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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고발.
깊은 밤,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면증에 아스탄은 잠들지 않고 깨어있었다. 홀로 체스를 두며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계산했다. 앞으로 황제에게서 황위를 탈환하려면 살얼음 위를 걷는 듯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를 조심해야했다. 일단 용의 계곡으로 가야하는데, 분명 제도를 벗어난다면 황제의 추격자들이 쫓아올 것은 명약관화였다.
‘우선 말을 타고 달려서 향항 사우스클라인으로 이동한 뒤 배를 타고, 용의 계곡으로 가는 게 낫겠군. …아니 목걸이만 손에 넣는다면 일은 쉬워지지만 불가능에 가까워.’
황실의 보물창고에 있는 대마녀의 펜던트. 그것만 손에 넣는다면 순식간에 공간이동을 할 수 있으니 훨씬 이동이 용이해진다. 물론 그 방법은 불가능에 가깝다. 윤의 목걸이를 사용하는 방법도 계산에 넣었지만, 문스톤의 힘을 모두 사용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아스탄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천천히 체스 말을 움직였다. 폰은 이레인, 킹은 자신, 퀸은 윤이다. 폰도 언젠가는 그 쓸모가 있으리라.
아스탄의 집중을 깨듯 톡톡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건 창문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아스탄의 처소는 3층이었다. 돌을 던진다 한들 결코 닿지 않을 거리다. 의아해하며 창가로 다가가는데 작은 돌이 또다시 노크하듯 유리에 부딪혔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 검은 머리의 청년이 손을 흔들고 있다. 윤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스탄은 미간을 좁힌 채 밑으로 내려오라는 거냐는 뜻으로 바닥을 가리키자 팔을 크게 휘젓는다. 아니란 의미였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비키라는 듯 손짓을 한다.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손목과 발목 관절을 이리저리 꺾은 윤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벽에 달라붙어 재빠르게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황태자의 방에 침입하고 있었다. 몸을 고정할 끈 하나 없이 벽을 오르는 모습은 겁을 상실해도 제대로 상실했단 생각이 들었다. 발코니로 난 장식들을 붙잡고 요령껏 올라오는 모습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마침내 아스탄의 방으로 들어선 윤이 씩 웃었다.
“아스! 좋은 밤.”
“제정신인거냐! 추락은 걱정도 되지 않는 거냐.”
“내 취미가 한때 클라이밍이었거든. 이 정도는 껌이지 뭐.”
“클라이밍?”
“그런 게 있어. 절벽을 타고 오르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일종이랄까. 어쩔 수 없잖어. 들키지 않고 방으로 들어오려면 이 방법 밖에 없는 걸.”
아스탄은 점점 윤의 세상이 궁금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으며, 전쟁이 아닌 유희를 위해 수련을 하는 곳,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자신이 살던 곳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별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말을 곱씹어보면 이곳과 전혀 달랐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황제가 내 정체를 알고 있었어.”
“…네가 검공임을 알고 있었다는 거냐.”
“응.”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황제가 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하였으나 치고 나오는 행동이 예상을 벗어났다. 아스탄은 황제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비밀에 붙이리라 생각하였다. 어찌되었든 윤은 자신과 손을 잡았다. 제 적수의 세력이 덩치를 불리는 게 도와주는 건 바보짓이 아닌가. 눈치채었다면 끝까지 비밀로 했어야지 어찌하여 그 사실을 밝힌 거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의자에 앉은 아스탄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골몰했다. 그 사이 윤은 황태자의 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구름의 방과 달리 바람의 방은 레나드가 사용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되어 깊은 광택을 자랑하는 고가구를 손으로 쓸다가 침대가로 다가갔다.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 칭얼거리는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곤 하였다. 가끔은 졸려서 제 방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함께 잠들기도 했었다.
“여전히 침대는 푹신하네.”
공작성에서도 귀빈의 방에 지냈고, 황성에서 주어진 방도 무척 크고 좋았다. 하지만 황태자에게는 차원이 다른 귀한 것이 주어지는 법이다. 침대만 해도 살짝 엉덩이를 가져다대었을 뿐인데 편안하게 감겨는 것이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침대에 벌러덩 누운 윤이 뒷목에 깍지를 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문양을 쳐다보고 있자 졸음이 슬슬 몰려온다. 여기서 자고갈까. 새벽에 일찍 일어나 벽을 타고 도망치면 모를 것 같은데…. 그 정성으로 제 방에 돌아갈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흐아암. 입이 찢어져라 길게 하품을 하는 모습에 아스탄이 어이없는 시선으로 윤을 쳐다보았다.
“뭐하는 거냐.”
“휴식. 어차피 난 두뇌파가 아니라서 머리를 쥐어짜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네가 대신 생각해줘.”
윤이 태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무척 당황하였으나, 지금은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한 상태였다. 어찌되었든 황룡 레기온을 만나서 인장을 받은 아스탄이 황제가 되면 밝혀질지도 모르는 비밀이다. 요컨대 시간의 문제였다. 황제가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스, 여기서 자고 가도 돼? 내 방에 가기 귀찮은데.”
아스탄의 침실은 본성에 위치하였고, 윤의 처소는 본성에서 10여분가량 떨어진 쁘디 아파르트망에 위치해 있었다. 편한 침대 위에 눕자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아스탄은 멈칫하였다. 물론 저 태평한 얼굴을 보건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종류가 아니리라. 그런 목적이 아니더라도, 윤과 함께 잠드는 날이면 드물게 숙면을 취했으며, 악몽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노스트라드에서라면 못이기는 척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은……. 아스탄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왜?”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의아한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아스탄이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윤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잠깐…. 목의 이건 뭐지?”
황제에게 목이 졸렸던 자국이 남은 모양이었다. 아스탄이 샹들리에의 불을 밝혔다. 윤은 갑자기 눈으로 쏟아지는 환한 빛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눈을 찡그렸다. 밝아지자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시퍼렇게 올라오기 시작하는 교흔에 아스탄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한 짓이냐.”
“누구겠어. 네 아버지지.”
윤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순식간에 표정이 험악해지며 그 눈빛에 살기가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칼을 빼어들고 쫓아갈 듯 험악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자가?”
“별 거 아냐. 광증이 도졌는지, 잠깐이었다고.”
잘못하다간 존속살인의 방아쇠가 될 것 같아서 재빨리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네겐 목이 졸린 일이 대수롭지 않단 말인가?”
“아스, 진정해. 황제가 그런 걸로 날 죽이지 못한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리고 가만히 넘어갈 생각은 나도 없다고. 언젠가 야무지게 복수할 거니까, 일단은 내버려둬.”
아스탄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의 말이 옳았다. 눈앞의 청년은 소드 마스터다. 세상의 정점에 선 초월자다. 목을 조르는 방법 정도론 죽지 않는다. 그러나 저 태평한 태도 때문일까. 되레 냉정을 찾기 힘들었다. 난폭한 감정이 뱃속을 부글부글 달구었다.
손을 뻗어 그 자국을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목은 한 손에 충분히 들어왔고, 힘을 주면 꺾어질 것 같았다. 난폭한 충동에 아스탄은 이를 악 물었다. 윤의 뺨에 그어진 붉은 선을 확인하곤 더욱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이건 또 무어냐.”
“……어쩌다보니 생겼어.”
윤은 매서운 시선을 외면하며 중얼중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스탄이 거칠게 종을 울렸고, 불침번을 서던 시종이 방 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던 윤과 침의 차림인 아스탄을 보자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처에 좋은 약을 가져와라. 소독제도.”
“괜찮아, 이정도 상처는. 금방 낫는다니까. 괜찮으니까, 가져오지 마.”
신체 에너지가 활성화된 초월자의 몸이라서 어지간한 상처는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금방 나았다. 타고나길 무심한 성격이라 흉터가 남는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상처가 낫는 속도는 이전보다 좀 느려진 것 같긴 하였으나 이상을 느낄 정도는 아니어서 가볍게 넘겼다.
두 사람의 모습에 얼이 빠졌던 것도 잠시,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아스탄의 모습에 시종은 겁을 먹고 말았다.
“그, 그럼 어찌 할까요. 전하.”
사이에 낀 시종은 어쩔 줄 몰라했다.
“가져오도록. 지금 당장.”
황급히 고개를 숙인 시종이 뒷걸음질 쳐서 방을 빠져나갔다.
언뜻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얼굴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미간을 좁힌 윤은 저도 모르게 “왜 저런 표정…….” 하고 투덜거리다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입술이 절로 꾹 다물린다.
침대에 앉아 있는 자신과 맞은편에 선 남자, 아스탄. 금방이라도 잠자리에 들 것처럼 편한 복장의 아스탄은 무척 얇은 침의를 입은 후 로브 차림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연인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미묘한 분위기 아닌가.
시종의 시선이 내포한 의미를 알아차린 윤은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하도 누군가를 곁에 두지 않아 생각지 못한 패착이었다.
“난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갈게.”
“……자고 간다 하지 않았나?”
난감해하는 윤의 안색을 눈치 챈 아스탄은 미묘한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그리고 윤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압박하듯 한 발짝 다가섰다. 시선이 마주치자 어쩐지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윤은 눈을 내리 깔았다. 그건 실수였다.
비단으로 만든, 얇은 침의는 몸의 윤곽을 그대로 비추었다. 근육으로 단단한 상체와 뚜렷하게 도드라지는 하초의 실루엣까지. 발기하지 않았건만 흉기와도 같은 크기였다. 이전에 보았던 남자의 나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을 응시하던 열기 어린 시선까지…….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 듯 했다.
“아, 아냐. 괜찮아!”
윤은 결단코 남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본 적 없었다. 검공으로 지내던 시절, 간혹 같은 성별을 가진 이에게 유혹을 받은 적 있긴 하였으나 모두 정중히 거절하였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최대한 누군가와 연을 맺는 걸 꺼렸기 때문이다. 여자도 거절하던 상황에 남자를 받아들일 리 없지 않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눈앞의 풍경이 크게 출렁거렸다. 어깨를 떠밀려서 침대 위로 쓰러진 윤이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시야엔 천장이 들어오고, 아스탄이 올라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공격할 뻔한 윤은 속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릎에 옆구리를 맞았더라면 최소한 갈비뼈 서너 대는 나갔을 것이다.
“아스? 뭐하는—.”
“야심한 시각에 남자의 방에 찾아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아스탄은 손을 들어 윤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크고 따뜻한 손을 천천히 미끄러트려 뒤통수를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작품 후기 ============================
후원쿠폰을 주신 평량님과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공지사항을 보시면 beaconK님께서 예쁜 나전보 팬아트를 주셨어요! 윤이할배와 아수탄입니다! 우헤헤헤헤 >_< 제가 넘 좋아서 모니터를 향해 구애의 춤을 마구마구 추었어요. 혹 보셨나요?
60화 기념으로 Q&A를 진행할까 합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봐주셔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