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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61화 (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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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고발.

“하이어드 경,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폐하의 근위시종 비어리드 남작입니다.”

대련이 끝난 후 쉬고 있던 윤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강퍅한 인상을 지닌 콧수염의 신사였다. 굳게 물어진 입매와 찌푸려진 미간, 뾰족한 턱이 그 성정을 짐작케 했다.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비어리드 남작. 그런데 무슨 일로…?”

“당신을 보길 원하는 분이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어리드 남작이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바로 눈치챘다. 근위시종이라고 제 관등성명을 밝히지 않았는가. 황제밖에 없었다.

“다만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긴 시간은 안 됩니다. 고귀한 분을 마냥 기다리게 하실 작정입니까?”

“지금 제 모습을 보시지요. 황제 폐하를 알현키에 적절한 모습이라 생각하십니까?”

별 다른 일정이 없었던 터라 윤은 평복 차림이었다. 시간을 달라한 건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시종장이 깐깐하게 구는 모습에, 윤의 태도 역시 자연 뾰족하게 변했다.

이렇다 할 작위가 없지만 검공의 후계였다. 시종장인 남작이 함부로 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 방 먹은 시종장이 수염을 푸들푸들 떨었지만 무어라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른 준비하시지요.”

뒤돌아선 윤은 솔라를 향해 눈을 찡그리며 혀를 베 내밀었다. 웃음을 참는 솔라의 입술이 뒤틀어졌다.

근위시종 비어리드 남작이 안내한 장소는 구름의 방, 예전부터 황족의 사적인 응접실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장소에 윤은 감회서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백년의 시간은 그냥 흐른 게 아니어서 완벽하게 달라져 있었지만, 그 속에 깃든 추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황제, 팔라티온은 흔들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은 눈을 흩뿌렸다. 윈디아가 부리는 눈의 정령 스노위가 장난을 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룡 가리온의 대리자로서 그란디아를 통치하는 위대한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그 은혜가 만고에 지속되기를.”

“일어나도록.”

“예.”

“이쪽으로 가까이.”

윤은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황제가 마주보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시선은 아래에 고정한 상태로 황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황제는 창백하고 피로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최소 사십 줄의 나이에 들었을 텐데, 외양은 열 살 이상 어려 보인다. 그의 왼쪽 손등에서 가리온의 인장이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알현실에서와 달리 지금 만난 황제는 미친 사람 같지 않았다. 노골적인 광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제 어깨에 진 짐이 너무 무거워 휘청거리는 우울한 남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줄곧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황제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이런 밤이면 꿈을 꾸지.”

“…….”

“끊임없는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꿈을. 도저히 빠져나올 길은 보이지 않아. 구원은 요원하기만 해. …그런 꿈을 경은 꾸어본 적 있나?”

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이쪽을 응시한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입술의 상처가 모두 나았군.”

“예.”

흉터없이 깨끗하게 상처가 나은 건 모두 솔라의 덕분이다. 맞은 건 윤인데, 솔라가 더 속상한 얼굴이었다. 상처에 좋다는 온갖 연고를 구해 와서 발라주었다. 아니 황제 폐하는 미쳤으면 혼자 미칠 것이지 왜 사람을 때려서 생채기를 만든대요. 하는 투덜거림도 함께였다. 그의 노력이 통한 것인지 제법 깊은 상처였는데도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게 나았다.

‘그러고 보니 상처가 아무는 속도가 더뎠지.’

소드 마스터가 된 후 신체의 흐름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상처는 하루 정도면 낫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입술의 상처는 낫는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차원이동의 부작용인 것일까. 황룡 가리온을 만나면 물어볼 것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되었다.

“흉이 하나도 없어. 아쉽군.”

“…….”

황제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침묵을 선택하였다.

“가끔은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안겨주고 싶을 때가 있어. 그렇지 않나? …그 흉터를 보면서 오로지 나만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야.”

“글쎄요. 좋지는 못한 취미라 생각됩니다.”

윤의 솔직한 말에 황제가 하하 웃었다.

“짐은 경을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었어.”

“……별 거 아닌 검사뿐입니다.”

“진실로 그리 생각하는가? 하이어드 경. 그대의 성은 솔직히 어울리지 않아. 내 아들이지만 작명 실력은 좋지 못한 것 같군.”

황제는 짙은 핏빛 액체를 단숨에 마신 후 컵을 바닥에 던지듯 내팽개쳤다. 파공음과 함께 유리가 산산 조각나며 윤의 뺨을 스쳤다.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졌다.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반대편 벽으로 다가갔다. 그가 향하는 곳엔 짙은 남빛 커튼이 벽을 가리고 있었다. 은실로 화려한 수를 놓은 커튼은 샹들리에의 불빛에 이지러졌다. 이윽고 손을 뻗어 찢어내듯 커튼을 걷어내었다.

낡은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익숙한 외양.

―그림 속 남자는 자신이었다.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윤 하이어드보단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지.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검공의 후계가 아니라, 그 본인이지 않나.”

“……어떻게.”

“무례하군. 짐이 그대를 호명하였다. 대답하지 않는 건가?”

황제의 입술이 비틀렸다. 또렷하고 이지로 반짝이던 눈에 번들거리는 광기가 덧씌워졌다.

“초상화는 현제 레나디온의 대에서 모두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아직 남아있었던 겁니까?”

“소실? 흥. 누구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진실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제 무덤까지 가지고 갔어야지.”

황제가 코웃음 쳤다.

“……한 가지 더. 저의 정체를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도룬 남작의 성에서 그대를 보았지. 검공이 맞다고 확인하였을 때… 짐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겠나? 게다가 그 펜던트까지.”

황제의 눈은 희열로 번뜩였다. 그는 센트리움 안에서 줄곧 머물러 있었다. 어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답은 순식간에 도출되었다. 고독(蠱毒)이었다. 윤은 주먹을 꽉 쥔 채 황제를 노려보았다.

“남작을 살해한 범인이 바로 폐하셨습니까. …마녀였던 겁니까?”

황제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마녀(魔女)는 여자들만 칭하는 단어는 아니다. 투시, 염동력, 독심술, 저주 등. 보통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총칭하는 단어에 가깝다. 이능력을 발현하는 이들의 성별이 여성이 대부분이었기에 마녀라 불려왔다.

당대의 가장 뛰어났던 대마녀 안즈마네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황가의 모두가 마녀가 될 수 있다. 황제는 그 피가 가장 짙은 자였다. 그를 범인이라 생각하면 모든 아귀가 들어맞았다.

저주 받을 금기를 범한 자가 그란디아의 황제였다. 이 사실이 외부로 밝혀진다면, 큰 파문이 일 것이다. 게다가 도룬 남작이라면 대표적인 황제파 귀족 아닌가. 자신의 수하마저 이용하는 비정함에 치가 떨렸다. 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왜 그런 겁니까?”

“그대를 보기 위해서였지. 척 베스파뇰이 그대의 용모파기를 전했을 때, 짐이 얼마나 기뻤는지 아는가. 좀 더 확신이 필요하였어.”

사람을 조종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훔쳐보는 동시에 살인범으로 궁지에 몰아넣는 함정은 교묘했다. 아마 운이 따르지 않았더라면 누명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뒤를 쫓아다녔으리라.

“겨우 그것 때문에 자신의 수하를, 한 가문의 장을 죽인 겁니까?”

“겨우? 어째서 그것이 겨우지?”

황제가 윤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보다 반 뼘 정도 키가 큰 황제를 강하게 쏘아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윤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은 손가락에서 사락거리며 흩어진다.

제정신인 것 같지 않은 모습에 윤은 마나를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방 안에는 황제의 수신호위 셋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대기 중인 근위시종과 기사 둘. 물리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갑작스럽게 윤의 다리를 걸어 바닥에 쓰러트렸다. 버티고 설 수 있었지만, 황제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넘어졌다. 바닥에 누운 윤의 위로 황제가 올라탔다.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버림받은 검공이여. 짐을 죽이러 온 건가?”

“아닙니다.”

“거짓말.”

단호하게 부정한 황제는 긴 손가락을 뻗어 윤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에게선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복수를 해야지. 우리가 밉지 않나? 그대를 착취해 이 거대한 제국을 유지했지. 응? 증오스럽지 않아?”

광기 어린 목소리로 다정하게 속살거리며 마음에 독을 불어넣는다. 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원하는 대로 답하지 않자, 돌연 표정을 차갑게 굳히더니 윤의 뺨을 쓸어내렸다. 유리잔에 의해 생채기가 난 뺨을 꾸욱 눌렀다. 찌릿한 통증에 눈가가 가볍게 찡그려진다.

“그대 때문이야. 짐이, 황가의 사람들이 광증에 시달리는 것은…….”

“어째서 저 때문입니까? 제가 주술에 무지하다는 건 잘 아실 텐데요.”

화를 내야할 쪽은 이쪽인데 적반하장으로 구는 모습에 윤이 억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진실로 그대가 관련되지 않았다 생각하나? 용감한 자가 황룡 레기온에게 물어보았지.”

“……답은 무어라 나왔습니까?”

“너희의 죗값이라고. 그러니까 그대 때문이야.”

황제는 음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윤. 그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하니까.”

마지막 말은 무척 작아서 그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황제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차갑게 식은 물방울은 뺨 위로 떨어져서 이내 굴러 떨어졌다. 차갑고 우아한 손이 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잠시 어찌할까 생각하던 윤은 몸에 힘을 뺀 채 황제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건 황제도, 윤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소드 마스터였고, 초월자였으니까.

“재미없군.”

목을 조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황제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의자에 가서 앉았다.

“돌아가 보도록.”

자신을 보지 않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윤은 방을 나섰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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