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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106화 (10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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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나의 전생 보고서.

아스탄의 집무실에서 초조하게 서류를 처리하던 제르센은 고개를 들어 목을 주물렀다. 벌써 두 사람이 떠난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그간 소식이 없어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용의 계곡은 마력장의 흐름이 불규칙해서 통신용 마도구도 사용할 수 없었다.

소식을 안다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나, 손 놓고 소식만 기다려야 한다는 건 무척 고통스러웠다.

제르센은 황태자와 윤, 단 두 사람이 용의 계곡으로 떠나는 걸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무리 초월자라 할지라도 변수가 많은 지역이었다. 차라리 병사들을 많이 이끌고 떠났더라면 이처럼 걱정되지 않았을 터였다.

“제르센 경. 왜 그리 표정이 구겨진 종이쪽 같으십니까.”

딘넬 백작, 미하엘이 빙글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제 주군에 대한 걱정은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매끈한 얼굴에 제르센이 울컥했다.

“딘넬 백작께선 속이 참 편하신 건가 봅니다! 얼굴이 참으로 보기 좋으십니다!”

“네? 무엇이요?”

날카로운 비난에 미하엘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스타시온 전하의 용태가 걱정도 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드 마스터가 둘입니다. 쉽게 당할 리 있겠습니까.”

제르센의 타박에도 미하엘은 태평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제르센은 가슴을 두드렸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모두 저런 인간들인가. 예전부터 그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물론 깐깐한 제르센과 상성이 맞는 이들은 드물었다.

“무어, 금방 돌아오시겠지요. 공간 이동의 목걸이도 가져가셨으니, 황룡만 만나면 금방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미하엘이 제르센의 곁에 다가가 섰다. 어깨너머로 그가 분류한 서류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결재해줄 사람이 없으니, 열심히 일 해봤자 무용인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이 샌님에게 바깥바람이나 집어 넣어주어야겠다. 미하엘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주군이 계시지 않으면 게으름을 피울법한데 여전히 부지런하시군요. 제르센 경.”

“……보좌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셔서 클럽하우스에서 한 잔 어떻습니까?”

미하엘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건네는 유혹에 제르센은 솔깃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하엘은 유일한 동년배였고, 그나마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간 다른 귀족들과 친교를 나누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족 가문의 후계에겐 친교를 나누는 행위도 일이다.

“그럼, 한 시간 후까지 모든 준비를…….”

제르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우우웅.

집무실의 벽에서 문이 생겨났다. 요정의 숲에서나 핀다는 달맞이꽃이 아름답게 세공된 문이다.

“설마?”

제르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하엘 역시 낯선 문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는 “오늘은 놀기 텄네.” 하고 귀족답지 않은 말을 투덜거리며 제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고 피로가 역력한 표정의 아스탄과 윤이 나타났다. 요정의 숲에서 옷을 갈아입고 씻기는 하였으나, 여독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전하, 무탈하셨나이까?”

제르센은 반사적으로 아스탄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황룡의 인장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어찌 된 일인가. 자연 제르센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그리 실망할 표정 지을 것 없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니, 아니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니 걱정은 덜도록 해.”

속내를 들킨 제르센이 뜨끔했다.

“우선 4대 공작들을 소환하지. 모두 센트리움에 머물고 있나?”

“예.”

“전령을 보내어 긴급히 그들을 소환하겠다고 전하라. ……황태자 아스타시온의 명이다.”

아스탄이 돌아섰다.

미하엘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오늘은 꼼짝없이 철야로군. 그러나 그의 표정은 밝았다.

아스탄은 곧장 4대 공가 중 세 공작을 소환했다. 노스트라드 공작은 이레인을 후계로 삼았다하나, 그는 너무 어려서 제외했다. 여독을 풀지도 않고, 몸단장만 한 채 그들의 앞에 섰다.

“제국의 검,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황가의 수호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자식 터울의 황태자를 향해 공작들은 자연스럽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황제가 원인 모를 병으로 와병한 지금, 권력은 자연스럽게 황태자에게 이양되었다. 황자가 한 명 더 있으나, 그는 황태자의 보호 아래 있으며 가진 힘 또한 미약했다. 세 공작은 우선 몸을 웅크리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불러내어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아스탄은 그리 말하면서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부름에 응하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황태자께서 저희를 찾으시니 당연한 일입니다. 고귀하신 분께서 귀환하셨는데, 어찌 집에서 한가로이 시간이나 보내겠습니까.”

사우스클라인 공작이 매끄럽게 답했다. 이미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은 시각이었다. 모두 퇴청하여 타운하우스에서 쉬고 있던 이들을 불러 모은 행동을 돌려 지적했다.

“용의 계곡으로 가셨다 들었는데 무탈하신 모습에 시름을 덜었습니다. 게다가 성취 또한 있으셨군요.”

그란디아에 존재하는 유일한 매직 마스터인 웨스트올로 공작이 호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오로지 마법에만 미쳐있었으며, 권력 싸움엔 관심이 없었다. 유일하게 아스탄에게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웨스트올로 공작은 그저 아스탄이 초월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보였다. 고작 일주일을 떠났을 뿐인데, 황태자는 더욱 위험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고작 약관의 나이로 설명할 수 없는 위엄과 연륜을 몸에 둘렀다. 게다가 무력까지 갖춘 그는 만만치 않은 지배자가 될 터였다.

“그렇소.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 이는 그란디아에 큰 홍복이 될 것이오.”

아스탄은 손을 들어 탁자에 얹었다. 세 공작은 조심스럽게 손등을 살폈다. 축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전하. 황룡의 인장을 받지 못하신 겝니까?”

사우스클라인 공작이 물었다.

“정확히 말하지. 받지 않은 거요.”

“허나 렉스 그랑드에 따르면 황룡의 인장을 받은 자만이 황위에 오를 수 있다고 명문화되어있습니다. 대법전을 어기실 생각입니까?”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먹잇감을 앞둔 승냥이처럼 날카롭게 지적했다. 아직 연회에서 애비가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저주의 반동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라 자업자득이었으나, 유일한 혈육을 잃어버린 공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렉스 그랑드를 본인이 고치겠다고 하면?”

“말도 안 됩니다!”

사우스클라인 공작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아스탄은 기다렸다는 듯 반격을 시작했다.

“공작들 역시 제국의 시작을 기억할 거요. 시황제 월스턴께서 우연히 황룡과 연이 닿아서 축성을 받았지. 어째서 렉스 그랑드에 축복을 받은 자만이 황위에 오를 수 있다고 제정한 거요? 황룡 가리온이 우리에게 축성을 내렸기에 그리되었지, 법이 제정되고 나서 축복을 받은 게 아니오. 일의 선후를 착각한 게 아니오?”

아스탄의 차갑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언성이 높아지지 않았음에도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가리온은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을 것이오.”

“……황룡의 축복을 받지 못한 황제를, 어찌 신민들이 받아들이겠나이까.”

웨스트올로 공작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40대 초반의 나이로 뵈는 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이렇게 황태자가 강하게 나온 이유는, 무언가 비책을 찾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대신 축복보다 더 위대한 것을 가져왔지.”

아스탄은 기다렸다는 듯 가리온의 심장을 내밀었다. 주먹만 한 크기로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는 금빛 보석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그마한 보석은 엄청난 힘을 속에 품고 있었다. 마나에 무지한 이스트민스트 공작마저 느낄 수 있었다. 마법사인 웨스트올로 공작은 홀린 듯 보석을 손을 뻗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 이게 뭡니까.”

웨스트올로 공작은 당황한 마음에 말까지 더듬었다.

“바로 황룡의 심장이오.”

세 공작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스탄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제르센과 미하엘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심장을 나눠준 거요. 언젠가 끝날지 모르는 축복 대신 영원한 신물을 들고 왔지. 앞으로 그란디아는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게 않겠소?”

아스탄이 싱긋 웃었다.

“귀공들은 모두 그란디아의 미래를 모두 걱정하는, 참으로 훌륭한 이들이오. 그러니 렉스 그랑드의 개정에 도움을 줄 거라고 믿소.”

세 공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심장을 내놓았다면 이런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을 터였다. 다짜고짜 렉스 그랑드를 개정하겠다고 말해 반발을 유도했다. 그 후 공작들의 주장에 맞설 증거를 내놓았다. 축성보다 더 변함없을 증거를 가져왔는데 계속해서 반대할 순 없었다.

“……예, 전하.”

요청의 말이었으나, 강요나 다름없다. 이를 반대한다면 그란디아의 영광을 방해하는 역적으로 몰릴 터였다. 아스탄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스트민스트 공작은 이를 갈았으나 고개를 숙여서 명을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성심으로 따르겠나이다.”

세 공작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준비하던 일은 잘 끝났어?”

아스탄의 방에서 목도리와 놀아주던 윤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아스탄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확실히 마나를 봉인한 탓에 기감이 둔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복도를 걸어온 순간 누구였는지 눈치챘으리라.

마나를 최대한 느낄 수 없도록 봉인했지만, 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벨라드가 평소처럼 지낼 수 있도록 연장해준 시간은 고작 일주일. 가리온을 상대하며 마나를 쓰지만 않았더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윤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기도 했다.

“음. 그럭저럭 끝났다.”

아스탄은 망토를 벗어 제르센에게 내밀었다.

“제르센,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곁을 지키겠나이다.”

“미하엘과 친목을 다지기로 하지 않았나. 가보도록 해.”

아스탄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제 주군이 돌아오기 직전에 나눈 대화를 어찌 아신단 말인가. 제르센은 놀랐으나 내색치 않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거부해봤자, 아스탄의 명은 거두어지지 않을 터였다. 저 이방인이 있을 때는 늘 사람을 물렸다. 가끔은 수신 호위조차 방 밖으로 나가라 할 정도다.

제르센은 힐끔 윤을 쳐다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는 청년인 듯 보이나, 간간히 그가 내어놓는 혜안은 사람의 허를 찌른다. 게다가 20대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며 외양 또한 훌륭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제 주군을 재울 수 있는 유일한 이였다. 그러나 제르센은 슬펐다.

“제르센 경, 할 말 있어?”

“아닙니다. 클레먼스 변경백.”

당신은 왜 남자인 겁니까? 제르센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아스탄의 성격에 연인을 여럿이 가질 성품은 아니었다. 단순히 아이를 얻기 위해 사람을 취할 이도 아니었다. 황후 이델라가 속앓이를 하던 걸 지켜봤다.

7황자를 이레인을 노스트라드 공작으로 삼은 이유는 어쩌면… 제르센은 눈을 부릅떴다. 결코 그것만은 안 된다! 동시에 제 주군이 그리 할지도 모른다고 납득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혹 위중한 일이 있으시다면 전령을 보내시옵소서.”

“그리하지. 수고했다.”

제르센은 뒷걸음질 쳐서 방을 나갔다.

“……이상하네.”

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이 이상한 거냐.”

아스탄은 옷을 편하게 풀러 두고, 비스듬하게 누운 채 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윤도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아스탄은 본디 의자가 아닌 곳에는 앉지 않았는데, 바닥에 뒹구는 걸 좋아하는 윤 덕분에 그도 물들었다. 덕분에 벽난로 바로 앞에는 푹신한 카페트가 깔리게 되었다. 바로 윤의 지정석이다.

“아니 제르센 경 말이야. 표정이 좀.”

“왜, 너를 향해 적의라도 보이더냐.”

“그건 아냐. 오히려 그때는 귀여웠고. 지금은… 좀 슬퍼 보여서. 왜지? 내가 첫사랑이라도 닮았나?”

아스탄이 픽 웃었다. 그는 제르센의 고뇌를 눈치챘다.

윤의 손가락을 물고 핥던 목도리가 아르릉거리며 아스탄을 경계했다. 저 금발 남자는 항상 자신의 인간을 뺏어갔다. 이번에도 자신과 놀아주던 흑발 인간의 관심이 저자에게 모두 쏠리지 않은가. 털을 바짝 세운 채 캥캥거리는 새끼 여우를 보며 아스탄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네 녀석은 이거나 가지고 놀도록 해.”

아스탄은 상자에서 모형 쥐 인형을 꺼냈다. 미하엘이 선물한 것으로 “고양이용 장난감입니다. 야생성을 기르는 데 이거만 한 게 없다더군요.” 하고 말했다. 윤의 애완동물은 여우라고 말했지만, “생김새는 거기서 거기지 않습니까.” 하고 넉살 좋게 그에게 떠넘겼다. 쥐 인형을 본 목도리가 흥미를 보였다.

인형을 몇 번 흔들어 보인 후 저 멀리 던져버렸다. 목도리가 쏜살같이 쫓아갔다. 이로 물자 뾱!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물어뜯었다가 발로 밟으며 장난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뭐야, 저 녀석 아주 고양이가 다 되었잖아.”

“미하엘이 잘 통할 거라 그리 자신하더니, 녀석의 말이 옳았군.”

윤이 아하하 웃으며 아스탄에게 몸을 기댔다. 아스탄이 윤을 꽉 끌어안았다. 자신의 온기가 남김없이 전해지길 바랐다. 윤은 남자의 가슴팍에 가만히 고개를 가져다 댔다.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힘찬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어떤 의자보다 안락했으며 든든했다. 영원히 기대어 있고 싶었다.

이 온기를 기억하려는 듯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에게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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