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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79화 (7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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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수위 삭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새벽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각이었다. 아스탄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선잠에 들었던 윤은 길게 하품을 했다.

허리를 끌어안은 아스탄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단단한 갑옷을 내려놓은 얼굴은 제 나이 대 청년으로 보였다. 조금은 앳되게 보이는 얼굴이 매끄럽다. 물론 황태자이니 좋은 것만 입고, 먹고, 최상의 관리를 받을 테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오늘따라 광이 돌았다. 게다가 만족스러운 표정까지. 윤은 심술이 돋아서 뺨을 쭈욱 잡아당기려다가 그만두었다.

-끼잉

어느새 제 침상은 버려두고 또다시 침대위로 올라온 목도리가 심술궂게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든다. 아스탄을 보지 말라는 듯 얼굴 사이로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목도리. 얼굴 사이로 돌아다니면 안 돼.”

사람 말을 다 알아들으면서 무슨 말이냐는 듯 갸웃하는 모양새가 가증스럽고 귀여웠다.

“이 녀석!”

윤은 새끼 여우를 붙잡아 코를 마구 비볐다. 캥캥, 기분 좋게 울어댄다.

“오랜만에 목욕이나 할까?”

아스탄이 뒷정리를 해준 듯 몸은 깨끗하게 닦여있었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삭신이 쑤시는 것 같다. 할아버지 같은 생각을 한 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끼 여우는 신나서 쫄랑쫄랑 꼬리를 흔들어댔다. 허리에 감은 손을 풀자마자 아스탄이 눈을 번쩍 뜬다.

“아스, 좀 더 자둬.”

“충분해.”

아스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명료한 눈가엔 졸음의 기색을 찾을 수 없다. 시트가 내려가며 잘 단련된 나신이 드러났다.

운동부 소년이었던 만큼 윤은 남의 벗은 몸을 많이 보았다. 호구와 보호 장비로 몸을 겹겹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무더운 여름날엔 그야말로 지옥 불에 빠진 것처럼 괴로워서 훈련이 끝나면 속옷만 남기고 훌렁훌렁 벗어던지기 일쑤였다. 운동 소년들의 몸도 제법 근육질이지만, 아스탄에게 댈 건 아니었다. 군살 없이 잘 단련된 몸은 직선과 곡선의 훌륭한 조화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스탄은 침상 옆 협탁에 놓인 물병을 들어 잔에 물을 따랐다. 한 모금을 마신 후 잔을 채워 윤에게 내밀었다.

“독은 없어.”

“……그런 거 네 몸으로 실험하지 마.”

윤은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을 축인 후 손바닥에 물을 따라 새끼 여우에게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새끼 여우의 작은 혀가 날름날름 물을 핥았다. 기분 좋은 듯 눈을 반달모양으로 접어서 웃는다.

아스탄은 물병 채로 마셨다. 남자다운 울대가 물을 마실 때마다 우아하게 율동했다.

“어딜 가는 거지?”

“씻으러…….”

“같이 가도록 하지.”

“나 혼자 갈 거야! 따라오지 마.”

같이 목욕한단 핑계로 2차전을 벌일 게 분명했다. 윤은 속지 않았다. 새끼 여우를 옆에 낀 채 재빨리 도망쳤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뒤따라왔다.

윤이 씻고 나왔을 때, 아스탄은 낯선 얼굴의 보좌관에게 무어라 보고를 받고 있었다.

“샤리크 백작부인이 이상 증세를 보인다고 합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어 앉은 아스탄이 손을 들어서 이마를 짚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라.”

“……나는 속았다. 라고 말하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울부짖는 등,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고 합니다.”

보좌관이 잔뜩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언제부터인가?”

“황제 폐하의 방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본 뒤 부터였다고 합니다.”

“동태를 계속 지켜보도록.”

아스탄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손가락이 만든 어두운 음영 너머로 드러나는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그가 윤을 발견했다.

“몸을 제대로 닦도록 해. 네가 초월자라해도 아직은 겨울이다.”

윤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늘색 튜닉의 어깨 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린 물방울은 옷감을 어두운 색으로 물들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스탄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제 몸은 챙기지 않으면서 새끼 여우는 수건으로 둘둘 감아 옆구리에 끼었다. 수건 사이로 여우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부르르 머리를 털어낸다.

“괜찮아.”

한숨도 잠시 꼬고 앉아있던 다리를 푼 아스탄이 제 앞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오도록 해. 말려줄 터이니.”

“그럼 사양 않을게!”

히죽 웃은 윤은 냉큼 그의 앞으로 가서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았다. 새끼 여우의 털은 윤이 말렸고, 윤의 머리칼은 아스탄이 말렸다.

아스탄은 젖은 수건으로 가볍게 물기를 털어냈다. 그 후 세심한 손길로 머리칼의 물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능숙한 아스탄과 달리, 윤이 목도리의 털을 말리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결을 따라서 물기를 닦아 내는 게 아니라 엉망으로 문질렀다. 윤기 흐르던 은빛 털이 사자의 갈기처럼 사방팔방으로 부풀어 올랐다.

본인이 외양에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비해 윤의 외양은 제법 멀끔했다. 타고난 부분이 클 것이다. 문득 그의 부모가 궁금해졌다. 지나가는 말로 한 번이라도 언급할 법 한데, 단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는 걸 듣지 못했다.

“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지?”

“우리 부모님?”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끼 여우의 털을 말리던 손이 멈추고,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하하, 짧은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좋은 분들이셨어.”

“과거형이군.”

“돌아가셨으니까.”

아스탄은 위로하듯 천천히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형이 죽었을 때, 어머니가 유폐 당했을 때를 생각해보았다. 그리 슬프진 않았다. 허나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변함을 분명히 느꼈다.

“괜찮아. 오십년도 지난 일인걸. 슬픔은 희미해.”

눈앞의 청년은 무척 강했지만 그 표현은 육체적인 무력에 한정되었다. 속마음은 여렸다.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마음만큼은 말랑말랑한 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황제의 말에도 흔들리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진짜 괜찮다니까.”

한때 좌절해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자신이 이렇게 살 길 원치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윤은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소매로 가려진 안쪽, 칼로 그은 듯 미세한 흉터가 보인다. 새끼 여우를 들어 올려서 위로받듯 그 털에 코를 묻었다.

“그나저나 황룡의 숲으로는 언제 떠나.”

“곧 떠날 생각이다. 일행은 소규모로 짜서,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예정이야.”

“차라리 둘만 움직이는 건 어때?”

새끼 여우가 갑갑함을 느낀 듯 윤의 손을 앙 물고선 몸을 빼내었다. 부르르 털어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뒤, 깡충깡충 신나게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모두가 귀엽다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귀여운 모습은 사라졌다. 동그랗게 굴러다니는 털뭉치만이 반대편에 존재했다. 목도리는 참담함에 울음을 터뜨렸다.

“…둘이서?”

“응, 앤지의 목걸이를 이용하면 시간 단축이 가능할거니까. 용의 숲은 좌표가 입력되어있을 거 같지 않고… 근처 도시로 가더라도 시간이 많이 줄어들 거야. 목걸이가 만능은 아니거든 사람이 많고, 거리가 길수록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돼. 당연히 최대한 적은 수로 움직이는 게 낫지.”

윤의 설명에 아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라. 묘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윤은 보지 못했다.

“좋다. 그러면 이틀 뒤, 우리만 떠나는 걸로 정하지.”

“…아! 그전에 가야할 곳이 있어.”

잊고 있던 빚이 떠올랐다. 윤이 제 건망증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도의 북쪽 지구. 봄이 가까워지는 듯 날씨는 제법 풀려 있었다. 때 이른 꽃들이 하얗게 망울을 피워 올렸다. 두 사람은 헌터가 머물고 있는 안가로 향했다. 아스탄은 이번에도 머리를 남색으로 물들였다. 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너른 광장엔 낯선 이들이 춤을 추며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집시라고도 불리는 유랑민족, 벨라였다. 짙은 머리색에 올리브빛 피부가 특징적인 그들은 자유를 사랑하며 얽매이는 걸 싫어해서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무지하던 시절에는 전염병을 옮긴다며 배척받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그들이 몰고 오는 봄의 소식을 기꺼워했다.

박자에 맞춰 나무 악기를 연주하고 신나게 춤을 추는 벨라족의 아름다운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나게 춤을 추며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런 뒤 점을 보거나 액세서리를 팔아서 수입을 올린다.

윤이 그들을 가리켰다.

“아스, 저쪽 구경하고 가지 않을래?”

“헌터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 늦게 가도 괜찮아.”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아이처럼 신난 걸음으로 집시들을 향해 걸었다. 아스탄은 피식 웃으며 윤의 뒤를 따랐다. 안가에 머물고 있는 헌터는 어디 도망갈 수도 없는 몸이다. 달아나는 즉시 제국 전역에 수배령이 내리고, 현상금 사냥꾼에게 수배령이 도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슬슬 헌터를 써먹을 때도 되었지. 아스탄은 머릿속으로 헌터를 써먹을 계책을 떠올렸다.

“자자, 구경하슈! 액세서리가 싸다! 싸!”

“일로 오랑게! 쩌그 저짝보다 나가 더 싸게 해주께!”

대륙을 방랑하느라 근본 없이 섞여버린 사투리로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해대었다. 아스탄은 조잡하기 그지없는 액세서리를 감흥 없는 눈으로 지나쳤다.

“어, 저쪽은 뭐야?”

윤의 시선이 검은 천막을 드리운 장소로 향했다. 어딘가 께름칙하면서도 은밀한 분위기를 풍겨왔다. 무엇인지 알아본 아스탄은 곧장 대꾸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다.

“점성술사들인 것 같군.”

벨라족은 점성술(占星術)로도 이름이 높았다. 천기를 내다보고 길일을 점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대륙이 혼란스럽던 시절 그들을 불길하다 여긴 탓에 집시들은 마녀와 함께 무수한 탄압을 받아야했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줄지어 놓였다. 벽을 등지고 앉은 점성술사들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손님을 맞이했다. 주술 도구 또한 다양했다. 사람의 얼굴만 한 수정 구슬을 가지고 점을 보기도 했고, 밀알을 던져서 그 모양을 해석하는 이, 방울을 흔들어 그 소리로 점치는 이 등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사랑점을 치러 온 소녀들은 새침한 얼굴로 윤과 아스탄을 돌아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점성술을 미신이라 치부하는 이들이 많았을 뿐더러, 그 외양이 눈에 띄게 수려했기 때문이다.

“나도 점이나 한 번 볼까?”

“마음대로 해.”

사람들을 헤치고 윤을 따라 돌아다니던 아스탄은 문득 뒤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점성술사 중 유일하게 손님이 없는 노파가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잘생긴 청년. 점이라도 보고 가지 않겠수? 이 늙은이 하루 종일 공을 쳤더니 배고파서 죽을 노릇이야.”

검은 두건을 푹 눌러쓴 노인은 아주 마르고 쪼글쪼글한 손등을 가지고 있었다. 으레 마녀 같은 점쟁이라 상상한 모습을 그대로 현실에 끌어다놓은 듯했다.

윤이 아스탄의 옷을 잡아끌었다.

“점이라도 한 번 볼까?”

“미신은 믿지 않는다.”

아스탄이 단호히 대꾸했다.

“믿지 않더라도 그냥 개시라도 해줘. 할머니는 네가 마음에 든 것 같으니까.”

윤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아스탄은 노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노파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수정 구슬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비로드로 만든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카드를 꺼냈다. 노파는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은근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 보통은 구슬로 점을 치지만, 특별히 댁에게만 이걸로 점을 쳐주기로 하겠다우.”

“고맙군.”

“자, 무엇이 궁금하오? 사랑점? 재물운? 무엇이든지 말해 봐요.”

“점을 치면서 그런 걸 묻나? 내가 가장 궁금한 걸 맞추고 대답해보도록 해.”

“그래, 사랑점으로 하지요.”

노파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칠십 쯤 되어 보이는 노인의 흰자위는 아이처럼 맑고 투명했다. 작은 몸집을 웅크리고, 형편없이 쪼글쪼글 마른 집시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하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순간 목덜미가 선뜩했다.

“카드는 총 43장.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점쳐보도록 하지요. 마음에 드는 걸 두 개씩 고르면 됩니다. 일단 이 중에서 두 장을 고르십시오.”

노파의 말투가 어느 순간부터 귀족이 쓰는 것처럼 우아하게 변했다.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카드를 섞은 뒤 테이블 위에 열 장을 내려놓았다. 아스탄이 거침없이 두 개를 고르자, 그것을 십자모양으로 겹쳐서 빼놓았다.

두 번째는 현재였다. 노파가 섞어 놓은 열 장의 카드 중 다시 두 장을 골라야했다. 이번에도 아스탄은 망설임 없이 카드를 선택했다.

“마지막은 미래. 단 한 장입니다. 고르시지요.”

노파가 꺼내놓은 카드는 단 두장이었다. 아스탄은 저도 모르게 신중한 표정으로 오른쪽 카드를 골랐다.

“자, 결과를 볼까요?”

“……그리 궁금하지는 않다만.”

노파는 이빨이 빠져 쪼글쪼글한 입술로 홍홍 웃는다. 윤은 아스탄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관찰했다.

“과거는… ”

카드를 뒤집자 신녀와 거꾸로 된 탑이 나왔다.

“이전에 당신 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을 사랑했나요? 탑은 오랜 인고의 시간을 기다려야 완성할 수 있지요. 똑바로 선다면 인내심과 사랑의 성취를 뜻하지만… 그렇지가 못했군요. 이런, 공든 탑이 무너졌군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이 제법 마음 아팠겠습니다. 그려.”

아스탄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라도 사랑한단 말인가. 사기꾼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했지만, 윤이 재미있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현재를 보도록 하지요. 당신의 상태를 알려주는 동시에,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핀과 저울이라…. 그리핀은 아주 용맹한 맹수, 신녀 칼리아가 목숨을 걸고 길들였단 전설이 있지요. 그만큼 인내와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단 뜻입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쓰기도 하지요. 이전의 사람과 갖은 노력 끝에 재회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겠군요. 저울은 정의의 여신, 하니스트의 상징. 심판, 각성, 결단… 모두 당신의 결정을 뜻하고 있지요. 당신의 과감한 선택이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전혀 들어맞지 않는 점괘에 아스탄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역시 흥미가 식은 표정이었다.

“자, 마지막으로 갈까요.”

미래는 단 하나의 카드였다. 카드를 뒤집자 수레바퀴가 나왔다. 그 위를 정령들이 뛰놀고 있었다.

“호오.”

노파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건 잘 나오지 않는 것인데… 당신에게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겠군요. 새로운 출발일지, 아니면 바퀴가 망가진 채 나아가지 못할지. 모든 것은 인과입니다. 과거의 선택이 지금을 만들었고, 미래의 선택이 앞날을 바꾸겠지요. 허나 모든 것은 돌고 도는 수레바퀴. 결코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끝인가?”

“예.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노파의 마지막 말은 경고처럼 뇌리에 찝찝하게 남았다. 아스탄은 미간을 찌푸렸다. 윤은 바닥에 나뭇가지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복채다.”

아스탄은 품에 있던 주머니에서 금화를 아무렇게나 꺼내어 노파에게 주었다. 번쩍이는 동전에 노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금화를 단 하나만 꺼내서 품에 넣은 뒤 모두 아스탄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귀하신 분이여.”

“아니, 모두 가지도록 해.”

아스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또한 길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이제 헌터에게 갈까?”

“그렇게 하지.”

윤은 더 이상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엉터리 점을 한 번 보고나니 흥미가 싹 가신 모양이었다.

“현명한 자여. 부디 당신의 길에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탁한 음성이었다.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모래 섞인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아스탄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 노파의 흔적은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양, 모든 점성술사들이 북적거리며 손님을 맞이하였다.

============================ 작품 후기 ============================

아메티스토스님, 야니3694님, 뿌까9님께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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