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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스…….”
“너무 늦게 왔군. 미안하다.”
아스탄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뛰어들어서 가리온을 공격했다. 상황 파악은 나중의 일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정신이 다른데 팔린 덕분이었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황룡이 방심한 덕분에 공격에 성공했다. 윤의 흐트러진 옷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미 죽어버린 용에 대한 살심이 더욱 끓어올랐다.
“저런 게 신이었다니. 축복을 받기 위해 어떻게든 이곳으로 오려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군.”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어. ……저쪽이 함량 미달인 거라고.”
아스탄은 윤의 달램에도 서늘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가리온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단숨에 검을 들어 목을 잘랐다. 그리고 잘려나간 머리를 공처럼 발로 뻥 찼다. 피에 물든 긴 금발 머리가 통통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윤은 화풀이처럼 보이는 잔인한 손속에 좀 놀랐다. 자신을 죽이려던 자객도 깔끔하게 처리하려던 녀석이 이렇게 군다는 건.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다.
“이정도면 임시방편은 되겠지.”
아스탄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검집에 넣었다.
“율리히가 밖에 기다리고 있다. 가자.”
윤은 머리가 날아간 가리온의 몸과 아스탄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번갈아보았다. 위기의 순간에 그가 도와준 건 기뻤지만 후환이 걱정되었다.
그란디아는 황룡 가리온의 축성 아래 지탱되는 제국이었다. 황룡의 축성을 받아야만 황태자가 될 수 있다. 그게 절대적인 대법전, 렉스 그랑드가 명문화한 황위를 위한 최소 요건이다.
월스턴이 축복을 받을 때는 가리온의 변덕에 의한 거였지만, 꾸준히 축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자 시간이 지나며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뭔가. 황룡의 축복은커녕, 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나야 튀면 그만이라 치고, 넌 무슨 생각이야. 이렇게 공격해버렸으니 가리온이 축복해줄 리가 없잖아.”
“방금 전에도 말했다만, 그런 자가 신이라면 그에게 받는 축복 따윈 필요 없다.”
아스탄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황제가 되지 못할 거라고? 렉스 그랑드를 어기겠다는 거야?”
“그릇된 법을 뜯어 고쳐야지. 그릇된 사실을 알면서도 내 이득을 위하여 눈감을 생각 없다. 그건 졸자나 하는 짓이다.”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거야.”
윤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이 상황을 망친 게 모두 자신 때문인 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후회하진 않았다. 여경을 구하려 들지 않았다면 가리온이 길을 벗어난 걸 끝끝내 몰랐을 터였다.
“글쎄. 나는 그다지 정의로운 인간은 아니지만, 이런 일을 눈감을 정도로 최악은 아니라 생각한다. 저렇게 인간을, 이종족을 사고파는 자가 신이라니….”
아스탄은 눈을 내리깐 채 죄책감에 잠긴 윤의 얼굴을 감상하듯 쳐다보았다. 비록 바닥에 시신 두 구가 굴러다니고 있어 낭만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윤은 언젠가 널 버리고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널 남겨둔 채. 도와줄까? 널 잊지 못하게. 네게만 사로잡힐 수 있게.]
아름다운 남자가 꿀에 발린 독을 속살거렸다. 빠져나갈 수 없이 촘촘한 그물로 짠 덫이었다.
아스탄은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기억이 아니다. …현제 레나디온의 기억이다. 눈을 칼로 쑤시는 듯 지끈거리는 두통에 순간 비틀거리자 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붙잡아 온다.
“아스, 괜찮아?”
“……괜찮다.”
역시 이 모든 사건의 근원에는 저 황룡 가리온이 있다. 자신이 없는 사이 황룡이 어떤 말을 나부대었을 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신의 전생이 레나드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생각만해도 심장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차가운 공포가 그를 잠식했다. 아스탄은 일그러진 표정을 억지로 가다듬은 채,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음울한 미소였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너는 네 몸이나 걱정하도록 해. 혹 가리온이 네게 위해를 가하진 않은 건가?”
아스탄은 저를 붙잡은 윤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몸은 괜찮은 건지, 가리온이 무슨 짓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철썩 같았으나 상황이 위급했다. 가리온이 이대로 죽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나야 괜찮아. 그나저나 그란디아가 문제야. 으아, 진짜 사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벨라드는 대체 뭘 하는 거야.”
머리를 싸맨 윤은 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렸다.
“이미 잠든 신을 탓해봤자 무용이다. 빨리 나가도록 하지.”
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탄이 윤의 어깨를 감싼 채 뒤돌아섰다. 윤의 표정은 밝아질 줄 몰랐다. 아스탄은 윤을 달래기 위해 우스갯 소리를 꺼냈다.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정 안되면 네게 책임지라고 엉엉 울며 매달릴 터이니.”
“거짓말도 말이 되는 걸 해.”
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아스탄이 제게 매달리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제야 얼굴 가득 드리워져있던 수심의 기색이 가셨다.
“씨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어마어마한 살기에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놀람과 경악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새 몸을 수복한 가리온이 욕설을 짓씹었다. 정확하게 잘려나갔던 목은 어느새 가느다란 실선만 남긴 채 정확하게 제 자리를 찾은 상태였다. 가리온이 제 목을 우득우득 소리가 나도록 꺾었다. 목에 고인 침을 퉤 뱉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뒈지는 거야.”
“……가리온.”
“나 진짜 화났다고. 윤.”
몸을 일으킨 가리온이 살벌하게 웃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는 행동은 일견 무방비했지만, 공격할 구석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는 게 절절하게 실감되었다. 벌써 몇 번이나 심장을 찔렀는데도 되살아난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윤은 욕을 중얼거렸다.
“이렇게 빨리 살아날 줄은 몰랐는데.”
아스탄은 검을 뽑아들었다.
“호오, 나랑 싸울 생각이야? 이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들도 오랜만이군.”
가리온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항복한다고 해서 그대가 우릴 살려줄 것 같지도 않으니 발버둥을 쳐야하지 않겠나. 윤, 네가 놓고간 검이다.”
“고마워.”
아스탄은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검을 내밀었다. 윤이 반색을 하며 받아들었다. 주인의 손으로 하루 만에 돌아온 마검 트리기토스가 웅웅거리며 울 것 같았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아는 지 윤이 발휘하는 마나를 단숨에 빨아들였다. 그리고 타오르는 검기를 밖으로 토해냈다.
두 사람은 가리온을 둘러싼 채 경계했다. 사실 무의미한 발버둥에 가까운 사실을 아스탄이나 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나 죽이시오, 하고 목을 내밀 순 없었다.
이제 가리온은 인간 행세를 집어치울 모양인지 인간화를 풀기 시작했다. 뺨으로, 손등으로 황금색 비늘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도대체 용은 어떻게 잡아야하는 거지?
노련한 고수인 윤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봤던 판타지 소설 속에서는 드래곤은 심심하면 잡히고 드래곤 하트를 내놓는 존재였다. 이곳에서 드래곤은 신의 대리자로 불멸의 존재에 가깝다. 가끔 죽기는 했지만 인간이 아닌 같은 격인 신이나 용에게 죽었을 뿐이다. 청룡 이트라를 제외하면 죽은 이들이 있는 지도 알지 못했다.
이제 인간화가 거의 풀려서 거대한 용의 형상이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순식간에 변신하는 마법 소녀와 달리 모습을 변화시키는데 많은 시간과 힘이 소요되는 모양이었다.
-쾅!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윤과 아스탄은 고개를 돌릴 법 하지만, 가리온을 노려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요란스럽게 등장할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이 몸 등장!”
요정 율리히가 아혼의 목덜미를 끌고 들어왔다.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와 달리 아혼은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뺨을 구기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듯 보였다.
“음, 뭐냐.”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가리온이 잠시 변화를 멈추었다. 뺨에 금빛 비늘이 돋았고 귀는 뾰족했다. 비늘을 제하면 인간과 요정의 중간쯤 되는 모습이었다. 윤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 기습을 하면 먹힐까? 아스탄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몇 번이고 방심했다가 심장을 찔린 놈이기에 기습에 대한 방비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주신 벨라드의 대리자인 황룡 가리온이시여.”
율리히는 아혼을 한쪽으로 던져버린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뭐야 요정족 장로냐? 너도 저 놈들을 도울 생각은 아니겠지?”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저 이 비천한 요정이 위대하신 황룡께 감히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부디 주신 벨라드의 대리자이신 고귀한 황룡 가리온이시여, 저의 청을 가납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기름을 바른 듯 이어지는 율리히의 아부에 가리온은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이냐. 네게 말을 할 기회를 허락하지.”
“씨발. 좀 뒤지라고.”
율리히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가리온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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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웰님과 이 소설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헤헤헤. 오늘도 왔어요~!
드디어 100회입니다! 무려 한글파일로 53만자!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했어요...ㅠ.ㅠ.
정말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