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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니 시기 적절한 때에 깨워주었구나, 요정의 아이야. 그대의 무례는 탓하지 않겠다. ……확실히 위급 상황이긴 하군.”
벨라드는 고개를 들어 제 아들을 쳐다보았다. 완전히 타락하여 미쳐버린 가리온을 보는 주신의 표정에 잠시 씁쓸함이 스쳐지나갔다. 위대한 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을 익애하는 마음은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나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는지 가르쳐줄 수 있느냐?”
“이름에서부터 당신이 평범한 자가 아니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혼은 아벨라르 대륙의 고대어로 종교적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때는 신이라 불리던 이가 벨라드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본인은 차대륙식으로 지었다고 여겼겠지만, 아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게다가 눈이 지나치게 좋아져서요.”
벨라드는 이내 율리히에게 흥미를 잃은 듯 가리온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가리온이 큰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익숙한 기운의 정체를 믿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고, 자식들이 애타게 매달려도 나타나지 않던 부친이었다. 지금에서야 나타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선량하고 다정한 기운이 벨라드라고 알려준다.
“가리온.”
[이게 누구야, 몇 만 년 만에 뵙는 아버지 아닙니까.]
가리온이 빈정거렸다. 거대한 몸에서 새어나오는 음성은 천둥과도 같아서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 윤은 귀를 틀어막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 그 위를 덮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스탄이었다.
아스탄은 굳은 표정으로 아혼, 아니 벨라드와 가리온을 번갈아보았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도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긴 믿기 힘들 것이다. 차대륙 출신의 평범한 호위무사라고 생각했던 이의 정체가 주신이라니. 무슨 양파를 까는 것도 아니고 자꾸만 밝혀지는 진실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우리를 버리고 모습을 감추시더니, 인간 놀이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벨라드는 가리온의 빈정거림에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글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허나 고의는 아니었단다.”
이 땅의 주신 벨라드는 유일하게 남은 거인신이라 주신이라 불렸을 뿐,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거대한 세상을 돌아보기에 힘에 부친 그가 자신을 보필할 열 명의 대신과 네 신룡을 낳았는데 그것이 실수였다.
벨라드는 점점 제 힘에 이상이 생기는 걸 눈치 챘다. 권능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쪼개어져서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나누어준 힘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정의의 여신 하니스트가 장님으로 태어났을 때였다. 신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존재다. 모든 생명체의 모태가 되는 존재가 앞을 볼 수 없다니. 이는 분명 잘못된 일로, 완벽한 신을 낳지 못할 만큼 그는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다.
벨라드는 천천히 제 자식들을 돌아보았다. 욕심이 많은 북풍의 윈디아, 호전적인 전쟁과 불화의 여신 규리,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가리온은 결코 자신이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을 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다시 주신이 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질 터였고, 세상은 끔찍한 화마에 휘말릴 것이다. 그는 세상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거인신들을 기억하였다. 신조차 괴로움에 울부짖던 시대였다.
그리하여 벨라드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모습을 감추기로 한 것이다. 힘을 회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몸을 숨기며 후일을 도모했다. 비록 세상은 잠시나마 혼란에 휩싸일 테지만, 이내 정상 궤도를 되찾을 것이다.
예상대로 그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자 신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벨라드를 대신해 세상을 꾸려나갔다. 물론 약간의 다툼은 있었지만,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는 제 아버지를 의식해서인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신위를 되찾기 위해 수십 수만 번의 삶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 삶이 바로 아혼이었다.
이 삶을 무사히 끝내면 벨라드는 신위를 완전히 회복하게 된다. 율리히가 그의 정체를 엿볼 수 있었던 것도 힘이 회복된 덕분이었다.
[뭡니까? 날 죽이려고 하겠다는 겁니까? 그 몸으로?]
가리온은 바로 벨라드의 상태를 눈치 채었다. 자신이 알던 절대적 위엄을 지닌 대신이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상대할만하다. 그는 혀를 날름거렸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그리하여야겠지.”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리온이 크게 웃으며 땅을 후려쳤다. 지진이 일어나는 듯 땅이 위아래로 진동했다. 평범한 사람은 추풍낙엽처럼 스러져나갈 거센 바람에도 벨라드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약해진 몸으로 가능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못할 거라 생각하느냐?”
벨라드가 도발하듯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오색찬란한 빛깔로 반짝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가리온의 몸을 짓눌렀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제 아비에게 인사하듯 목이 꺾였다. 그를 둘러싼 율리히와 윤, 아스탄은 전혀 느낄 수 없는 무형의 힘이었다.
“비록 인간의 몸을 쓰고 있어서 힘이 줄어들었다하나 버릇없는 자식을 혼내줄 정도로는 충분하단다.”
거대한 용이 짜부라지듯 바닥에 처박혔다. 간신히 앞발로 바닥을 긁으며 제 아버지를 공격하려 들었지만 쉽지 않았다. 가리온의 몸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거체로 움직일 수 없으니 인간의 몸으로 상대할 요량인 듯 했다.
가리온은 반항을 하듯 마법을 난사했다. 거대한 불덩이들이 하늘에서부터 생겨나더니 바닥을 향해 내리 꽂혔다. 초월자가 간신히 구사할 수 있는 메테오를 아무렇게나 구사했다. 율리히 역시 마법을 부리며 실드를 쳤지만, 공격 두어 번에 깨져나가길 반복했다.
순간 불덩이 하나가 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리꽂혔다.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돌조각과 불덩이를 피하는 건 초월자도 쉽지 않았다. 커다란 돌조각이 바닥에 부딪혔다가 튕겨 나오며 윤의 등을 향해 쇄도했다. 평소였다면 피했을 테지만, 마나를 봉인한 탓에 반응이 조금 느렸다. 그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윤! 위험하다!”
인식한 순간 거대한 파편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윤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아스탄이 반사적으로 윤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자신이 대신 돌에 맞았다.
“아스?”
윤은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벌떡 일으켜 품안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보호받은 덕분에 바닥을 조금 구른 것을 제외하면 상처하나 없었다. 그러나 아스탄의 상태는 심각했다. 관자놀이에서부터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 상처에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밑에 깔린 윤의 옷을 적셨다.
아스탄은 머리를 맞은 충격에 정신을 잃은 듯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의 무게가 고스란히 윤에게 전해졌다. 마나로 보호했다고 하나 튕겨 나오는 돌에 머리를 맞았다. 기절한 정도로 끝나면 다행일 것이다.
윤이 다급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아스탄을 바른 자세로 눕혔다. 의식 잃은 사람을 깨운답시고 마구 흔드는 우를 저지르지 않았다. 제 옷에서 가장 깨끗한 부분을 찢어내 아스탄의 이마를 눌러 지혈했다.
[크읏! 빌어먹을! 당장 이 힘을 거두란 말입니다! 하찮은 인간 따위를 죽인 게 무에가 잘못이라고 나를 벌하는 겁니까?]
“말하였지 않느냐. 가리온.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가리온이 다른 공격을 난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 벨라드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듯 마법을 구사하지 못했다. 우아한 거체는 형편없이 바닥에 짓눌려져 있다. 그는 발톱 하나 꼼짝 못했다.
윤은 입술을 깨물며 가리온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기미가 보이면 아스탄을 끌어안고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는데, 다행히 아스탄이 정신을 차렸다. 고통스러운 듯 눈썹을 움찔거렸다. 천천히 그가 눈을 뜬다. 붉은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명료한 이성을 되찾았다.
“……아스.”
윤은 그만 상황의 급박함도 잊고 그의 목에 매달릴 뻔했다.
“임마, 위험하게 왜 그랬어?”
솔직하지 못한 태도로 그를 타박했다. 실은 괜찮으냐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마치 울 것 같은 얼굴로 마구 잔소리를 퍼붓는 모습을 보며 아스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상처가 아픈 듯 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으니까.”
아스탄은 그리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윤을 구하게 되면, 자신이 위험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눈앞의 청년을 제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될 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붙잡고 싶은 이였다.
“난 어차피 오래 못……. 이 아니라, 나도 피할 수 있었다고?”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건 충분히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너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그리 한 것이고. 고맙다는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타박은 그만두도록 해.”
아스탄이 이마를 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천을 흠뻑 적시고 밖으로 흘러넘쳤다. 자꾸 눈가로 피가 고여서 한쪽 시야가 흐렸다.
“윤! 어이 레…… 아니 황태자! 괜찮아?”
사방으로 쏟아지던 마법이 그치자 율리히가 다급히 뛰어왔다. 그가 상처를 살피더니 혀를 쯧 찼다.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파르메나의 신관이 아니라면, 누구도 상처를 완벽하게 낫게 만들지 못했다.
“상처가 너무 깊어 마법으로 치유하는 건 임시방편 밖에 되지 못해. 조금만 움직여도 도로 터져서 피가 줄줄 흐를 거라고?”
“벨라드도 홀로 가리온을 감당해낼 수 없는 듯 보이니, 마냥 쓰러져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부디 본인에게 당신의 힘을 빌려주오. 요정의 장로여.”
아스탄의 정중한 요청에 율리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부라고 부르라니까. 그는 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만 투덜투덜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스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힐링!”
율리히의 손에서 흰 빛이 새어나왔다. 상처를 쓰다듬자 이마로 흘러내리던 피가 멎었다. 놀랄만큼 간단한 시동어에 윤이 눈을 깜빡였다. 그럼 이제껏 외쳤던 괴상한 시동어들은 무어란 말인가. 머리를 자라나게 하는 건 상처 치유보다 하위 마법이었다.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율리히는 초월자로 복잡한 마법 주문 따윈 필요 없었다. 이제껏 외친 그 쓸데없는 주문은 그저 악취미인 것이다.
벨라드와 가리온의 대치는 계속되었다.
“내가 비록 너희들에게 쉬이 죽지 않는 불사를 선물했다하나, 정녕 너희들이 돌이킬 수 없을 때를 대비하지 않았다고 보느냐? 역린을 아느냐? 거꾸로 난 비늘. 그곳에 너희들의 약점이지 않느냐.”
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가리온을 보았다. 벨라드의 말 대로 가리온의 목에 난 비늘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치명적인 약점은 오색크리스탈처럼 반짝거렸는데 마치 과녁처럼 보였다.
“이정도면 신을 살해할 무기로 충분하겠지.”
벨라드가 바닥을 뒹구는 활을 집어 들었다. 활은 조악한 솜씨로 만든 나무로 만들었는데, 주신의 권능을 불어넣자 화려하고 아름다운 상아로 변했다. 화려한 양각 세공이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았다.
[정녕 나를 죽이겠다는 겁니까? 아버지? 나를 낳은 건 당신입니다!]
활에서 흘러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가리온은 덜컥 겁을 먹었다. 제 아버지는 정녕 자신을 죽일 속셈이었다.
죽음의 순간에선 신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가리온이 마구 발버둥 쳤다. 그의 몸부림에 버티는 것도 힘들만큼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안타깝게도 너를 죽이는 건 나는 아니란다. 누군가 본인이 만든 쓰레기는 스스로 치워야한다고 원망했지만 말이다.”
벨라드가 웃으며 하는 말에 윤은 속으로 뜨끔했다. 고개를 돌린 벨라드가 윤을 보았다.
“내 아들이 저지른 짓에 휘말린 불쌍하고 어린 청년이여.”
“……어리지는 않습니다만.”
“내게는 모두 어린아이란다.”
벨라드가 자애롭게 눈을 휘었다. 이제껏 그를 원망해왔는데, 마치 어머니의 품속에 안긴 듯 다정하고 따뜻한 기운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너에게 미안한 부분이 많구나. 하지만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되겠느냐.”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요.”
“부디 가리온을 죽여 다오.”
벨라드가 윤에게 활을 내밀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완결까지 나전보를 완성했습니다. 이제 연재하는 일만 남았네요.... 기분이 참 이상하네요
아혼은 실제로 종교 지도자를 일컫는 외국 말이랍니다. 이 단어를 본 순간 올타쿠나! 싶었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