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전생보고서-91화 (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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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자라나라 머리머리~!”

방안엔 정적이 흘렀다.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던 마노마저 흔들리는 동공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나 목덜미를 살짝 덮고 있던 윤의 머리카락이 빛에 휩싸이며 허리까지 길게 자라났을 때는 턱이 떨어져 나갈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어?”

윤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윤기 흐르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흘러내렸다. 마치 밤바다처럼 깊은 빛깔이 시선을 빨아들였다. 호리호리한 체구와 어우러지자, 뒷모습만 본다면 키 큰 여자라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과, 과연. 여자라고 해도 의심하지 못할 듯 보입니다.”

순식간에 자라난 긴 머리칼에 마노가 감탄했다. 율리히는 던지듯 여자 옷을 윤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 옷을 입어봐. 안 맞는 건 마법으로 아주 약간은 늘릴 수 있으니까.”

“음. 알았어.”

윤은 펄쩍 뛰며 거부할 때와 달리 의외로 순순히 율리히의 명령을 따랐다. 싫은 일을 하더라도 기왕에 하는 거라면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하자는 게 그의 신조였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간 윤이 후드를 벗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후엔 겹겹이 껴입은 상의를 단숨에 벗어던졌다. 무의식중에 따라간 시선을 돌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얇은 슈미즈 차림이 되었다. 당연히 욕실에 들어가거나 발을 쳐놓고 옷을 갈아입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나가. 당장.”

아스탄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위협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예! 예. 미, 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예화 상단의 사람들은 흔들 인형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심약한 마노는 히끅거리며 딸꾹질까지 했다. 율리히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가. 아니지, 잠시만. 그 중에 너, 너는 남아 있어.”

율리히는 줄지어 방을 나서려던 예화 상단의 일행 중 아혼을 붙잡았다.

“저 말입니까?”

아혼이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너는 좀 필요하니까.”

율리히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버 산맥에 위치한 여관은 늘 그렇듯 봄에서 여름까지 한철 장사였다. 동절기엔 땅이 얼어서 조난되어 죽기 딱 좋은 시기인 탓이다. 추운 날씨에 이곳을 오른다는 건 아주 베테랑이거나 목숨을 내놓은 얼간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물론 봄으로 넘어가는 이맘 때 쯤에도 종종 상단 직원과 용병을 제외한 뜨내기 모험가들이 우버 산맥을 찾기도 했지만 그건 무척 드문 일이다. 덕분에 허름한 여관엔 파리만 날려서, 홀을 차지한 손님이라곤 할 일 없는 늙은 용병 둘이 전부였다.

예화 상단의 사람들은 구석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얼핏 봐도 상단의 사람들로 보였기에 용병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요즘 산적들이 설친다며.”

“상단을 주로 노리고, 여자들도 납치한다던데?”

여관에서 쉬어가는 용병들은 싸구려 맥주 한 잔에 피로를 풀고, 서로 가진 정보를 나누었다

“그래서 여자 씨가 말랐나.”

늙은 용병 하나가 여관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여관 직원마저도 모두 남자로 바뀐 지 오래였다. 여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조심. 계단이 가파르다.”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음성이 이목을 잡아끌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늙은 용병이 고개를 돌렸다. 계단에 선 남자가 누군가를 부축해서 홀로 내려오고 있었다.

용병은 남자의 낯선 외모에 고개를 기우뚱 거렸다. 하루 종일 1층에서 죽치고 있던 그였던 터라 여관을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언제 들어온 누구인 건지 생각을 하다가 두어 시간 전 쯤, 후드를 뒤집어 쓴 세 사람이 여관에 들어왔다는 걸 떠올렸다. 처음엔 남자 셋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키가 작은 쪽이 여자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할 일도 없었던 터라 용병은 계속해서 낯선 이를 관찰했다. 부러 평범한 옷을 입었지만 용병으로 구른 세월로 추측해 보았을 때, 고귀한 신분인 게 분명했다. 남자가 붙잡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여자치고는 큰 손으로, 스스로도 부끄럽다 생각한 건지 장갑을 꼈다.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를 따라 눈을 올리자 무척 젊고 앳된 여자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여자의 모습에 용병들은 몸까지 앞으로 기울이며 음흉한 시선을 던졌다.

여자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 쪽으로 늘어트리고 몸에 달라붙은 흰 옷을 입었는데 몸의 굴곡이 다소 적은 게 흠이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가 제법 봐줄만 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남자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새하얗고 갸름한 얼굴은 어딘가 중성적이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붉은 입술. 오로지 여자가 가진 색이었다.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시선을 좍 빨아들이는 매력을 가졌다. 특히나 한 사람만을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특히나 요염했다.

늙은 용병 둘의 시선을 사로잡은 여자는 바로 윤이었다.

“자, 이쪽으로.”

“으… 응.”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윤은 입을 꾹 다문채 고개만 끄덕였다. 통이 넓은 바지는 마치 치마처럼 가랑이 사이가 트여있어서 몹시 불편했다. 사실상 아스탄의 부축은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을 가리는 거였다.

용병 두 놈의 끈적끈적한 시선이 무척 불쾌했다. 그러나 저들이 속아 넘어가자 안심했다. 엄연히 175cm의 청년이 여자로 착각하게 만든 건 율리히의 암시마법 덕분이다.

물론 마법은 만능이 아니어서 남자를 여자로 보이게 만들어주진 못했다. 그저 긴가민가한 상황에서 당연히 여자라고 여기도록 암시를 걸었을 뿐이다. 암시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예여경의 옷을 입고, 화장품을 빌려서 분장에 가깝게 화장했다.

세수한 후 스킨로션도 제대로 바르지 않는 윤에게 피부 화장은 너무 갑갑했다. 입술에 연지를 발랐는데, 이마저도 끈적끈적하게 묻어나자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화장을 매일 하는 여자들은 정말 대단하다며 속으로 존경을 표했다.

“당장, 그 지저분한 눈알을 떼도록.”

“힉-!”

제 목으로 들이밀어진 칼날에 용병 하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무사가 외눈을 희번덕거리며 칼을 거두었다. 치켜뜬 눈이 어찌나 살벌한지 절로 심장이 발발 떨렸다.

“아가씨에게 다시 그런 무엄한 눈빛을 보낸다면 네 목을 친히 잘라서 효수할 것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요.”

늙은 용병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한 게 맞겠지.’

남색 머리 남자의 눈치를 보니 제법 제대로 위협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아혼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사이 아스탄은 윤을 부축해서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느릿느릿하던 점원은 재빠르게 나무를 파서 만든 메뉴판을 들고 와 그들에게 내밀었다. 친절한 미소까지 입가에 띠었다.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점원의 시선은 윤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윤은 그 눈빛이 민망해서 고개를 살짝 틀었는데, 그마저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내가 주문하지.”

아스탄은 시선을 차단하듯 몸을 돌려서 윤을 가렸다.

“무엇이 먹고 싶은 건가.”

다정한 목소리로 메뉴판을 일일이 짚었다. 이게 먹고 싶은 건가? 별로라면 이 음식은 어떻지? 마치 여자들을 대하는 듯 다정하고 상냥한 태도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눈빛. 좀 짜증이 났다. 윤은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연지 맛에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마음에 드는 메뉴가 없는 게냐.”

윤은 한참을 고개만 도리도리 저으며 거부하다가, 가장 무난해 보이는 스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아내가 이 음식이 먹고 싶다고 하는 군. 두 그릇으로 부탁하지. 아, 한 그릇은 맵게 해다오.”

“예, 예! 그리 하지요.”

아스탄의 하대는 무척 자연스러워서 점원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을 부려온 행동이 몸에 배여 있었다. 귀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점원은 재빠르게 제 자리로 돌아갔다. 깊은 산골에 처박혀 사느라 여자를 보기 힘들다 해도 목숨과 바꾸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가씨,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혼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정중하게 물었다. 어딘가 안타깝고도 열정적인 눈빛이었다. 애끓는 심정이 보는 사람들에게도 절절히 전해졌다. 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내 아내는 내가 챙긴다. 너의 본분을 다하도록.”

“……존명. 저는 밖에서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아혼이 입술을 짓씹으며 밖으로 나섰다.

주방장을 비롯한 여관 주인, 다른 점원들 모두 흥미로운 눈빛으로 낯선 여행자들을 지켜보았다. 어딘가 사연 있어 뵈는 두 남자와 한 여자였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두 남녀는 여행자로 보였고, 외눈 무사는 여자의 호위무사로 보였다. 그러나 연심은 숨길 수 없는 법이라서, 호위무사가 여자를 보는 눈빛에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건가?”

“남자 쪽이 꽤 높은 귀족으로 보이는데…….”

“여자는 벙어리인가?”

“하긴, 귀한 집에서 말도 못하는 차 대륙인을 허락하겠어.”

쑥덕거림에도 부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천히 식사를 마친 후, 여자를 부축한 남자는 문으로 향했다.

“이 근처를 잠시 돌아보고 오겠다. 그 사이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제 품으로 날아오는 은색 동전에 여관 주인이 속으로 만세를 불렀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라졌으니, 큰소리로 그들의 정체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무료한 생활에 깃든 흥밋거리에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신나게 피워내었다.

여관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창문을 통해 2층 숙소 안으로 들어온 아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혼의 역할은 여주인을 따라서 도피하는 호위무사. 남몰래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지만, 신분의 차이에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여주인의 사랑을 뒤에서 지켜주는 순정남이다.

모두 율리히의 각본이었다. 이 계획에 그는 없었다. 요정은 너무도 눈에 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사람이 들어왔기에 자신의 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고, 낙점시킨 이가 바로 아혼이다.

“잘했어. 제법 눈빛이 애절하던걸?”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리던 율리히가 아혼에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예? 벼, 별거 아닙니다.”

아혼은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윤에게 벌써 반한 거면 곤란한데, 역할에 과한 이입도 좋지 않다고.”

“아닙니다! 저,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이 벌게진 아혼은 저도 모르게 속내를 크게 외치고 말았다. 율리히가 짓궂게 웃으며 눈을 흘겼다.

“그렇군-. 과연 실제 마음에 품은 여자가 나오니 그런 눈빛을 지을 수 있었던 거겠지. 너보다 신분이 높아서 다가갈 수 없는 여자라. 예여경, 네 주인인가? 너 역시 예여경 다음의 결정권자였잖아. 오르지 못할 나무가 아니지 않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상단주 형에게 양자로 입적되어서 여경과 사촌이 되었지만 아혼은 자신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게 정녕 연정인가. 우울한 생각도 잠시, 아혼은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기 연민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경을 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율리히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괸 채 아혼을 응시했다. 괴짜라고 생각했던 요정은 무저갱처럼 깊은 눈빛과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흐응.”

율리히는 짧게 코를 울리며 아혼을 쳐다보았다.

“네가 정녕 그녀에게 닿을 수 없는 남자라 생각해?”

“……그렇습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도. 꿈에서라도 그 마음을 감추어야합니다.”

아혼이 괴로운 불덩이를 삼키는 심정으로 말했다.

“과연 꿈인가.”

율리히는 알 수 없는 말을 홀로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솔하레님, 류웰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안내의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나전보는 본래 신국판 상하권 약 400p로 예상되어있었으나, 오늘 도움을 받아 가편집한 결과 약 630p 가량이 나왔습니다. 초보 글쟁이의 계산 미스입니다 8ㅅ8

아직 완결도 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았을 때 도저히 두 권으로 안될 것 같아 세권으로 늘리고자 합니다 8ㅅ8......... 그 대신 더 만족스럽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현재 구상중인 외전의 경우엔

1. 엔딩 이후의 윤과 아스탄의 일상(+영원히 고통받는 목도리)

2. 윤이 이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 월스턴과 율리히, 안즈마네가 함께 사총사로 불리던 시절입니다. 역시 여장을 하며 영원히 고통받는 할배(...)의 이야기입니다

3. 젊은 xx 이레인. 그에게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오게 됩니다. 과연 불청객의 정체는?

아마 이 중 두 편이 이북에 실리게 되고, 소장본에는 완전판이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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