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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산채로 돌아온 황룡 가리온은 말에서 내렸다. 동시에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수면 마법을 너무 강하게 걸었는지 삼십 분 가량 말을 달려왔는데도 여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패밀리어와 시야를 공유했을 때, 남편이란 작자에게 애지중지 보호받는 모습을 괜히 보았던 게 아니다. 고작 수면 마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인간은 역시 약해 빠졌어. 가리온이 혀를 쯧쯧 찼다.
“그놈이 쫓아오려나.”
가리온은 뺨에 손을 댄 채 귀여운 척 고개를 갸웃했다. 적당히 인간인 척 굴기 위하여 기감을 봉인했지만, 봉인을 뚫고 느껴지던 남자 인간의 압도적인 기세란 참으로 대단했었다. 구하러 오면 재밌는 일이 생길 텐데.
“……그런데 좀 익숙한 기운이었단 말이야?”
“두목, 무어라 말씀하신 겁니까? 죄송하지만 못 들었지 말입니다.”
부하들 중 하나가 말했다. 가리온이 미간을 짜증스럽게 구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두목이 아니라 대장이라 부르라고 누누이 말해왔던 거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다, 다음부터는 꼭 대장이라 부르겠습니다.”
말실수한 부하는 오체투지 하듯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마까지 땅에 대고 절절히 자비를 구했다. 모두 숨죽인 채 가리온과 동료를 번갈아 보았다. 남자에게 자비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여서, 별거 아닌 일로도 목숨을 앗아갔다.
“기분 좋을 일이 생길 거 같으니까, 이번만은 봐주지.”
“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얼른 꺼져.”
가리온의 말에 부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흙먼지가 된 옷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꽁지가 빠져라 부리나케 도망쳤다.
“아까 전부터 생각했지만, 진짜 보기보다 무겁네. 인간 여자들은 이보다 가볍던데.”
가리온은 말 등에 얹어져 있던 여자를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윤은 땅에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떨어졌다. 난폭하게 다루는 행동에 후드 밖으로 윤기 있는 머리카락이 삐져나왔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옷자락을 꽁꽁 싸맨 거야?”
“저 정도면 숨 막힐 텐데. 저리 싸매면 갑갑해서 못 버틸텐데 용케도 산을 올랐네.”
부하들이 혀를 쯧쯧 찼다.
“자, 귀하신 얼굴이나 한번 볼까?”
후드를 걷어 올린 가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힘없이 감긴 눈매의 여자, 아니 남자가 있었다.
“하, 하하하!”
익숙한 얼굴에 가리온은 광소를 터뜨렸다. 하나도 변하지 않고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 변했나? 어쨌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대박이잖아. 우릴 잡겠다고 여장까지 한 거야?”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 눈물까지 괴였다. 가리온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윤의 입가에 가져갔다.
“자자, 마시라고. 좀 짜긴 하지만 이보다 명약은 없으니까.”
가리온은 꾹 다물린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입 안으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서 마구 헤집었다. 촉촉한 점막이 손가락에 감겼다. 순간 뱃전을 둔탁하게 때리는 성욕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찮게 여기던 인간에게 욕구가 동하다니. 너무 인간 흉내를 열심히 내다가 그들에게 동화된 모양이었다.
“저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푸줏간에 집어넣을까요?”
발자국 흔적이 남지 않게 뒷정리를 하고 온 털보가 말했다. 납치해온 여자들을 넣는 감옥을 푸줏간이라 일렀다. 대부분의 산적들은 감옥으로 불렀지만, 가리온과 털보는 꿋꿋이 푸줏간이란 호칭을 고집했다.
“아니, 이 건 내가 데려간다. 건드리지 마.”
“두목만 혼자 독식하는 겁니까?”
털보가 불퉁한 소리로 말했다.
“이미 차 대륙 계집 하나를 잡아온 게 있지 않습니까. 그거라도 주십쇼.”
가리온은 잠시 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적당히 노리개로 던져줄까? 어차피 한갓 인간. 남자든, 여자든 그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내버려 둬. 그건 팔아야 하니까, 상품에 흠집을 내니 곤란해.”
이 흥미로운 인간이 다른 성별로 분장까지 해가며 구하려 들었다. 망가지면 재미없을 거 같았다. 차라리 윤이 눈을 떴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다. 그쪽이 더 재미있을 상황으로 생각되었다.
“대장,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오늘 실컷 뺑이만 쳤지 말입니다.”
털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감히 내 말을 거스르는 거야? 인간의 목숨이 언제부터 두 개였지?”
가리온이 이를 드러냈다. 금안이 마치 파충류의 날 것처럼 번뜩였다. 겁에 질린 털보가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얼른 꺼져.”
“예, 예!”
털보가 부리나케 도망쳤다. 가리온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엔 땅에 침을 퉤 뱉는 걸 잊지 않았다. 더럽고 치사한 새끼. 혼자 욕심만 많아선. 그러나 앞에서 드러낼 수 없는 불만이기에 꾹꾹 눌러 참을 뿐이다.
가리온은 윤을 가볍게 들어 올려 어깨에 걸쳤다. 딱딱한 뼈에 배가 눌려서 고통스러울 자세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조잡하게 지어진 산채와 달리 가리온의 방만큼은 화려하게 꾸몄다. 싱그러운 향기가 피어오르는 모형 정원, 유리 속에서 함박눈을 떨어트리는 구슬, 수십 메타브 떨어진 장소를 바로 앞처럼 내다볼 수 있는 망원 안경까지. 갖가지 신비로운 물품들로 가득했다.
가리온이 바닥에 채여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크리스털 핀을 집어 들었다. 며칠 전 이 방에 데려왔던 소국의 공녀가 이 핀의 주인이다. 차 대륙인의 피가 섞여있어서 집어왔는데, 겁탈하는 줄 알고 바락바락 반항하는 모습이 귀찮아서 손발을 아무렇게나 꺾어주었다. 그랬더니 얼굴의 온갖 구멍에서 더러운 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을 구르는 행동에 밖으로 내던졌던 기억이 났다.
“저번에 봤을 땐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지 않았는데, 요정 놈이 도운 건가?”
가리온은 윤의 긴 머리카락을 적당히 땋아서 크리스털 핀으로 고정했다.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반짝이는 보석은 밤하늘에 새겨진 별처럼 신비로웠다.
“뭐 나쁘진 않네.”
가리온이 홀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기절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이 이렇게 약해지면 곤란하다고? 힘 내, 윤.”
가리온은 윤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 제 턱을 괴었다. 납치된 이가 윤이니, 남편으로 보이던 놈은 그란디아의 황태자인 게 틀림없다. 그의 강렬한 기세와 달리 윤은 새벽별처럼 흐릿했다.
“내 생에 너만큼 흥미로운 인간도 없었어. 그러니까 좀 더 발버둥 치라고.”
황금색 눈동자가 잔인한 흥미로 반짝였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지? 황룡이 윤을 납치해간 범인이라고?”
아스탄을 바라보는 율리히의 낯이 경악에 물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난스럽게 매달려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었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자는 분경 황룡 가리온이 맞다. 내 아비에게 강신했을 때, 언 듯 본모습을 보았으니까.”
“……거짓말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머리가 어찔할 만큼 충격에 율리히는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주신 벨라드가 낳은 신룡은 모두 넷이다. 시간의 황룡, 공간의 흑룡, 공기의 백룡, 물의 청룡으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그중 황룡은 사나운 성정으로 이름 높아서 우버 산맥에 숨어 사는 이종족들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해왔다. 그러나 가리온이 저지른 죄질은 정도를 넘어섰다. 인간을 납치해 사고파는 짓을 저지르다니. 잠이 든 주신께서 결코 아신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실도(失道)한 건가.’
신의 대리자는 어지간한 일로 죽지 않는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모든 기억을 깨끗하게 씻어낸 채 새로 태어난다. 때문에 오랜 세월을 살다가 미쳐버린 신들도 가끔 생겨났다. 실도한 신들 중에선 전대의 청룡이 가장 유명했다. 사랑에 미쳐버린 그녀를 손수 죽인 건 황룡 가리온이다. 그 후 가리온 역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가리온은 단 한 번도 죽지 않은, 유일한 신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을 살아온 그가 과연 미치지 않았을까? 율리히는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가 정녕 실도한 거라면 어찌 해야하는 걸까.
“일단 윤에게 빨리 가자고. 황룡이 어떤 속셈으로 움직이는 건 지 알 수 없으니.”
“게이트를 열진 못하는 건가?”
아스탄의 질문에 율리히는 고개를 저었다.
“여긴 용의 계곡과 가까워서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하다고. 잘못하다가 네 상체는 나무에 걸려있고, 하체는 바닥에 파묻힐 수도 있어. 요게 똑 부러져서 분리된다고.”
율리히가 제 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스탄이 잘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예를 들어도 꼭 그리 들어야 하나.”
“그러니까 튼튼한 다리로 달리자고. 뛰어!”
율리히가 재촉했다.
“저,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예화 상단의 마노가 물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진 못하였으나, 범상치 않다는 일이 벌어졌다는 건 대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흰 여기 있으면 방해만 되니까 그냥 대기해. 너희 아가씨는 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마노를 비롯한 상단 사람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 너는 따라와.”
“저 말입니까?”
아혼이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율리히가 짜증스럽게 그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그래, 도망갈 생각이라면 꿈 깨라고.”
세 사람은 날듯이 달렸다. 엄밀히 말하면 아혼은 질질 끌려갔다. 바닥을 나뒹굴지 않기 위해서라면 열심히 땅을 박차며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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