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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97화 (9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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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그게 뭔 ㄱ…… 엉뚱한 소리야.”

중간에 욕설이 섞일 뻔했지만 윤은 간신히 참아냈다.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려 방을 살폈다. 황궁과 공작성만 보아온 그에게도 아름답고 화려한 방은 산적 소굴이라 믿기 힘들 정도다.

‘저 용가리가 산적들의 대장이었다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머리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내가 왜 여기에 온 거야.”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얼마나 흙먼지를 마셨던 건지 목이 깔깔했다. 윤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원한 물 한잔이 절실했다. 잔기침하는 윤을 보아도 가리온은 쳐다만 볼 뿐 ‘뭐라도 마실래?’란 흔한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역시 놈은 인간의 껍데기를 지녔을 뿐이다.

“윤, 혹시 재밌는 동방의 물품 좋아해?”

가리온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윤의 상태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제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내 말을 듣긴 한 거냐며 짜증을 내려던 윤은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평범한 상식으로 그를 상대하려 들어선 안 된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적당히 박자에 맞춰 기분을 붕 띄워주는 게 훨씬 잘 통했다.

“어떤 거 말하는 건데? 차 대륙의 물건이야?”

윤이 흥미를 보이자, 가리온은 어린아이처럼 방방거리며 흥분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란디아의 황성에서도 구경하지 못한 물건들일 걸? 잠시만 기다려봐.”

가리온은 보는 사람이 정신 사납게 방을 살폈다. 그러더니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상자의 뚜껑을 열고 몸을 반쯤 집어넣은 채 상자 속을 뒤졌다. 윤은 가리온을 밀어 자빠트린 뒤 뚜껑을 닫아 저 속에 가둬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건 차 대륙 상인들에게 받은 건데 무척 유명한 피리라고 하더라고.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이 들어있다나.”

가리온은 윤을 깎아 만든 피리를 흔들며 자랑했다.

“…정말 받은 거야?”

“당연하지. 뭐야, 너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윤의 미심쩍은 표정에 가리온이 볼을 부풀렸다. 물론 제 또래의 어린 청년이 짓는 표정이라 보기 역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성질 더러운 똥색 용가리는 고개를 끄덕인 순간, 제 목을 거꾸로 꺾어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건 아냐. 내가 널 왜 못 믿겠어.”

“정말이지?”

“응, 무척― 궁금해! 보여줘!”

“좋아! 보여주지! 이렇게 불면 정령이 튀어나온다고 했는데….”

가리온이 피리를 불었다. 악기를 다루는 자세가 엉망진창이라 쉭쉭 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단소처럼 세워서 부는 피리인데 플루트를 불 듯 엉뚱한 구멍에 입술을 대고 불었으니 당연했다.

“이게 뭐야. 고장 난 거잖아?”

흥미를 잃어버린 그는 피리를 아무렇게나 뒤로 던져버렸다. 한 가문의 가보로 삼아도 아깝지 않을 보석 피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리온에게 가보를 강탈당한 동방 상인에게 애도를 보냈다.

“그건 네가 잘못 불어서 그래. 왜 애꿎은 피리를 부숴.”

“내가 틀렸다는 거야?”

가리온의 웃는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은 마치 잘 만든 조각상처럼 인간미를 찾을 수 없었다. 살벌했다.

“……너야 언제나 옳지. 차 대륙에서 피리를 부는 법과 달랐단 거야.”

윤은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말을 골랐다. 가리온이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흐응. 이제 말솜씨도 제법 늘었잖아.”

“칭찬으로 들을게.”

윤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가리온. 한 가지 물어봐도 되는 거지?”

“좋아, 한때 너와 맺었던 인연으로 특별히 허락하겠어.”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자신을 납치한 산적의 얼굴을 확인한 뒤 얼마나 놀랐던가. 이내 수면 마법에 걸려 뻗긴 했지만 아스탄에게 알리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스탄은 가리온의 정체를 확인했을까?

원래 계획대로 나갔다간 꼼짝없이 실패다. 인간의 탈을 썼을 때는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이 주신 벨라드가 건 제약이지만, 처음부터 타고난 능력이 달랐다. 결코 그 상대가 될 순 없었다. 어찌 인간이 신의 대리자를 당해낸단 말인가. 홧김에 용으로 변해서 짓밟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육포 신세였다.

아마 가리온의 얼굴은 모르더라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눈치 채었을 거다. 윤은 그를 믿었다.

“그건 말이야…….”

가리온이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문단속하지 않은 건지, 산적 하나가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왔다. 낡고 지저분한 옷을 입은 그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뒤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멀쩡하게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알몸으로 뒹구는 모습이라도 기대한 것처럼 입맛을 쩝쩝 다셨다.

“뭐야, 내가 언제부터 다짜고짜 내 방으로 오라고 했어?”

“죄, 죄송합니다. 대장. 침입자가 발생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털보의 질문에 가리온이 짜증을 냈다.

“뭘 나한테 물어. 적당하게 처리해.”

“하지만 그놈들이 너무 쎄지 말입니다. 벌써 몇 놈이나 당했습니다.”

“시끄러워.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

“……그럼 마법 무기라도 내려주시든가 말입니다.”

털보는 방에서 나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가리온이 짜증이 역력한 표정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리고 너. 언제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라고 허락했지?”

“죄, 죄송합니다.”

“언제까지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행동은 고치지도 않아. 지겨워.”

성큼성큼 걸어간 가리온은 벽에 장식된 검을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털보의 가슴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윤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들어야지.”

가리온이 투덜거리며 검을 뽑아내었다. 피 분수가 하늘로 치솟았다. 역한 피 냄새가 순식간에 방 안을 메웠다. 말을 잃은 윤이 눈만 깜빡거렸다. 털보 역시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크게 벌렸다. 바닥에 쓰러져서 경련하는 털보의 숨은 가늘어져서 금방이라도 끊길 듯 약했다.

“이래서 인간은 좋아할 수가 없어.”

“……가리온.”

가리온이 손가락을 튕기자 털보의 시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타오르는 지독한 시취와 함께 산적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람을 단지 인기척도 없이 방에 들어왔단 이유로 살해했다. 저런 모습 때문에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 미쳐버린 용을 막을 방도란 도저히 없는 걸까.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데, 길고 반짝이는 금발이 뺨으로 쏟아졌다. 고개를 들자 가리온이 생글 웃었다. 뺨에 틘 핏물과 어우러져 기괴한 미소였다. 윤은 굳어버린 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왜 그런 표정 짓는 거야?”

가리온이 윤을 바라보며 의문조로 물었다. 아름다운 미남자는 인간인 척했지만, 인간이지 못했다.

“네 표정이 어떤데?”

“내가 인간을 볼 때 짓는 표정.”

가리온이 생글거렸다. 녀석이 인간을 얼마나 하찮게 보는지 누누이 강조하지 않아도 윤은 잘 알고 있었다.

“……네 눈의 착각이겠지. 그리고 실수를 하더라도, 죽일 필요까진 없었잖아.”

“넌 벌레를 죽일 때 이유가 필요해? 어차피 쓰레기였잖아? 너도 저자를 죽일 생각이었으면서.”

가리온이 이를 드러냈다. 정곡을 찔린 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을 납치하고 사고판 산적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싸움이 벌어졌다면 인정사정없이 목숨을 빼앗아 갔을 거다. 윤은 자신이 가진 힘을 남용하지 않았지만, 악한 사람은 가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가리온에겐 저들이 동료였다. 소중히 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리도 쉽게 목숨을 앗아갈 거라 예상치 못한 탓이다.

“너무 불쌍할 정도로 착한 나의 윤. 고작 산적 하나가 죽었다고 저런 표정이라니. 그래서 너를 지켜보는 건 참 재밌었는데 말이야.”

가리온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뭐긴 뭐야, 네 얘기지.”

길게 자란 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휘휘 돌려 감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얼굴을 아주 닮은 남자였지만, 닿는 게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윤은 짜증난 표정으로 가리온의 손을 탁 쳐냈다. 신경질적인 거부에도 가리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귀찮게 지분거렸다. 결국 윤은 그에게 제 머리카락을 내주었다. 어차피 잘라낼 머리칼이다. 제대로 부정 탔으니 잘라낸 후에 태워버리겠노라 결심했다.

“그럼 문제! 이 세상에 늙지 않는 존재가 무엇이 있지?”

“……신.”

“신은 어째서 인간에게 불멸을 주지 않았을까? 난 그게 언제나 궁금했어. 그래서 조금 실험을 했지.”

가리온이 떠들어대는 말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불멸과 실험. 마치 자신을 불로불사의 저주 속에 갇히게 만든 원흉이 자신이라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꼭 네가 날 죽지 못하는 몸으로 만든 것처럼 얘기하네.”

“맞아. 네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언제는 모른다며.”

“글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네 존재는 세상의 이치에 벗어나있다.]고만 했잖아.  윤. 너는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아름다운 내 장난감이었지.”

가리온은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망할 녀석들이 방해만하지 않았더라도. 네가 스스로 미쳐서 죽어버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자, 잠깐.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내가… 이런 몸이 된 게 너 때문이란 거야?”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눈앞의 황룡이라는 거였다.

“……네가 날 이런 몸으로 만들었다고?”

“뭐야, 몰랐어? 정말 네 친구들의 우정은 대단해. 끝까지 비밀로 해주었구나.”

가리온이 신나게 박수를 쳤다.

“계속 네 할 말만 하지 말고, 제대로 알려줘. 내 몸의 비밀을 월스턴이, 안즈마네가, ……율리히까지 알고 있었다는 거야?”

“응. 맞아!”

가리온이 해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연달아 폭로되는 진실에 윤이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류웰님과 선작추천코멘트를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진실에 다가가네요. 폭탄을 던지고 저는 늦은 여름 휴가를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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