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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위협
이윽고 춤곡이 끝났다. 홀 안은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윤과 아스탄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는 만족을 담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윤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어서인지 숨이 찼는데, 그에 비해 아스탄은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록 호리호리한 체구라고 하지만 성인 남성을 들어 올려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 맺히지도 않았다.
아스탄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쪽 무릎은 세워 앉았다. 마치 귀부인에게 바치는 예의처럼 정중하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보드랍고 말캉한 입술을 묻었다가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모두들 이 연회를 즐기길 바라오.”
악공이 다시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바늘을 떨어트리면 그 소리마저 들릴 것 같던 홀을 풍부한 현악기의 음이 가득 채웠다.
이제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춤을 출 차례였다. 모든 귀족들이 제각기 짝을 이뤄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남자들끼리 춤을 추는 귀족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스완은 붉은 머리칼이 매력적인 아가씨와 춤추기에 실패한 건지 롭과 손을 잡고 우울한 얼굴로 왈츠를 이어갔다.
“어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죠?”
“에로메스는 찬란한 금발의 소년이었는데, 이번엔 흑발이로군요. 흑의 윈디아와 금의 에로메스가 자신의 머리색을 바꾸었나 봅니다.”
딴엔 춤추는 이와 소곤거리는 대화이었지만 기감이 발달한 윤의 귀엔 바로 옆에서 떠드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꽂힐 듯 집중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싶어서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건 대놓고 공개연애 선포나 다름없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파티가 끝나기 무섭게 소문이 돌 것이다. 황태자와 검공의 후인은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고.
이런 소문에 시달리는 건 처음이 아니다. 한때 월스턴과 자신도 이상한 소문에 시달려야했다. 월스턴이 숨겨둔 애첩이 저라는 등, 엘프와 시황제의 사이에서 저울질한다는 내용엔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폭소했었다.
‘이건 소문이 아니지만.’
윤은 뺨을 긁적거렸다. 그래도 자신보다 반백 살은 어린 청년을 홀라당 낚아채려니 있는 지 그 존재를 몰랐던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제 자손을 낚아챈 모습을 본다면 월스턴이 얼마나 기막혀할까. 문득 친우들이 보고 싶어졌다. 센트리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의 무덤이 있으니 기회가 되면 찾아가겠노라 마음먹었다.
시종을 불러 술을 두 잔 가져오도록 이른 아스탄은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윤에게 다가왔다.
“자, 목마르지 않나?”
“도수가 약한 술은 싫은데.”
윤은 투덜거리면서도 아스탄이 내민 잔을 받아들었다.
“음?”
술을 한 모금 마신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샴페인이 아니었다. 달짝지근한 꽃향기와 짙은 나무냄새가 농후한 매력을 가진 술은 순한 과실 목넘김이 의외로 독해서 삼키고 난 후엔 머리가 찡할 정도였다. 겉보기엔 벚꽃처럼 사랑스러운 핑크색 액체는 보카로 왕국산 화주 못지않았다.
“이거 연회장에서는 안내놓는 거 아냐?”
“맞다. 눈속임이지.”
아스탄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시종이 아무렇게나 내어놓는 술도 믿을 수 없으니, 내 술을 마시는 수밖에.”
맛있는 술에 유쾌해진 것도 잠시, 어쩐지 씁쓸해진 기분에 윤은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입맛에 맞나보군. 다행이야.”
“괜찮네. 이거.”
“차 대륙에서 건너온 술이다. 이름이 여아홍(女兒紅)이라고 하더군.”
“여아홍?”
“딸이 태어나면 찹쌀로 술을 빚어 땅에 묻고, 혼인을 치를 때 꺼내어 손님들에게 대접한다더군. 차대륙의 사신이 가져온 것이다. 입맛에 맞으면 제르센의 편에 보내도록 하지.”
“좋아! 잊으면 안 돼.”
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술을 좋아하는 건가?”
“아무래도 술을 마시는 건 취하기 위해서니까….”
맛좋은 술을 더 마실 수 있단 생각에 흥겨워진 윤은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남은 술이 줄어드는 게 아까운 것처럼 아끼고 아껴 마시는 모습에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 금은보화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이가 고작 술 한 병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은밀하게 훔쳐보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본디 냉랭한 성품으로 이름 높던 황태자가 봄볕 햇살처럼 따스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쉬이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대화를 좀 더 나누려던 찰나, 제르센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 제티온 후작이 뵙길 청하나이다.”
“……알겠다. 기다리라고 전하도록.”
“중요한 사람을 기다리게 하면 안 돼지! 아스, 어서 가봐. 난 알아서 놀고 있을게.”
윤은 아스탄을 떠밀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탄은 저 멀리서 붉은 콧수염이 멋들어진 제티온 후작을 향해 걸어갔다.
“윤 님! 아니 클레먼스 변경백!”
아스탄이 자리를 뜨자마자 스완과 롭이 다가왔다. 스완 역시 제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신경깨나 쓴 모양새였다. 롭은 회색 늑대 기사단의 정복을 입었다. 아직 로망을 잃지 않은 청년과 연회에 무신경한 중년 남자의 대비가 우스워서 윤은 쿡쿡 낭랑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윤이라고 불러.”
“그, 그래도 됩니까?”
“그럼, 편하게 부르라고.”
“네, 네! 윤 님!”
스완은 역력한 흥분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발그스레한 소녀의 뺨과 같은 빛깔이라 여아홍이라 이름 붙은 술처럼 청년의 볼이 붉었다.
“하이어드 경. 오늘도 멋지구려.”
“이벨로크 경은 조금 신경쓰는 게 좋았을 거 같은데.”
“나야 이제 잘 보일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다오.”
우리 부인이 질투하거든. 롭이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윤은 피식 웃으며 롭이 새로이 내민 술잔을 받아들었다. 이번엔 과일과 함께 끓여내서 식힌 상그리아의 일종이었다. 연회에 내놓는 것이라 도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윤은 천천히 영광의 방을 둘러보았다. 기사들이 구보를 뛰어도 될 만큼 넓은 방안에 사람들이 빽빽하리만치 들어차있었다.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에 기가 질린다. 연회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레나드의 대부로서 자리를 지켜야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도 이만치 많은 사람들이 오진 않던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이 내뿜는 겉과 속이 다른 악의에 속이 메슥거릴 정도다.
“사람들이 엄청 많은 거 같네. 대연회에 이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던가.”
“거야 아스타시온 전하도 몇 년 만의 귀환이고, 몇 년간 제도는 흉흉한 분위기여서 연회가 열려도 제대로 즐기질 못했거든요. 게다가 윤 님도 계시고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스완이 대답했다.
세 사람은 술을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완은 가슴 속에 희망을 품은 채 새로운 꽃을 찾아 떠났고, 롭은 새로운 술을 찾아 떠났다. 아스탄은 돌아올 줄 몰라서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홀로 남은 윤을 향해 사람들이 시선을 보내었다. 탐색하는 눈길은 익숙했다. 호의가 담긴 시선도, 적의가 담긴 시선도. 그러나 그 속에 파묻혀 상대하는 건 귀찮은 일이라 윤은 사람들이 말을 걸기 전에 재빨리 테라스로 도망쳤다. 아늑한 의자를 가져다놓은 테라스는 연회에 지친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다.
의자에 앉은 윤은 자신의 시종을 돌아보았다. 솔라는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이들과도 친교를 쌓지 않는 모습에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솔라, 술을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옙!”
“연회장 안에 있는 도수 없는 술 말고, 독한 걸로.”
“다녀오겠습니다.”
윤의 부탁에 솔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솔라가 자리를 비우고 난 후 윤은 의자에 앉아 연회장 안을 구경했다. 사람들은 마치 공작새 같았다. 있는 힘껏 몸을 치장하고, 기세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보다 적절한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스탄은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도 단번에 찾을 수 있다.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수려한 외양의 청년이다. 아마 여자로 태어났다면 경국지색의 미모라 불렸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한 순간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서 윤은 홀로 무릎을 두드리며 폭소했다.
의례적인 대화를 끝마친 아스탄이 뒤돌아섰다. 이번엔 사우스클라인 공작가의 방계인 멜번 백작가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우스 클라인 공가 특유의 진회색 머리칼을 지닌 중년 남성과 십대 후반의 소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오팔로 머리카락을 장식한 소녀의 머리칼은 샹들리에의 불빛에 따라 은발로도 보였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몸매는 무척 성숙했으며, 짙은 감색의 드레스로 제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하는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아스탄과 옷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윤은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손으로 제 턱을 괴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쁜데 왜지. 불쾌한 감정의 연유를 찾지 못해서 미간을 찌푸리고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솔라는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거야. 술을 만들어서 오는 건가.’
기다리다 못한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한 귀부인이 테라스의 유리문을 두드렸다. 미간에 주름을 박제한 것 마냥 찌푸린 눈썹을 펼 줄 모르는 귀부인은 애비가일의 샤프롱, 디스그렌 백작부인이다.
“클레먼스 변경백.”
“디스그렌 부인. 무슨 일로….”
“공녀께서 그대를 뵙길 바랍니다.”
윤은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재빨리 수습했다. 애비가일은 아무래도 꺼려지는데. 그러나 귀공녀의 부름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뿐더러, 도룬 남작성에서 신세진 것도 있었다. 이스트민스트 공작이 황제파라하나 대놓고 척을 져서 좋을 사람은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애비가일이 천천히 테라스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퍼지는 꽃잎처럼 겹겹이 천을 겹쳐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황가의 핏줄이 어디 가는 게 아니라서 홀 안에 있는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미모였으나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오른 손을 내밀었다. 윤은 그 손을 붙잡아 입 맞추는 척 했다.
“클레먼스 변경백이 되신 걸 축하드려요. 응당 그대가 차지했어야하는 자리지요.”
“감사합니다, 공녀.”
윤은 담백하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싫어요.”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에도 흡족해진 애비가일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가볍게 눈을 흘겼으나 정말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디스그렌 백작부인이 잔을 가져와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서 윤은 마시는 체 했다. 향으로 보아 서쪽 지방에서 나는 과실주의 일종으로 추측되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애비가일이 가볍게 잔을 돌렸다. 살짝 눈을 내리깐 채 말을 고르던 그녀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대에게 다시금 제안하기 위해 왔어요.”
이런, 속내를 숨기고 숨겨 빙빙 돌리고 꼬는 사교적인 대화가 아닌 직설적인 권유에 윤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이를 어쩐다. 무의식중에 이마를 쓸었다. 돌려서 거절을 표현할까, 아니면 직설적으로 대답할까. 망설이던 윤은 전자를 택했다.
“……일전에 대답을 드린 걸로 압니다.”
“숙녀의 자존심을 이렇게 짓밟으실 생각인가요?”
단호한 거절에 아름다운 얼굴은 노기로 물들었다. 살짝 일그러지며 적갈색 눈동자가 붉게 빛난다. 살짝 부채를 움켜쥔 애비가일의 목소리가 언짢게 높아졌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이스트민스트 공작이 탐나지 않는 건가요? 그대는 참으로 물욕이 없는 사람이군요. …아니면 분수를 모르거나.”
“공녀께서 이렇게 대할 만큼, 저는 대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윤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질녀쯤 되는 소녀가 자존심마저 내팽개친 채 매달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을 그저 검공의 후인,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라 알고 있지 않은가. 변경백이라하나 거대한 공가의 상속녀보단 못한 위치였다. 혼인을 택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공작의 지위에도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이은 거절에도 애비가일은 포기할 줄 몰랐다.
“이유는 없어요. …그저 그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제 영혼이 원했어요. 대답으로 충분한가요?”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가 마력을 담아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심령을 뒤흔드는 주술에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애비가일이 도룬 남작의 사인을 알고 있었던 이유, 그리고 사교계의 관례조차 깬 채 자신 있게 유혹해오던 그 태도, 이제껏 느끼던 께름칙한 감각들. 모두가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애비가일 역시 마녀가 맞았다. 사람의 심령을 조종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녀가.
“고작해야 남총의 자리예요. 나를 선택해요. 클레먼스 변경백.”
애비가일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윤이 뒷걸음질 쳤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조종당했을 강력한 주술이었으나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현혹되진 않았으나 이대로 거부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에 쏠려있다. 이대로 소녀의 손을 쳐낸다면 단순한 거절로 끝나지 않는다. 사교계의 거물인 만큼, 그 추락에 흥미로워하는 이들이 많으리라. 평판은 단숨에 곤두박질 칠 것이다. 보아하니 저 성격으로 적도 많이 만들고 다녔을 테니 그 결과란 뻔했다. 그렇다면 딸의 목숨 값을 갚겠다며 황제를 등질 정도였던 공작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윤은 좀 난감한 표정으로 테라스의 뒤편을 힐끔거렸다. 차라리 실족한 것처럼 뛰어내리는 게 나을까. 2층 높이였기 때문에 크게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네 오라비의 연인에게 무슨 짓인 게냐. 애비가일.”
테라스의 문에 기댄 채 팔짱을 낀 아스탄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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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웰님과 평량님께 감사드립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ㅠㅠ;;;
회사에 바쁜일이 있어 8월 8일까진 비정기적으로 오게 될 거 같습니다. 하지만 매일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