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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푸른 불꽃은 모든 것을 살라 먹을 기세로 가리온의 몸을 불태웠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그가 눈을 부릅떴지만, 이미 몸이 반쯤 타들어 간 후였다. 몸이 녹아내려서인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름다운 얼굴도, 금실 같던 머리카락도 흉하게 타들어가서 눌어붙었다.
“심장을 찔러!”
율리히가 외쳤다. 윤은 재빠르게 칼날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검기를 실체화시킨 채 가리온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검기를 터뜨려서 마지막 타격을 입히는 걸 잊지 않았다. 제법 유효한 공격이었는지 가리온이 크게 휘청거렸다.
“튀어!”
율리히가 고함을 질렀다.
“일단 마당으로 가자!”
율리히는 아혼의 목덜미를 끌고 다시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아혼은 이제 완전히 겁에 질려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율리히는 아혼을 끌고 가는 게 힘든 건지 번쩍 들어서 제 어깨에 얹었다. 뒷모습만 봐선 마치 여인이 건장한 사내를 보쌈하는 듯 이질적인 광경이다. 윤과 아스탄 역시 율리히의 뒤를 좇아 빠르게 뛰었다.
마법으로 일으킨 화마는 점점 그 덩치를 불려갔다. 새파란 불에 의해 산채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둥이 허물어지고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누군가 빠져나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산채를 뛰어나오자마자 등 뒤로 불타는 나무가 무너지며 통로를 틀어막았다.
불길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뛰어온 세 사람과 한 요정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 무거워 뒤지는 줄 알았네.”
율리히는 아혼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아혼은 땅바닥을 몇 번 굴러야했다. 그 사이 흙이 입에 들어가자 크게 기침을 했다. 저 때문에 곤란을 겪는 아혼을 보고도 율리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고생해봐야 정신을 차리지.”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율리히. 저걸로 똥색 용이 죽을까?”
“그럴 리가 있냐.”
율리히가 한심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면박을 주었다.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윤은 좀 울컥했다. 그는 산채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나도 주옥 됐다. 진짜.”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
“됐어. 뭐, 이 정도 가지고… 라 말할 규모는 아니지만, 네가 나 때문에 손해 본 거도 많았으니 쌤쌤이 치자.”
“그거야 그렇지. 그럼 마음 편하게 먹을게.”
윤은 부정하지 않았다. 말을 취소할까 두려운 듯 냉큼 대답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아스탄을 걱정할 때와 달리, 율리히가 한 짓을 떠올린 윤은 죄책감이 싹 가셨다. 후련한 미소까지 절로 지어졌다.
“……너무 쉽게 수긍하니까 기분이 거시기한데?”
그간 윤에게 미안한 일을 많이 저질렀지만, 저렇게 순순히 수긍하자 왠지 기분이 나빴다. 율리히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가 한 짓을 돌이켜봐.”
사총사 시절, 그들은 각자 가진 개성이 대단했다.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튀어 다니던 친구들 덕분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이가 바로 윤이다. 윤은 이세계인이라는 특징을 제외하면 가장 정상인에 속할 정도였다. 사고를 치는 건 괜찮은데, 그들이 터뜨리는 장난의 피해는 항상 윤이 입었다.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를 당하기도 했고,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
기도 했다. 여장은 개중 가장 귀여운 장난이었다. 율리히가 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네. ……일단 너른 곳으로 왔으니 깔려 죽진 않겠다. 슬슬 놈이 되살아날 때도 되었는데.”
산채의 중심에 있는 공터엔 그들밖에 없었다. 산적들은 제 살길을 찾아 모두 도망간 지 오래다. 가리온에 대한 의리를 발휘하는 산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윤은 생각했다. 인기척도 내지 않고 방에 들어왔다고 목숨을 빼앗던 놈이다. 평소에도 제 부하들을 막 다뤘을 게 분명했다.
“저놈을 여기서 못 막으면…….”
“이 땅에 잔뜩 화가 난 재앙 덩어리가 떨어지겠지.”
아스탄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윤이 괴로운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예전엔 세상을 구한 용사였는데, 이제 세상을 멸망시킨 대마왕이 되게 생겼다. 백 년 후의 그란디아 역사서에 등극할 제 이름이 두려워졌다.
“용을 어떻게 죽인단 말이야. 적어도 내가 읽었던 판타지 소설 속에선 저렇게 되살아나지 않았다고.”
“기록에 따르면 분명 황룡 가리온은 청룡 이트라를 죽였어.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가 모른다는 게 제일 큰 문제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아혼이 울상을 지었다. 용을 죽인다니!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일에 휘말렸다는 건 분명했다. 절로 다리가 떨려서 서 있을 수 없었다. 아혼은 결국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은 채 좌절했다. 그러나 괴로워하던 것도 잠시였다. 살을 에는 기운에 아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아아아!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가장 먼저 들린 건 울부짖는 괴성이다. 불타오르던 산채가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 사이로 금빛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똥색 용이라 비하했지만 가리온의 실체를 본 순간 그런 표현은 쏙 들어갔다. 사슴의 뿔이 이마에 달려있었고, 기다란 목과 함께 거대한 몸체, 긴 꼬리까지 합치자, 그 덩치는 노스트라드 라덴 성 본관보다도 컸다.
분명 타락한 신임에도 불구하고 가리온은 아름다웠다. 금을 녹인 듯 찬란한 색의 날개가 허공에 좍 펼쳐졌다. 커다란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땅을 후려치자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미친.”
율리히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어마어마한 드래곤 피어에 절로 무릎이 꿇리려는 걸 참아내었다. 지금도 등골이 오싹거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황룡 가리온은 분노했다. 비록 인간의 형을 취하고 있었다고 하나 신격을 지닌 몸이었다. 벌레나 다름없이 여기던 존재들에게 몇 번이고 살해당했다. 게다가 율리히의 마지막 공격은 그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완전히 제 모습으로 돌아온 가리온에게 인간들은 손가락보다 작은 크기였다.
저런 이들에게 내가 죽임을 당했단 말인가!
더욱 분노한 가리온은 앞발을 들어 땅을 내리쳤다. 땅이 흔들거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이 가해졌다. 순간 균형을 잃은 윤이 비틀거리자, 아스탄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후폭풍으로 몰아친 거센 바람에 윤의 머리카락은 또다시 엉망이 되었다.
“저걸 어떻게 상대하란 말이야.”
윤은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을 대강 쓸어 넘기며 질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리온을 만날 땐 언제나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에 본체를 본 건 처음이었다. 저렇게 어마어마한 크기인 줄 알았으면 용가리라고 놀리지도 않았을 거다.
“율리히. 무,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해결책이 있긴 해.”
율리히가 아혼을 돌아보았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리온과 시선을 마주친 아혼이 완전히 겁에 질렸다. 윤을 대하던 장난스러운 모습과 달리, 저를 쳐다보는 요정의 얼굴에선 온기를 찾을 수 없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율리히가 아혼과 시선을 마주했다.
“댁도 이제 꿈에서 깨주지 않으실래요? 이제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아요?”
“……예?”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아혼이 눈을 끔뻑거렸다. 율리히가 이마를 짚은 채 고뇌의 한숨을 내쉬었다.
“흠, 이래도 안 튀어나온단 말이지. 역시 죽을 위기에 처해야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시려나?”
율리히는 결심한 듯 스태프를 소환했다. 그리고 역수로 쥔 채 아혼을 겨냥했다. 날카로운 스태프의 끝이 어지럽게 반짝거렸다. 마치 아혼의 심장을 찌를 것처럼 보였다. 저 요정은 자신을 죽일 속셈인 것 같았다. 히익! 소리를 내며 아혼이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노골적으로 피어오르는 살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일어나서 도망쳐야하는데 앞은 미친 요정이고, 뒤는 거대한 용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지배를 떠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호오, 이제 너희끼리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가리온은 생각지 못한 내분에 눈을 가늘게 떴다. 곧장 자신의 앞발로 저 버러지들을 쓸어버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 발버둥이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았다. 이 여흥을 즐기기로 했다.
“야, 율리히! 지금 뭐하는 거야? 애꿎은 사람을 공격하지 마! 빨리 게이트를 열어서 도망이나 시키라고!”
윤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비록 율리히를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그 심성이 악독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그랬다면 친구 사이를 유지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율리히가 아혼을 공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상황에 휘말린 불쌍한 피해자였다.
“진짜 고의는 아닙니다. 미안요.”
율리히가 아혼을 향해 정말 스태프를 찔러 넣었다. 아혼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제게 쇄도하는 창끝을 보았다. 당황한 윤이 율리히를 막기 위해 달려왔다.
아혼은 두근거리는 제 심장을 붙잡았다. 여경을 아직 안전한 곳에 두지 못하였는데…. 결국 떠오른 건 제 목숨보다 여경의 걱정이다.
‘여경 아가씨…….’
인생의 끝에 서면 주마등처럼 지난 삶이 지나간다더니 수많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을 버린 친부모의 얼굴이, 제 자식처럼 기른 양부모의 다정함이 스쳐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여경의 미소였다. 아혼의 의식이 흐려졌다.
율리히의 창이 아혼의 가슴에 꽂히기 직전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가리온의 살기가 파묻힐 정도다. 달려오던 윤이 멈칫했다.
아혼을 공격하려던 율리히의 창끝이 바스라졌다. 그 단단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스릴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간신히 율리히의 팔을 붙잡는데 성공한 윤도 이 기이한 광경에 멈칫했다.
“……젊은 요정족 장로여. 그만해도 될 것 같군.”
아혼의 몸에서부터 찬란한 오로라가 새어나왔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율리히를 보며 미소 지었다. 가리온의 흉흉한 살기와 달리 아혼에게선 형용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아혼이 아니다. 그의 탈을 쓴 무언가다. 강신(降神)이라 하기엔 처음부터 그 몸을 쓰고 있었던 것처럼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위급 상황이라.”
율리히는 스태프를 거둔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대신, 벨라드시여.”
아혼, 아니 주신 벨라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튜란토트님과 이 글을 읽고 추천과 코멘트를 남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요즘 주기가 엉망이던 제가 오늘도 왔습니다. 에고님의 알흠다운 표지와 여러분의 덧글에 신났거든요. 하하하! 완결날 때까지 꾸준하게 일일 연재를 하고 싶어요 >_<
보면 아시다시피 사총사 중 윤이 가장 정상인입니다.
ex) 마을을 약탈하는 도적떼가 나타났습니다. 사총사의 반응은?
월스턴 : 와~ 도적퇴치, 내가 가출할 때 하고싶던 거였어!
안즈마네 : 피의 복수다! 처단하자! (아직 아무 일도 겪지 않았음.)
율리히 : 거기 털면 고기 먹을 수 있냐? 그럼 갈래!
윤 : 얘들아 진정해 ㅠㅠ......
영고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