉혔다. 로릭은 서릿발 같은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짐의 제안은 생각해 보았는가?”

“거절하겠습니다.”

“어째 서지?”

황제는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배신할 만큼 바보는 아니라 서요.”

이미 망가진 인생, 황제에게 무례하게 굴어봤자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육체는 망가졌지만, 자존심마저 무너진 건 아니었다. 로릭은 강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척과 이스트민스트 공녀는 자신에게 윤을 배신하라고 말했다. 그리한다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며 유혹의 손길을 뻗쳐왔다.

“왜? 그대는 자존심도 없나? 너보다 어린 청년이 훨씬 강하지. 고작 스물두 살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가 되었어. 그대와 달리 더 높이 날아오를 거야. 하이어드라는 그의 성처럼 말이야. 어쩌면 소드 마스터가 될 지도 모르지. 제가 살던 곳에서 평민인지 귀족인지 그 정체도 모를 인간이 말이야.”

황제는 은밀한 목소리로 속살거리며 로릭의 마음에 독을 불어넣었다. 마녀의 주술만큼이나 강력한 독, 열등감을 그의 마음에 심었다. 붉은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

“로릭 도우슨. 네 누나가 가엽지도 않나? 준남작이라 하지만, 귀족 아가씨가 가축이나 치고 있다니. 불쌍하게도 말이야.”

로쟌느. 마음에 박힌 가시였다. 로릭은 아픈 표정을 지었다.

“네 누나에게 좋은 혼처를 손수 마련해주겠다. 지참금 따윈 걱정할 필요 없이.”

“……무엇을 하면 됩니까?”

황제는 웃었다.

**

윤은 바닥에 앉아 검을 닦았다. 연마제를 바르고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는 규칙적인 움직임에 점점 졸음이 밀려왔다.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하자 트리기토스가 불만스럽다는 듯 웅웅 울었다. 어떻게 날 손질하면서 졸 수 있어! 하고 시위하듯 몸을 바들바들 떨기까지 했다.

도룬의 경계에서 있었던 전투 이후 단단히 삐진 그의 검은 좀처럼 마음을 풀지 않았다. 정성껏 검을 손질하여도 이걸로 내가 마음을 풀 줄 아느냐는 듯 흥흥 울었다. 솔라를 구하기 위해서였다지만, 자신을 집어던진 거에 대해 큰 불만을 품은 상태였다.

“진짜 사람 같단 말이야.”

손질을 끝낸 윤은 검집에 검을 넣었다.

솔라가 방안으로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트레이 위에 놓인 금고의 문을 열자 편지가 터져 나오듯 쏟아진다. 센트리움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오늘도 내게 온 거야?”

“예, 윤 님.”

황제가 주목하고 있는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 검공과 같은 나라에서 온 이방인. 윤은 그들에게 무척 매력적인 존재였다. 어떻게든 살롱에 초대해 사교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모두 거부의 의사를 밝히는 걸로 대필하면 될까요?”

“부탁할게.”

본디 초대장에 거절의 편지를 보내는 건 솔라 같은 시종의 몫이 아니다. 황족 같은 루 로열이 아닌 이상 초대장을 받은 장본인이 직접 작성해야 했다. 시종에게 대필을 시킨 것을 들키면 좋은 말을 듣긴 힘들다. 그러나 윤은 귀찮았고, 솔라는 대필에 재능이 있었다. 윤의 글씨체를 흉내 내서 입에 발린 말로 거절을 하는 솜씨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솔라가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너무 찝찝한데.”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니…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거 같지 않아?”

아스탄은 빠르게 제 사람들을 센트리움으로 불러들였다. 하나 둘 모여드는 수하들은 모두 그의 힘이 되었다. 마치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윤의 마음 속 한 구석엔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거야 뭐…. 황태자 전하께서도 만만치 않은 분이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무려 황제 폐하에게서 오 년이나 살아남은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만, 찝찝해. 뭔가 있어.”

윤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에단과 로릭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아이그너 경은 병가를 내었고, 도우슨 경은 현재 직무 전환을 고려중이란 이야긴 들었습니다.”

윤은 로릭이 신경 쓰였다. 센트리움으로 오는 내내 보았던 모습은 알콜 중독자와 다름없었다. 자신이 황제라면? 그 틈을 노릴 것이다.

“아스탄을 만나야 할 것 같아.”

노스트라드 공작과 황태자의 업무를 병행하느라 아스탄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가끔 밤에 얼굴을 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의 행렬이 기감으로 느껴졌다. 개 중 맹렬하게 빛나며 이목을 끄는 기운도 있었다. 아스탄이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문을 열었다.

“윤 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솔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제 손님이 올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아스탄이 제르센과 딘넬 백작을 비롯한 수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의 손엔 황금색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아스, 안녕.”

윤이 손을 살랑 흔들었다. 윤의 격의 없는 행동에 익숙해진 건지, 제르센을 비롯한 수하들에게선 별 다른 표정 변화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시간에 웬 일이야, 바쁘지 않아?”

“위대한 황제 폐하 덕분이지. 친히 재판을 열겠다고 하시더군.”

“재판의 이유는?”

“바로 너다.”

“뭐?”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솔라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봄데님과 류웰님 후원쿠폰에 감사드립니다.

일일연재는 계속됩니다! 완결까지 계속 하루에 한 편을 달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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