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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고발.
“로아크를 비롯한, 제국의 적들에게 정보를 유출했다는 내통죄다.”
“뭐? 내가 로아크와 내통을 했다고?”
로아크의 대족장 쿠르쉬가 들었다면 배를 붙잡고 광소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붙은 황당한 죄목에 윤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윤이 검공으로 지내던 시절, 로아크와 충돌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거둔 로아크인의 수급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덕분에 흑발흑안의 외양을 지닌 사람이 로아크의 영토에 들어간다면 지금도 오체분시 될 정도였다. 때문에 차 대륙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았던가. 그만큼 야만인들은 검공을 증오했다. 차라리 차 대륙의 어느 나라와 내통이라면 자신도 수긍했을 것이다.
“내통죄라……. 뒤집어씌우기엔 나쁘지 않지.”
“네 일인데 마치 남의 일처럼 대답하는 듯 말하는 군.”
“뭐,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이 있을테니까. 우선 서류 좀 보여줘.”
아스탄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은 윤은 그것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르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륙 공용어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장된 고어까지 사용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행정관들도 서류를 읽는 데 어려움을 호소했다.
“증거와 증인은?”
“……로릭 도우슨과 솔라 이전에 너를 담당했던 시종이다. 중거물은 재판 당일에 제출한다더군.”
서류를 넘기던 윤의 움직임이 멎었다. 로릭 도우슨. 그가 그란디아에 온 첫날 목숨을 구해주었던 어린 기사. 해맑은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던 순진한 녀석이 자신을 고발했다고? 예상은 했었으나, 뒤통수를 맞은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하하, 이거 참 재미있네.”
윤이 돌연 웃음을 터뜨리다 뚝 그쳤다. 무표정한 얼굴은 무척 선뜩했다. 그저 분노라고 표현하기에는 차갑게 벼려진 얼음 같았다. 솔라는 소름이 돋는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렉스 그랑드에 따르면, 첩자는 사형이다. 넌 반드시 네가 첩자가 아님을 증명해내야 한다.”
“알고 있어.”
“어찌 밝힐 생각이지? ……진실을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아스, 부탁 좀 해도 될까? 이번 건에 대해선 내게 맡겨주길 바라.”
윤은 서류를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다. 너를 믿지.”
언제나 한 발 물러선 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던 윤이 처음으로 앞에 나섰다. 아스탄은 윤의 손을 맞잡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윤은 팔을 들어올렸다. 솔라는 검은색 튜닉을 윤에게 입혀주었다. 위압감을 주기 위해 부러 무거운 색을 골랐다.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쓸어 넘겼다.
“솔라, 어때?”
“멋지십니다.”
솔라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윤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좀 더 무섭게 보여야한다고.”
“……경의 외모로 그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데요.”
“그런가. 하지만 재판에 참석하는데, 너무 어려 뵈는 외모는 신뢰도가 떨어져.”
“경의 외모가 실제로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확인한 후 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어쩐지 긴장되었다. 물을 마시며 입을 축였다.
“모든 준비가 되었나?”
“완벽해.”
아스탄은 붉은색 법복을 입고 있었다. 황태자인 그는 판관의 보조로서 재판에 참석할 예정이다. 판결은 황제의 권한이기에 별 다른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황제의 수작은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
“응.”
윤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아스탄이 의아해하며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윤이 가볍게 주먹을 부딪힌다.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아스탄이 피식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재판정으로 향했다.
본성의 중앙에 위치한 대법정. 센트리움 내에 법원이 따로 있으나, 이곳은 오로지 황제가 재판관으로서 참석할 때만 열리는 공간이다. 판관이 착석하는 재판정의 뒤편에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오색으로 반짝인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장식한 주인공은 정의와 진리를 수호하는 여신 하니스트다. 눈을 가리고 거대한 양팔 저울을 든 여신은 무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니스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주신이자 그녀의 아비, 벨라드는 그녀를 가엽게 여겨 진실을 볼 수 있는 세 번째 눈을 주었다. 세 번째 눈은 그녀의 심장에 위치해 있다.
첫 번째 아들 북풍의 윈디아가 요청하여도 주지 않았는데, 뒤늦게 알게 된 그가 분노했다. 거칠게 폭풍우치는 아들에게 벨라드가 이른다.
“가엾은 아들아,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만이 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벨라드의 가르침은 법관들이 가슴에 새겨야할 첫 번째 진리로 통했다.
신화시절, 하니스트는 오른손에 양팔 저울을 들고 다니며 다툼이 일어났을 때 중재자로서 활약했다. 양팔 저울에 각각의 사람을 올려놓은 채 죄의 무게를 잰 뒤 판결을 내렸다. 이후 양팔 저울과 하니스트는 법의 상징이 되었다.
“렉스 그랑드의 수호자, 팔라티온 바트만 크라이슬러 그란디아께서 드십니다. 모두 예를 취하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금색 수가 화려한 법복을 입은 황제가 재판정 안으로 들어섰다. 은으로 만든 양팔 저울을 오른손에 든 채 사람들을 가로질렀다. 아스탄은 그의 뒤를 따랐다.
법정의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가 양팔 저울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손을 들고 엄숙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짐, 팔라티온은 렉스 그랑드의 수호자로서 공정한 판결에 임할 것을 맹세하오.”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눈길로 재판정을 훑어보았다. 친 황제파와 친 황태자파 귀족들이 두루두루 참석하였다. 연회장에서 입는 화려한 복식은 자제한 채 다들 무채색에 가까운 단정한 옷을 입었으며, 작은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숨 막힐 듯 무거운 침묵을 유지했다.
“모두들 착석하십시오.”
재판을 진행하는 법관의 말에 따라 귀족들이 자리에 앉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리던 법관이 윤과 로릭을 향해 말했다.
“원고 로릭 도우슨과 피고 윤 하이어드는 입장하시오.”
재판장의 양 옆으로 난 문에서 각각 윤과 로릭이 입장했다. 상대적으로 담담한 인상의 윤과 안절부절 못하는 로릭이 대비되었다.
“각자 본인의 자리로 가시오.”
재판관석 양 옆으로 원고석과 피고석이 있다. 두 사람이 제 자리로가 앉으며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관이 로릭 도우슨을 호명했다.
“원고 로릭 도우슨 맹세하시오.”
“저는 로릭 도우슨 진실만을 말할 것을 여신 하니스트의 이름에 맹세합니다.”
“로릭 도우슨, 발언하시오.”
“신은 미력하게나마 황가의 기사로서 봉록을 받으며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로아크와 내통한 배신자, 윤 하이어드를 고발하고자 합니다.”
로릭은 땀으로 척척해진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배신하라니, 옳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누이를 생각하면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다. 이번 일을 무사히 처리해내면 금 100골덴이 그에게 주어진다. 남쪽 지구의 부촌에 위치한 거대한 타운 하우스를 구입하고, 어머니를 고위 신관에게 치료받게 할 수 있고, 로쟌느의 지참금으로 쓰고도 남을 돈이다. 로릭은 자신에게 주어질 보상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이유는?”
“그 자를 처음 만났을 때, 유창한 대륙공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제국의 현 상황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정보를 캐내려는 모습에 의심을 품었고 결정적으로 이것을 증거물로 내밀고자 합니다.”
팔라티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법관에게 명령했다.
“확인하라.”
로릭은 자신의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었다. 법관이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종이뭉치를 받아들어 팔라티온에게 바쳤다. 아스탄은 팔라티온의 어깨 너머로 증거품을 확인했다. 알 수 없는 문자들로 빼곡한 종이였다. 그 뜻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살던 곳의 문자라고 보여준 게 아닌가. 제법 머리를 썼다고 생각했다.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이가 없는 이상,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반박할 수 없단 뜻과도 상통했다. 허나 저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윤 역시 로릭이 제출한 증거품을 확인했다. 공작성에 온 첫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갈겨쓴 한글이다. 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솔라가 오기 전에 그를 담당했던 시종. 그가 빼돌렸음이 틀림없다.
“이곳에 온 후 하이어드 경이 작성하던 있던 문건입니다. 이것은 대륙 공용어도 아니며 고어도 아닙니다. 허나 신은 지난 날 우연히 로아크의 베나 족이 사용하는 문자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와 흡사한 모양이었고, 로아크와 내통하고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저의 목숨을 구명 받았다고 하나, 황가의 기사로서 감히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사태라 하이어드 경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로릭은 황제가 알려준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말을 이어갈수록 제 행동에 당위성을 얻었다. 그렇다. 저자는 첩자가 맞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같은 실력과 무지한 행동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추악한 질투심이었으나, 마치 무언가에 씐 양 눈치 채지 못했다.
술렁거림이 일었다. 로릭이 한 말은 제법 신빙성 있게 들렸다. 동시에 자신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인 윤을 향한 경계심은 거짓도 진실로 만들었다. 단시간에 획득한 지나치게 높은 신분이 기존의 세력들을 위협했다.
종이에 적힌 언어가 로아크의 문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로아크는 수십 개의 군소 부족을 묶어 부르는 단어일 뿐이다. 그들의 말은 수십 개고, 문자도 그와 비슷한 숫자에 달한다. 로아크의 문자라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하늘에서 솟아난 듯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는 청년이다.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황제 팔라티온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비죽 웃음이 솟아났다.
“그만! 모두들 정숙하시오!”
법관이 재판의 참관객들을 향해 경고했다. 그는 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피고, 윤 하이어드. 맹세하시오.”
“진실만을 말할 것을 여신 하니스트에 맹세합니다. 윤 하이어드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앞으로 할 말은 정해윤이 아닌 고용된 윤의 진실이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윤은 속으로 혀를 살짝 내밀었다.
“윤 하이어드. 발언하시오.”
“……우선 로릭 도우슨 경에게 매우 감명 깊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은혜를 이렇게 갚은 곳이로군요.”
“시끄럽다! 간악한 첩자여!”
“레파토리는 백년이 지나도 발전하질 않네?”
로릭의 얼굴이 붉어졌다. 윤은 차갑게 대꾸했다. 차가운 얼어붙은 시선으로 응시하자 로릭은 움칫 어깨를 떨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냉랭한 살기에 위축되었다.
“피고는 재판과 관계되지 않은 발언을 자제하시오!”
법관이 냉랭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허락되지 않은 발언이 계속될 경우 피고의 발언권을 빼앗겠소.”
“앞으로 신경 쓰도록 하지요. 우선 로아크의 내통 증거로 내민 종이에 대해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한글이라는 제 고국의 문자입니다. 이는 브리니드 맥카터 교수께서 증언해주실 겁니다. 증인으로서 브리니드 맥카터 교수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인정한다. 브리니드 맥카터 교수를 증인으로 데려와야겠군. 노스트라드에 머물고 있는 그를 데려오게 되면 2차 공판을 열도록 하지.”
“폐하, 그전에 제 신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윤이 황제를 보며 말했다. 황제가 흥미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다. 발언을 허락하지.”
“저는 단지 검공과 같은 곳에서 온 정도가 아닙니다. 제가 검공의 후인(後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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