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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74화 (7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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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역천

황제는 홀로 빈방에 앉아서 홀로 체스를 두었다. 어두운 방, 붉은 눈이 야생동물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미려한 손이 흰색 룩을 쓰러트렸다.

‘윤 하이어드 클레먼스.’

황제가 이번엔 검은 룩을 쓰러트렸다.

검공은 백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전혀 늙지 않은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자신의 편이 아니라 적이 되었다. 황제는 적지 않은 분노를 느꼈다. 검공은 제 사람이 되어야 옳았다.

‘아스타시온.’

황제는 이를 갈았다.

“내 것이란 말이다!”

동시에 자신의 아들, 아스탄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검공의 연인이 그여서는 아니 되었다. 현제 레나디온의 모습을 꼭 닮아서는 아니 되었다.

자신의 아들이 그 누구보다 증오스럽다. 물론 살의를 느끼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크라이슬러의 피를 이은 모든 이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다. 치밀어 오르는 광증에 황제는 손을 들어 눈가를 누르며 길게 심호흡했다.

“크읏! …으아악!”

광증에 지배당한 황제가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을 집어던졌다. 대리석으로 만든 체스판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무너졌다, 보석을 깎아 만든 체스말 또한 바닥으로 흩어졌다.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야!”

미친 사람처럼 킬킬 웃다가 돌연 표정을 굳히고 섬뜩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다른 이들에게 그리 하였듯이 아스탄의 목숨을 빼앗고, 검공을 죽이면 이 광증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인가.

“……그래, 아스타시온이 죽고 나면, 검공의 차례로군.”

검공을 향한 살의가 들끓는 동시에 강한 소유욕을 느꼈다.

영혼이 그를 끌어당겼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를 황제는 고민하지 않았다.

“내 것이었는데….”

황제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다렸단 말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치 온몸이 불덩어리가 된 것 마냥 뜨겁고 답답해서 황제는 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러나 응어리진 무언가는 풀릴 줄 몰랐다.

“폐하, 황태자 아스타시온이 왔나이다.”

시종이 고하는 소리에 황제는 냉정을 되찾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몰아치는 광기 뒤엔 허무함만이 남아있다. 황제의 손짓에 시종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빠르게 방을 정리했다.

의자에 앉은 황제는 어느새 냉정하고 오만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란디아의 지배자이시며, 렉스 그랑드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어서오라, 나의 아들아.”

아스타시온은 경계의 기색을 숨긴 채 평연한 얼굴로 자신의 아비를 바라보았다. 그란디아의 지배자, 팔라티온 2세는 오만한 자세로 제 아들을 반겼다.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 눈빛만큼은 형형했으나 점점 수척해져가는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황제의 허락을 받은 아스탄은 곧장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스탄이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질문했다.

“제위에 오르고 싶으냐.”

“감히 훌륭한 황제이신 폐하를 두고 어찌 그 자리를 탐하겠나이까.”

아스탄은 당황하지 않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황제가 킬킬 웃었다.

“그래, 네가 이 자리를 물려받을 시간이 가까워져오고 있지. 내 아버지를 죽이고 이 자리에 올랐을 때 짐은 스물 하나였다.”

황제의 말에 아스탄은 침묵을 고수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황제는 이어 말했다.

“너는 괜찮은 황제가 될 지도 모르지. 시황제가 일통하지 못한 대륙을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자를 그리 높게 쳐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많았지. 겨우 황자나, 황태자가 제위에 오른 후 공작 정도의 지위에 만족할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현재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기분은 어떤가?”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하는 겁니까?”

아스탄이 이를 드러내었다. 황제가 킬킬 웃었다.

이미 죽은 형, 알렉시온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년이었다. 동복 형제인 아스탄을 비롯해 제 적이 될 수 있는 이복 동생들마저도 상냥하고 차별없이 대해주었다.

물론 황제의 자리가 욕심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허나 제 친 형을 죽이고 빼앗을 정도는 아니다. 알렉시온이 죽고난 후, 황제가 제게 노스트라드 공작의 상징, 트리기토스를 던지며 “네가 지금부터 황태자다.”라고 말했을 때부터 아스탄은 황제를 증오하게 되었다. 황제에게 자식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황룡의 숲에는 언제 갈 생각이지?”

“소자, 폐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짐이 명하면 가겠다고?”

“예.”

“내일이라도?”

황제가 자신의 손으로 턱을 괸 채 무심히 물었다. 말라붙은 피와도 같은 적색 눈동자가 아스탄을 응시했다. 자신의 혈육에 대한 애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준비가 끝나는 대로 떠나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아스탄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을 따라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황제의 방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누구도 그의 위에 있어선 아니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볼 수 있었다. 마치 작은 인형들이 살아있는 듯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기에 인간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인가.

“물러가라.”

“예.”

아스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를 취하는 그를 향해 황제가 손짓했다.

“잠깐, 아스타시온. 너는 검공의 비밀을 알고 있느냐?”

“소자가 미흡하여 하문하신 뜻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검공은 돌연 모습을 감추었지. 왜 그리하였을까?”

황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안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스탄은 속으로 답했다. 우리의 조상이, 빌어먹을 현제 레나디온이 그를 죽인 게 아닙니까. 쓸모없어진 사냥개를 삶아먹듯, 떠나겠다는 제 대부를 죽였지요.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아니하였다.

“어쩌면― 현제 레나디온이 제 대부를 배신하였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였느냐?”

불에 덴 것처럼 아스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크게 떠졌다.

“……불초한 소자가 어찌 그런 무도한 생각을 하겠나이까.”

“광증이 대부를 죽인, 천륜을 범한 죄라면?”

황제는 웃었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물러가라. 아스타시온만 남도록 하라.”

황제가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방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방의 왼편, 서가에 셋째 줄에 있던 책을 뽑았다. 그리고 다섯 번째 줄 빈칸에 꽂아 넣자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단순히 책을 뽑는 걸로 열리지 않는 비밀 통로였다.

“따라오라.”

황제는 방안에 장식된 등잔을 들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나?”

“그저 추측할 뿐입니다.”

“네 형을 닮지 않아 멍청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아스탄은 이를 악 물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복도는 아주 음산했다. 촛불도 그 어둠을 물리치지 못했다. 본디 길을 가며 불을 밝히는 건 시종의 일이었다. 아스탄이 대신 등잔을 들길 청하자 황제는 “너를 믿고 어찌 이 불을 맡긴단 말이냐.”하며 빈정거렸다.

아주 오랜 시간 쌓인 먼지 냄새는 습하고 지독했다. 그 악취를 맡지 못하는 사람처럼 황제는 흥겹게 걸었다. 아스탄은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황제의 목을 꺾어버리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리라. 음습한 충동을 떨쳐내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똑같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되뇌었다.

복도의 끝, 금으로 테두리를 두른 문이 드러났다. 손잡이가 없는 문은 화려한 주술 문자로 가득했다. 팔라티온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문에 묻혔다. 몇 번 방문자를 맞이한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이곳에 그란디아의 역사가 잠들어있지.”

황제는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탄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천장엔 아벨라르 대륙과 차 대륙의 지도가 그러져있다. 아무렇게나 쌓인 서책이 발에 채였으며, 비로드로 만든 의자 위엔 아뮬렛이 있었다. 대마녀 안즈마네와 매직 마스터 율리히가 함께 만든 공간이동의 목걸이였다. 그 외에도 세상을 뒤엎어놓을 마도구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습격에 대비한 지형지물을 살핀 뒤 사람의 인기척을 위해 기운을 퍼뜨렸다. 수신 호위들 외엔 누군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품안에 있던 검을 쥔 손에서 힘을 빼었다.

벽마다 커튼이 있었다. 황제는 아무렇게나 커튼을 걷어내었다. 밑그림만 그린 초상화도 있었으며, 이미 완성되어서 유리로 보존한 그림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초상화는 검은 머리의 청년이 금발의 아이를 끌어안고 웃고 있었다. 윤이었다. 싱그러운 미소가 무척 행복해보였다.

“이 자가 누군 지 알고 있나?”

“클레먼스 변경백이 아닙니까?”

아스탄은 모르는 척 말했다.

“틀렸다. 시황제의 친우, 현제의 대부, 바로 검공이다.”

“……클레먼스 변경백과 닮았군요.”

아스탄은 표정을 감춘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황제의 내심을 살피듯 초상화를 샅샅이 살폈다. 현제 레나디온이 검공의 기록을 모두 파기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곳에 숨겨두었을 줄이야. 백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온전하게 보관된 윤의 초상을 본 순간 새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의외로 로맨티스트였나. 아스탄은 냉소했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닮은 정도가 아니지. 그 본인이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걸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검공은 백년 전의 사람입니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스탄은 차갑게 황제를 노려보았다. 물론 검공이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검공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황가의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윤이 검공이라 확신하는 건 달랐다. 이곳에 그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지금 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스탄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황제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유쾌한 어조로 침묵을 깼다.

“아, 한 가지 네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이곳은 대대로 황제들을 위한 방.”

“……!”

“황룡의 인장을 받지 못한 이가 들어오면 보이지 않는 독에 중독된다 하더구나.”

황제가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온몸의 마나가 꼬이는 느낌과 함께 아스탄의 눈앞이 흐려졌다.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했다. 암전이었다.

============================ 작품 후기 ============================

아름이04님, simple6님, hjfs님, 하라타츠님, 윤서연I칼리냥I님, 류웰님, 다그네스님, 천검소지로님, yelloworange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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