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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마을로 돌아오는 사이, 적막한 요정 족 마을은 어둠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윤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율리히까지 저렇게 말한 이상, 자신이 이곳에 머물면 죽는다는 건 확실했다. 돌아가도 살 수 있을까? 이미 몸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이전엔 당장 숨이 끊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기껍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부닥치니 마음이 달라졌다. 미련이 남았다.
어수선한 마음을 천천히 되짚었다. 부모님도 친우도 아닌, 바로 아스탄 때문이다. 처음으로 방황하는 자신을 붙잡으려던 사람, 그 정체를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고백해오던 이였다.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정면으로 맞부딪혀 오는 사람은 아스탄이 처음이었다. 오랜 고독에 지쳐있던 윤에게 아스탄의 마음을 거절한단 선택지는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가 옆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현실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고 온다고 해도 시간의 차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오십년의 시간이 현실에서 삼일이었고, 현실에서 삼년에 100년이 흘렀다. 만일 돌아왔는데 아스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가정만으로도 심장이 조이는 듯 아팠다.
“아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심장이 있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윤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도 켜지 않은 율리히의 방은 어두컴컴했다. 달빛이 반짝이는 바깥보다 안이 더 어두울 정도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돌아 앉은 남자의 너른 등이 보인다. 상처 입은 맹수가 몸을 웅크린 듯 보였다. 달빛에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윤은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술병을 꺼낼 생각도 않았던 듯 가방은 한켠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줄곧 그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선을 좇아가자 자그마한 액자가 보였다. 그들이 함께 몰려다니던 시절, 거리의 화가에게 받은 네 명의 초상화다. 율리히가 장로가 되기 위해 떠날 때,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아스탄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한 점 그늘 없이 맑게 웃는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처럼 지치고 쇠약해진 모습이 아니었다. 그를 천천히 망가트린 건 시간이고, 결정적인 계기는 전생의 자신이다.
“네 친우와 이야기는 잘 끝난 건가.”
“응. 아스,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거지? 고마워.”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곁에 있어봤자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는 데 방해만 되었겠지.”
아스탄은 자조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인가? 현생의 자신은 몰라도 레나디온에게 율리히는 아는 사람이다. 그것도 대부나 다름없는 이였다.
사실 그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율리히가 자신의 정체를 윤에게 말할까 두려웠다. 자신이 레나디온임을 알게 되면 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차가운 물을 심장에 퍼부은 것처럼 써늘해졌다. 증오를 담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스탄은 침잠한 눈빛으로 그는 윤을 응시했다. 어둠에 잠긴 방 덕분에 윤은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덕분에 좋게 잘 끝냈어.”
“당연한 일이다. 그간의 앙금은 풀린 건가?”
“응.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도 있었거든.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몰랐을 거야.”
친우의 비극적인 상황을 되새김질하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자신만 불행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율리히가 자신을 내친다고 해서 뒤돌아서는 게 아니었다. 이상한 걸 눈치 채고 어떻게 서든 그를 도와야했다. 과거를 후회해봤자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자꾸만 곱씹게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수확도 있었어.”
황가의 저주에 대한 실마리를 붙잡았다. 만약, 황가의 저주라고 생각한 것이 저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마치 요정 족 장로의 계승처럼, 레나드가 자신의 기억을 덧씌우는 주술을 만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레나드는 타고난 마녀였으며, 율리히에게 가르침을 받은 유일한 마법사다.
‘이건 확실해지면 아스에게 말하자.’
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율리히가 무언가 알려준 게 있는 건가?”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황룡에게 빠르게 가는 길을 알려준 것뿐이야.”
아스탄의 발치에 새끼 여우가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윤이 손을 뻗어서 새끼 여우를 안아 올렸다.
“목도리는 벌써 잠들었네.”
“영물이라 해도 어린 짐승. 하루에 두 번이나 게이트를 통과했으니 피곤하겠지.”
맞은 편, 침대에 걸터앉은 윤이 여우를 쓰다듬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손길에도 여우는 잠에서 깨지 않은 채, 가만히 몸을 맡겼다.
아스탄은 윤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이 지나면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샅샅이 윤을 기억 속에 새겼다. 언제나 생기로 빛나던 뺨이 수척했으며, 어딘가 수심에 잠긴 시선은 울적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병색이 완연했다.
자신이 없는 곳, 푸른 달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놓아주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마음이 서걱거렸다.
각자 비밀을 품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윤이었다. 애써 쾌활한 척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저녁을 못먹었네. 율리히와 얘기하느라 고기가 다 타버려서 가져오진 못했어. 아스 많이 배고프지. 지금이라도 녀석에게 부탁해서 열매라도 가져올까?”
“아니 괜찮다.”
“그래도 배고플 텐데. 짐 속에 육포가 들어있어. 그거라도 먹는 건 어때?”
아스탄은 고개를 저었다. 거의 만 하루를 굶었으나 허기를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시간차 공격을 하듯, 연달아 얻어맞은 진실에 입맛이 달아난 지 오래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야기였다. 환생이라니. 허무맹랑한 거짓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현명한 자여…. 부디 당신의 길에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불현듯 벨라족 점쟁이가 늘어놓았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과거의 자신은 신분이 높은 이를 사랑했으나,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재회해서 기적적으로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던가.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명한 자. 현제(賢帝) 레나디온의 황칭이 아닌가.
윤을 사랑하게 된 이유가 온전히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면, 레나디온의 잔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차가운 심장을 움켜쥐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졌다. 아니다. 이 마음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다. 윤이 검공임을 몰랐을 때부터 시작된 감정이다.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무례한 청년이 신기했고, 마음에 들었다. 윤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이였다. 흥미로웠다. 그래서 곁을 내주었다. 결코 과거의 흔적이 만들어낸 필연이 아니다. 아스탄은 스스로를 세뇌하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스. 내일 황룡의 근거지로 출발하기로 했어. 율리히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괜찮을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 그 역시 위대한 마법사이니, 동행해서 나쁠 일은 없겠지.”
아스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폭탄을 끌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서 거절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몰랐다.
“율리히가 네 몸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그가 아니었다면 널 치료하지 못했을 거다.”
“모, 몸살이래. 피로가 누적되어서.”
아스탄이 짐짓 모르는 척 떠보는 말에 윤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올곧게 응시해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아무렇지않은 척 했다. 어깨를 으쓱이는 윤을 보며 아스탄이 대꾸했다.
“초월자의 지위를 반납해야겠군.”
“그러게. 나도 이제 많이 늙었나봐.”
윤이 너스레를 떨며 웃었지만, 아스탄은 웃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은 건가?”
“멀쩡해. 역시 율리히가 대마법사이긴 한 게 맞나봐. 걱정해준거야? 고마워.”
침대 한편에 새끼 여우를 내려놓은 윤이 그에게 다가갔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아스탄의 어깨를 도닥였다.
‘율리히가 내 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걸까.’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율리히에게 아스탄은 타인이나 다름없다. 친우의 후예이기도 했지만 몇 대손이나 건너지 않았는가. 자신들의 사이를 모르니 사생활이라 여기고 함구했을 거였다.
“나 정말 괜찮다니까?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좀 지쳤나봐.”
윤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황룡을 만나고 난 후엔 돌아갈 거라며 몇 번이고 얘기했다. 여기에 머물러서 죽는다는 사실을 밝혀 고통스럽게 하기 보단, 차라리 무정한 연인으로 남는 게 나았다.
“황룡을 만나고 나면, 남국의 섬으로 놀러가자. 휴양지에 가는 거야.”
“……그래, 어차피 남쪽에 볼일이 있으니 그곳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아스탄은 이를 악물었다. 율리히에게 제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배신감에 머리가 핑 돌았다. 물론 검공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과 달리 마음 약한 윤이니, 상처주기 싫어서 사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와 몸은 따로 놀았다.
‘아니, 내가 그를 탓할 자격이 있는가.’
손을 뻗어 윤을 잡아당겼다. 체구가 가느다란 몸은 쉽게 딸려왔다.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빼앗아오면 된다. 그를 무릎에 앉힌 채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 모든 숨결을 빼앗아오고 싶은 것처럼 강하게 이끌었다. 윤이 머뭇거리다가 입맞춤에 응해왔다.
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더라도 자신의 곁에서 죽길 바랐다. 그리고 그 역시 따라갈 것이다. 외롭진 아니할 것이다.
아스탄은 점점 비틀려가는 마음을 속으로 숨긴 채 자신을 불태우는 열기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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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웰 님, bluesuit 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짜 해피엔딩이에요!!
흑흑 오랜만에 연달아서 뵙죠? 명절 연휴는 정말 위대합니다. 불쌍한 직딩에게 방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오니소스님!
추석 연휴 내내 일일연재 도저어언 ٩(●˙▽˙●)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