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전생보고서-70화 (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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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위협

“이런, 네 오라비의 연인에게 무슨 짓인 게냐. 애비가일.”

테라스의 문에 기댄 채 팔짱을 낀 아스탄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아스탄의 붉은 눈과 마주친 애비가일은 저도 모르게 숨이 멎는 듯했다. 불타는 듯 형형하면서도, 등줄기로 소름이 돋을 만큼 싸늘한 시선이었다.

“…연인이라고요?”

“그래.”

“거짓… 큽!”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애비가일의 주술이 깨졌다. 울컥, 하고 속에서 역류하는 핏덩어리를 삼켰다. 입을 틀어막고 숨을 고르는 소녀를 향해 아스탄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다.

“몸이 좋지 않은 듯 보이니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큰일을 겪지 않았느냐.”

“…어떻게.”

애비가일은 독살스러운 눈으로 아스탄을 노려보았다. 주술이 깨진 반동으로 말하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러나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 주술의 파훼와 간섭은 같은 마녀만이 할 수 있다. 초월자라 하더라도 그걸 무시하거나 견디는 정도였다. 설마. 애비가일은 추측을 확신으로 굳혔다. 자신의 오라비는 몸을 웅크린 채 남들이 보지 않는 사이 아주 많은 힘을 키웠다.

‘아버지에게 알려야 해!’

있는 힘을 쥐어짜내 몸을 꼿꼿하게 세웠으나 이내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꺾인 꽃처럼 힘없이 무너지는 소녀의 모습에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런.”

아스탄이 감흥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을 숙였다. 손을 가져다 대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애비가일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하얀 얼굴에선 핏기란 찾을 수 없었고 가늘게 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디스그렌 백작 부인. 시종을 부르는 게 낫지 않겠소?”

“그리하겠나이다.”

디스그렌 백작 부인은 두 사람을 난도질할 듯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거칠게 손짓했다. 빠르게, 그러나 경망스럽지 않게 다가온 시종들은 애비가일을 바르게 눕혔다.

연회에서 귀부인들이 쓰러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날씬한 허리를 위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는 데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졸라매는 탓에 호흡곤란으로 기절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스트민스트 공작도 놀라긴 하였으나 크게 걱정하진 않는 눈치였다.

“휴게실로 옮기도록.”

시종들에 의해 애비가일은 휴게실로 옮겨졌다. 디스그렌 백작 부인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누군가 쓰러져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음악은 흘렀고 사람들은 연회를 즐겼다. 정성껏 준비한 연회보다 치정사가 더 흥미로웠기에 모두 신경을 이쪽으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시선을 차단하듯 아스탄은 테라스의 문을 닫았다. 커튼까지 쳐버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가볍게 탄식하였으나 그 이상 어찌하지는 못하였다.

“…공녀는 괜찮겠지?”

“안괜찮을거다. 일부러 그리 만들었으니.”

아스탄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애비가일은 며칠 동안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힘을 쓴 탓에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왜 걱정되나? 별 일 없을 거고, 그녀가 며칠 푹 자고 나면 모든 게 끝나있을 터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묘하게 빈정거리는 어조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윤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졌으니까,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다정하군.”

“왜 그래? 갑자기 왜 이렇게 삐딱하게 구는 거야?”

“고백을 받으니 기분 좋던가.”

뜬금없는 말에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아스탄은 여유로운 척했지만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아스탄이 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애비가일의 고백을 단칼에 자르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통쾌하기까지 하였으나, 그 후 주술을 걸어오는데도 머뭇거리는 모습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조종되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리로 인식함과 별개의 문제다.

애비가일은 아름다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였다. 남자 간의 사랑이 배척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벨라르에서 역시 남녀 간의 결합이 일반적이다. 후손은 어찌되었든 중요한 문제 아닌가. 기혼이고 미혼이고 할 것 없이 난삽하게 놀아나는 이들도 혼인을 하고 첫 후계자를 낳을 때까지는 자중하는 것이 사교계의 관례일 정도다. 윤이 사는 세상도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윤은 사람의 체온에 약했다. 그런 주제에 결벽적인 성격이라서 늙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고 다가오는 이들을 밀어내고 있지만, 반동을 억누를 수 없어 사람을 그리워한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애비가일에게도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추측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질투에 사로잡힌 남자는 추하단 생각에 자조하는 것도 잠시,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어떻게해서든 확신의 대답을 받고 싶었다.

“이제 와서 애비가일에게 간다하더라도 못 놔준단 소리다.”

“무슨 소리야?”

“그녀에게 설마 마음이 있었던 거냐?”

“…없어! 절대 없어!”

아스탄은 비식 웃음이 솟아올랐으나 그것을 억누른 채 몰아붙였다.

“몇번이고 추파를 던지는데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나. 내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어떡할 뻔 했지?”

“……그야.”

윤이 우물쭈물했다. 아스탄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지 않았거나, 애비가일이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좀 난감할뻔 했다. 어떻게서든 벗어날을 테지만 지금보다 매끄럽게 빠져나가진 못했으리라. 추락이라던가, 실족 같은 방법이었을 테니.

윤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나, 나도 나름대로 방법이 있었어! 너야말로 은발의 백작 영애와 사이 좋더만.”

“그게 누구, 아….”

“그래! 웃어주고 친근하게 잘대해주더만.”

아스탄이 미간을 좁힌 채 질문을 되돌렸다. 그녀가 누구냐는 물음도 잠시. 문득, 끈덕지게 달라붙던 멜번 백작과 그 여식이 떠올랐다. 귀찮아서 대강 상대한 후 떨치려 하였는데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아스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질투한 건가?”

“질투? 내가?”

말도 안돼. 하고 윤이 코웃음 쳤다. 단호한 부정에도 아스탄은 그저 웃기만 했다.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에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물론 보기 나쁜 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아스탄은 윤이 태어나서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잘생기고 아름다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짜증이 난 거지?”

아스탄이 고개를 숙여 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오싹하리만치 낮아졌다.

“그냥 신경 쓰인 거야!”

윤은 인정하지 않고 오기를 부렸다. 아무 생각 없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술을 홀짝이며 딴청을 피웠다.

“그냥일 리가 없지 않나.”

아스탄은 그 안쪽의 연한 살을 쓸었다.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쾌락에 노출되지 않은 청결한 등이 파드득 떨린다. 아스탄이 목안으로 웃음을 삼켰다.

“인정해. 너도 내게 마음이 있는 거다.”

“…마음이라니.”

윤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부정할 수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웬 아름다운 소녀와 아스탄이 무척 잘 어울린단 생각을 하자마자 기분이 나빠졌었다. 명백한 질투 아닌가. 눈을 들어 아스탄을 바라보았다. 무척 기분 좋은 듯 반짝반짝하게 웃고 있다. 윤의 눈초리가 매서워져도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되레 짙어졌다.

“다른 여자와 내가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지?”

“……그거야.”

“세력을 불리기 위한 정략혼으로 여인을 취한다면?”

“죽을래?”

진심은 엉겁결에 튀어나왔다. 아스탄은 제 이마를 윤의 이마에 맞대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적자색 눈동자는 황홀하리만치 다정한 빛깔로 물들어있었다.

“그만큼 네가 날 신경 쓴다는 거다. 이곳에 있는 무의미한 자들과 내가 다르단 뜻이야. 내가 친구가 되자고 한 것도 너였고,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한 것도 너지.”

마치 주술을 걸어오는 것처럼 속삭여오는 목소리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었다. 세뇌라도 할 것처럼 반복해오는 말에 윤은 혼란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은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흔들렸다.

아스탄이 천천히 손목을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손깍지를 껴왔다.

“내가 다른 여인과 만나지 않길 바라나?”

“…….”

“그렇다면 붙잡아서 움켜쥐어. 네 것으로 만들어.”

아스탄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신 너도 나의 것이 되는 거다. 선택권은 없어.”

천천히 입을 맞춰왔다. 여인의 입술도 이보다 보드랍고 말캉하지 못할 것 같다. 천천히 노크하듯 부비고 허락을 구한다. 입을 벌렸다. 습한 살덩이가 치아를 훑고 입천장을 범했다. 도망치는 혀를 깊게 빨아들이고 엮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산소를 갈구하는 것마저 못마땅하다는 듯 다급하게 입술을 붙여왔다.

허락을 구하는 몸짓은 신사답게 정중했으나 욕망에 달뜬 붉은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알몸으로 그 앞에 선 것 같다. 속내마저 샅샅이 파헤쳐지는 기분에 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흐읏.”

윤은 깍지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격렬한 운동을 했을 때처럼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며 톡톡 튀었다. 타액이 섞이고, 까끌거리는 살덩이가 치아를 스쳤다. 마치 첫키스를 하는 소년처럼 정신없이 매달렸다.

손깍지를 풀고 목덜미와 짙은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파묻어 강하게 끌어당긴다. 윤 역시 손을 뻗어 아스탄의 목을 끌어안았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하게 몸이 맞붙었다. 열기가 고여 묵직해진 중심을 비비듯 밀착했다. 어설픈 입맞춤에도 흥분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니 설익은 몸짓이 더욱 기꺼웠다.

“하아… 아…….”

윤이 신음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일까. 머리가 핑 돌았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다. 타액에 젖고 붉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남자를 보았다. 테라스 너머 사람들을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모두 의미 없어질 사람들, 그중 유일하게 의미 있는 존재. 윤은 다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자.”

“…이번엔 도망쳐도 소용없어.”

============================ 작품 후기 ============================

평량님, 튜란토트님,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71화는 통째로 노블입니다. ^0^ 아마 8월 9일쯤에 올라올 듯 싶습니다.

그리고 노블이 끝난 이후의 내용은 8월 10일부터 연재 재개할게요 8ㅅ8

선작해두시기 편하게 하기 위해 노블레스를 미리 파두도록 하겠습니다. 노블 내용은 이전에 도룬 남작의 욕실에서 있었던 노골적인 단어를 추가한 부분이예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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