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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율리히가 씩 웃으며 커다란 동작으로 윤의 후드를 벗겼다. 마치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듯 화려한 몸짓을 곁들였다. 모자에 가려져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차 대륙 출신인 청년의 모습에 예화 상단 사람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윤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요정과 같이 행동하는 차 대륙인의 존재는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요정만큼 배타적인 이들도 없었다. 그런데 아벨라르 인도 아니고 차 대륙인이라니. 누군가 말했더라면 호사꾼들의 거짓말이라 일축했을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조합이로다.’
여경을 잃어버렸단 생각에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구박을 들은 중년 남자, 마노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렸다. 참으로 범상치 않은 남자들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을 파괴하는 성격의 요정, 어려 보이는 외양을 가졌으나 눈빛은 심유한 차 대륙인, 그리고 마치 군신의 환생인양 수려하고 강건한 외양의 남자. 후드를 뒤집어 쓴 이유가 있었다. 절로 이목을 끌었다.
“어때, 여장하기에 적절해보이지 않아?”
빠르게 이성을 수습한 마노가 원석을 보는 듯 탐색하는 눈길로 윤을 살폈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거라 어림짐작이지만 전체적인 선이 가늘고 곱상한 청년이었다. 저 특이한 성격의 요정처럼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단정하고 깨끗한 생김새라 잘 꾸미면 여자로 보일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 그렇긴 하군요. 잘하면 체구가 큰 편에 속하는 여자 옷도 들어가겠습니다만.”
“율리히!”
“좋은 일 하는 거 흔쾌히 받아 들여. 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야, 그건! 앤지가 멋대로 한 거였잖아.”
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율리히에게 삿대질했다.
요정에게 손가락질 하는 무례한 행동에 아혼을 비롯한 사람들이 숨을 홉 들이켰지만, 요정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서 무척 친근한 사이라는 걸 눈치 챘다. 무슨 인연인지 궁금해졌지만 이내 추측을 그만두었다. 청년의 신상내력을 알아내는 일보다 여경을 구해내는 게 더 중요했다.
“안즈마네가 시킨다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 여장을 한두 번 해보나? 익숙하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율리히가 한 말처럼 여장은 처음이 아니다. 사총사 중 홍일점이었던 안즈마네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여자 친구를 갖고 싶어 했던 그녀는 종종 윤을 여장시켰고, 그로 인해 많은 사건을 겪어야했다.
“네가 저들을 먼저 돕자고 했잖아?”
율리히가 쐐기를 박았다.
“그건 그렇지만….”
윤은 눈썹을 늘어트린 채 제 자리에 앉았다. 저들을 먼저 돕자고 한 건 자신이었다. 무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여장을 하는 거라면 결코 나서지 않았을 거다. 제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그럼 하는 거다?”
“내가 불허하겠다. 요정의 장로여.”
아스탄은 강경한 목소리로 반대를 표했다. 평소의 건강한 윤이 여장을 한다고 해도 허하지 않았을 일이다. 가뜩이나 지금은 몸이 약해진 상태다. 강짜에 돕기로 결정하였으나, 윤이 위험에 뛰어드는 거라면 결코 허락할 수 없었다.
“윤의 몸이 정상이 아님은 네가 더 잘알 텐데. 게다가 외모로 따지자면 네가 더 아름답지 않나. 또한 이 작전을 네가 구상했으니 더 잘해내겠지. 이를 보았을 때, 네가 가장 적당한 인물이다.”
아스탄의 날카로운 지적에 율리히는 음흉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 덩치를 보라고.”
율리히는 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턱을 치켜들며 몸매를 뽐내었다. 요정족 마법사가 아니라, 검투사라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체격이다. 몇몇 사내들이 제 몸과 비교한 뒤 우울한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치마나 드레스를 입으면 어떻겠어? 아주 몸에 쫙 달라붙는 걸로.”
저 훌륭한 근육이 그대로 도드라지게 될 것이다. 분명 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다. 예화 상단의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스, 우리의 시력을 위해서 율이 여장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아.”
안즈마네가 여장을 강요할 때마다 윤은 율리히도 걸고 넘어졌다. 당연히 외양의 아름다움이라면 율리히를 따라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첫사랑이라고 생각한 안즈마네보다 율리히의 얼굴이 더 예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그랬다. 하지만 여장을 하는 건 별개였다.
하루는 억울함에 율리히에게 여자 옷을 한 번 강제로 입힌 적이 있었다. 가슴팍이 섹시하게 드러난 드레스였는데, 단단하게 갈라진 대흉근과 러플의 충격적인 조화에 모두들 악 소리를 지르며 제 눈을 가렸다. 그 후로 다시는 그에게 여장을 강요하지 않았다.
“봐, 윤도 저렇게 말하는 걸. 쟤가 하겠다고 하잖아. ……그리고 내 말을 잊었어? 그와 다른 걸 보이라고 했지?”
아스탄은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 매서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율리히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사람의 기세 싸움에 예화 상단의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눈치만 보았다. 저들이 도와주지 않는다 해서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럴만한 힘도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대가를 지불해 그들의 능력을 살 수 없었다. 당장 무너지기 직전의 상단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서 저들의 자비에 기댈 뿐이다.
“윤이 먼저 돕자고 했다고?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뭐라고 하더라. 아남… 아남일언중만금?”
“남아일언중천금.”
“맞아! 그런 뜻이었지. 사람이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잖아.”
“그건 일구이언.”
“이야, 윤. 너 많이 똑똑해졌는데?”
율리히가 박수를 쳤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모양새에 윤은 화를 내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쨌든 네가 한다는 거지?”
“…뭐 별 수 있나.”
윤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어쩔 수 없이 한 승낙이지만, 제일 중요한 윤의 허락에 아혼을 비롯한 예화 상단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예여경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그들의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아스, 내가 하겠다고 먼저 말한 거니까, 어쩔 수 없잖아. 뭐 나름의 책임을 지는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불쾌함이 역력한 아스탄을 돌아보며, 윤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내게 약속해라. 결코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네 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당장 관둬.”
“그렇게 할게.”
윤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건 마냥 나쁜 기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받는 염려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율리히가 헤에, 하며 흥미로운 소리를 내었다. 이전 월스턴이나 레나드와의 사이에선 볼 수 없었던 묘한 공기가 분명 보였다. 마냥 레나드의 환생이 밀어붙인 건 아닌 듯, 윤 역시 분명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자, 그럼 계획은 이렇게 하는 거야. 여장한 윤에게 추적 마법을 걸고, 일부러 납치당하게 만들어서 산적의 근거지로 들어가 일망타진을 한다. 오늘은 여장을 한 채 여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거야. 산적이 충분히 지켜본 뒤 윤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게.”
율리히가 늘어놓은 계획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혹시 여기에 불만 있는 사람?”
“난 없어.”
“네가 없으면 모두 없는 거지. 자, 그럼 이대로 가는 거다?”
이보다 괜찮은 방법도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모두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이제 여장을 할 준비가 필요한데.”
율리히는 뺨에 손을 얹은 채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혼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봐. 네 여주인의 옷 좀 꺼내봐.”
“예?”
아혼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여자 옷을 가질 사람이 어디 더 있어. 네 아가씨 밖에 없지. 언뜻 봤을 때, 윤과 체격도 비슷했으니 조금 작지만 입을 수 있을 거야.”
“하, 하지만.”
아혼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양자가 되었다하지만 여경과 그 사이엔 신분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다. 엄연히 주인 되는, 높은 신분의 여경이다. 게다가 여경은 성년을 맞이한 여성이었다. 함부로 속곳이나 옷에 손을 댄다는 건 남녀유별이 엄격한 차 대륙에선 상상치 못할 일이다.
“네가 지체할수록 네 아가씨에게 신변의 이상이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고?”
“기다려주십시오. 저 그럼 어떻게….”
아혼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마노를 비롯해서 모두 그의 결정만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여경이 사라진 이상, 상단 고위층의 양자인 자신이 가장 높은 신분이었다.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자, 잠시만….”
“싫으면 그만두던가. 우리 역시 갈 길을 떠나겠어.”
율리히는 심드렁한 말투로 결정을 촉구했다. 침을 삼킨 아혼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죄는 나중에 하면 된다. 이깟 옷보다 여경이 훨씬 중요했다.
“자자, 적당히 여성스러우면서도 활동성 있고, 격식을 갖춘 옷이 어디 없으려나.”
짐을 풀어헤친 율리히는 아무렇게나 옷을 뒤적거렸다. 그가 고른 건 차 대륙풍 복장으로 목 칼라가 길게 올라와서 목젖을 가리면서도 여성스러운 곡선이 도드라지는 긴 드레스였다. 허리에서부터 트임이 있어서 활동성을 강조했다. 치마 밑에 입는 듯 나풀거리는 소재의 바지도 찾아냈다. 윤의 몸에 대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슴은 속옷을 구겨서 넣으면 되겠네.”
“…저, 그런데 짧은 머리카락은 어떻게 합니까?”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던 마노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꺼냈다.
윤의 머리카락은 목덜미를 조금 덮는 정도로 무척 짧았다. 아벨라르의 그 어떤 나라에서도 머리를 짧게 자리는 여성은 없었다. 기사로 활약하는 이들조차 머리칼을 땋아 내리거나 길게 올려 묶을 뿐 잘라내진 않았다. 풍성하고 긴 머리채는 여성의 자존심이었다.
“그거야 내게 방법이 있지.”
율리히가 허공에서 마도구를 꺼냈다. 그리고 윤의 머리카락을 향해 겨눈 뒤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자라나라, 머리 머리!”
============================ 작품 후기 ============================
이 부분을 무척 쓰고 싶었답니다. 윤의 여장!! 종장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벼운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조금 뜬금 없이 보일 수 있지만 마냥 윤의 여장을 위해서 끼어넣은 부분은 아닙니다 하하하 ^0^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