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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나의 전생 보고서.
“그러니까, 정해윤. 니가 판타지 세계에 다녀왔다고?”
현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제 친우에게 들은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놈이 자살시도를 했고, 그 영향으로 판타지 세계에 가서 모험을 떠났다. 드래곤도 만나고, 커다란 제국의 공작도 되었다고 한다. 결국 친구의 아들에게 죽으며 끝을 맺었지만, 환상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실제 소설이었다면 작가는 돌 깨나 맞았을 터였다.
“……응. 맞아.”
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윤의 집에서 단둘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있었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지만 애인 없는 사내 놈 둘이라 분위기는 우중충했다. 술이 술술 들어가고 속내가 나올 무렵, 윤은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현일은 다시 한 번 “헐.”하고 중얼거렸다. 거짓말이라 치부하기엔 윤의 표정이 절박했다. 거짓말이라고 부정하진 못하겠는데, 믿기도 힘들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술이나 마시자.’
현일이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현일이 맥주 캔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야, 잠깐. 니가 그쪽 세계에 간 게 자살 시도를 해서라고?”
고2 겨울 방학 때쯤, 윤이 며칠간 잠수를 탄 적이 있었다. 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현오 형이 ‘남자는 동굴에 들어갈 때가 있는 거야. 생각할 시간을 줘라.’하고 말려서 집에 찾아가지 않았는데 그게 실은 자살 시도를 해서였다니. 역시 검도를 할 때 빼곤 쓸모없는 인간이다. 집에 가면 제 형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차주겠다고 결심했다.
“……어, 그게 말이야. 현일아.”
윤이 우물쭈물했다. 현일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일단 한 대 맞자.”
현일은 세게 꿀밤을 때렸다. 따악!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타격은 초월자의 몸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윤이 이마를 싸매고 끙끙거렸다.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보며 현일이 낄낄거렸다.
“그럼 이제 용서해주는 거야?”
“생각해보고.”
현일이 캔을 따며 말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러고 보니 너희 부모님 묘소에 간 지 오래되었네.”
“나는 추석에 다녀왔는데…. 새해에 같이 갈래?”
“그래.”
현일은 윤이 겪은 일에 관해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윤도 현일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었더라도 미친 사람의 망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그저 심장을 바늘처럼 찌르던 비밀을 털어내서 후련한 심정만이 남았다.
“야, 근데 너 거기서 50년이나 살았다면서.”
“……응.”
“결혼은 안 했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이거 완전 노총각을 넘어서서 노할배 아니야. 야! 좀 따 클럽이나 가자! 오늘 같은 날 놀러 가야지.”
현일이 신나서 외쳤다.
“이 형님의 귀신같은 솜씨를 보여주마!”
소맥을 섞어 마시던 현일은 윤보다 먼저 나가떨어졌다. 윤은 이를 박박 갈며, 자신보다 덩치 큰 현일을 식탁에서부터 질질 끌고 와서 거실 소파에 집어 던지듯 눕혔다. 3인용 긴 소파인데 현일의 발이 비죽 튀어나온다. 저 크고 무거운 녀석을 침대에 눕혀줄 의리는 없었다.
혹여 감기에 걸릴까 난방을 든든하게 올린 뒤 이불을 가져왔다. 현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은 방에 들어가서 자려는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힘들었지. 보고 싶었어, 윤.”
윤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현일은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하기엔 너무 또렷한 목소리였다. 윤은 홀로 울며 웃었다.
윤은 멍하니 캠퍼스를 거닐었다. 시간표를 잘못 짠 탓에 월요일엔 공강만 세 시간이다. 뭘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만큼 좋은 방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겨우 수업 두 개를 듣기 위해서 월요일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수업 하나를 들었다. 이후엔 체육관이나 과방에서 서너 시간을 빈둥거리다가 나머지 수업을 듣고 집에 가는 생활이 반복되자 무던한 윤도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드랍할까.’
윤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직 개강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한 학기 내내 이렇게 고생하느니 빠르게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벌써 그란디아에서 현실로 돌아온 지 반년이 지났다. 처음 돌아왔을 때보다 허무함은 더욱 컸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부분도 많았다. 그는 더 이상 배신감과 슬픔에 몸부림치지 않았다.
“이번엔 네가 기다려다오. ……반드시 내가 갈 터이니.”
강하게 어깨를 부여잡은 손길. 절박하게 약속을 맹세하던 붉은 눈동자. 윤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나처럼 백년 후에 이곳에 오진 않겠지. 아예 신빙성 없는 가정이 아니라서 무서워졌다. 에비, 에비. 부정 탈라. 윤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
오늘 서울 쪽으로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처럼 하늘이 흐렸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회색 구름이 무겁다. 우중충한 날씨를 보니 더욱 집에 가고 싶어졌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현일이었다. 그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었다. 본인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다고 했겠지만, 윤의 기감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현일아. 안녕.”
귀신같이 돌아선 윤이 현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헤드록을 걸려는 듯 팔을 뻗던 현일이 뻘쭘하게 멈춰 섰다.
“망할 놈. 어떻게 단 한 번을 당하질 않냐.”
“그렇게 기척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저보다 한 뼘은 큰 현일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나마 현일이 이곳에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언제나 고맙고 미안한 친구였다.
“고맙다. 김현일.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윤은 울컥 치받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너 뭐 잘못 먹었어? 점심에 학식이 문제였냐? 난 괜찮았는데?”
현일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눈썹을 찡그리며 제 팔을 벅벅 긁었다. 솔직히 저도 낯이 간지러운 말이긴 했지만 저런 반응에 기분이 나빠졌다. 윤은 짜증을 내며 현일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악!”
현일이 비명을 질렀다.
“칭찬을 해줘도 넌.”
“누가 그렇게 간지럽게 말하라고 했냐?”
“진짜 짜증나!”
두 사람은 길 위에서 마구 아옹다옹했다. 지나다니던 후배들이 미소를 띤 채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항복! 항보오옥!”
윤의 날쌘 잽을 이리저리 피하던 현일이 헉헉거리며 양손을 들었다.
“이건 맞아라.”
현일의 배에 주먹이 가볍게 꽂혔다. 배에 왕(王)자까지 잡혀있는 주제에 아프다고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종아리를 한 번 더 걷어찼다. 현일이 잘생긴 얼굴을 짜부라트리며 툴툴 거렸다.
“너 이렇게 못되게 굴면, 체대 훈남 자리는 그 외국 놈한테 뺏긴다.”
“……외국 놈?”
낯선 호칭에 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 학기부터 사체과에 교환 학생이 왔다더라. 검도 특기생이라던데 엄청 잘생겼다고 애들 완전 난리야. 이름이 되게 특이하던데, 아스…. 아스 뭐더라….”
현일은 기억을 더듬는 듯 버릇처럼 콧잔등을 찌푸렸다. 낯익은 별명에 윤의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이내 생각난 듯 그가 손바닥으로 주먹을 쳤다.
“아! 그래 아스트리드! 남자 놈이 뭔 그런 낯간지러운 이름이야.”
“‥‥그래?”
교환 학생이 아스탄인 줄 알았다. 그럴 일 없을 텐데, 슬슬 자신도 기다림에 미쳐가나 보다. 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야 표정이 왜 그렇게 구지냐. 오늘 저녁에 한 잔?”
“됐어. 집에 가서 쉴래.”
“이게 형님이 걱정을 해줘도!”
“하이고, 형님은 무슨. 동생이지.”
현일이 울컥했다.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는 안 놀아줄 거야. 혼자 버림받아서 집에서 쓸쓸하게 방바닥이나 긁어라!”
“누가 할 소리!”
두 사람은 또다시 아옹다옹했다.
“해윤 선배!”
뒤에서부터 후배 민영이 다가오자, 그들은 잠시 휴전했다.
“어, 민영아 안녕.”
평소와 다른 민영을 마주한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줄근하게 다니던 녀석이 웬일로 화장을 했다. 체교과 특성상 하루에 한 번은 씻고 운동할 일이 있어서 대부분 민낯으로 돌아다니는 게 보통이었다. 소개팅이라도 있는 건 지 옷도 짧은 원피스에 하이힐까지 신었다.
“선배,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윤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어차피 수업까지는 두 시간도 더 남아 있었다. 민영의 요청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밖에 나가서 뭐 먹자. 김현일, 너는 시간 괜찮아?”
“…난 바쁘다.”
현일이 쓸쓸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야! 김현일!”
“나중에 수업 마치면 연락해~ 나는 간다.”
윤은 어리둥절하며 현일을 불렀지만, 그는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현일이 도서관 쪽을 향해 멀어져갔다. 윤이 머쓱한 표정으로 민영을 돌아보았다.
“어…… 민영아. 현일이는 갔는데.”
“괜찮아요. 제가 볼일이 있는 건 선배였으니까요.”
민영이 생글 웃었다.
“그럼 좀 걸어도 괜찮을까요?”
“난 상관없어.”
윤과 민영은 두어 발자국쯤 떨어져서 걸었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드물었다. 민영이 손을 들어 한적한 벤치를 가리켰다.
“선배 여기서 쉬었다가 가요.”
“응.”
평소 털털하게 바닥에도 막 주저앉던 민영이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깔고 앉았다. 그리고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이쪽의 눈치를 본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눈치도 없이 내가 왜 끼냐는 듯 굴던 현일의 태도, 민영의 다짐한 듯 굳어있던 얼굴. 이젠 아무리 눈치 없는 윤이라도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윤은 입을 꾹 다문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선배……”
“어? 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비록 칠십 년 이상을 살아왔지만, 윤은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었다.
“저, 커피 한 잔만 사줘요.”
“카, 카페로 가자! 요 근처에 분위기 괜찮은 곳 있다더라.”
윤의 속에서 점점 부담감이 부풀어가며,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차라리 카페 같이 깔끔한 곳에서 고백을 받고 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민영은 단호했다.
“아뇨. 저기 자판기가 좋아요. 밀크커피로 뽑아주세요.”
결국 윤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왔다. 양손에 커피를 들고 돌아오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
“고마워요, 선배.”
민영은 종이컵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윤은 끝이 깨끗하게 정돈된 손톱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저쪽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선수 쳐서 고백을 거절하기도 난감했다. 게다가 자신이 착각이라면 무슨 망신살이란 말인가.
고개를 든 민영이 윤을 바라보았다. 눈썹을 가늘게 찌푸린 채 올려다보는 얼굴은 청순하고 예쁘장했다. 체교과 여신이라고도 불리던 그녀는 입학했을 때부터 선배들에게 인기가 자자했는데, 매일 같이 고백을 받았음에도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
“선배 몰랐죠? 제가 입학했을 때부터 선배 좋아했던 거.”
“……미안. 몰랐어.”
윤이 머뭇거리다가 대꾸했다.
“하긴 선배는 눈치가 없으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민영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때 자신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거라 짐작도 하지 못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상태였다. 게다가 누군가를 돌아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홀로 상처를 끌어안고 핥으며 허덕거리기에 바빴다.
“혜민이 걔가 일부러 쓰러지는 데도 피한 사람이 선배였잖아요.”
윤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닌자 정해윤.’이란 별명을 갖게 해준 후배, 혜민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다. 그저 전쟁터에서 살아온 시간이 몸에 배어서 뭔가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습격자의 정체가 후배라는 걸 알았을 때 후배는 이미 형편없는 몰골로 바닥에 쓰러진 뒤였다.
“그래도 선배가 좋았어요, 예전부터.”
“…….”
“선배, 이번엔 날 선택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윤을 응시하는 민영의 뺨으로도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졌다. 점점 젖어들어가는 민영의 얼굴에서 누군가 겹쳐졌다. 안즈마네. 비록 기억은 없지만 그의 또 다른 친우이자 첫사랑.
윤이 눈을 크게 떴다. 민영은 늘 겉도는 윤을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현일마저도 깜빡하는 학과 행사를 알려주며, 여기에 빠지면 교수님에게 찍히니 함께 참석하자고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자신의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벨라드가 말했다.
모두 그의 곁에 있다고. 사람의 삶은 구르고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거라고.
전생의 월스턴과 안즈마네 같은 사이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레나드의 환생을 만나면, 그에게도 웃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
“고마워 민영아. 좋아해 줘서.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네 마음을 못 받아줄 거 같아. 그건 네게도 예의가 아니잖아.”
“지금 사귀는 사람 없잖아요.”
“……멀리 있어서 그래.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까,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나서, 보란 듯이 잘 지내.”
“저는요. 솔직히 못돼 먹은 애라서 선배보고 행복하게 지내라고 말 못하겠어요.”
민영이 붉어진 눈으로 활짝 웃었다.
“그래도 한 번 노력해볼게요.”
“……고마워.”
윤이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화는 끝난 건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이마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의 감각이 사라졌다. 누군가 제게 우산을 씌웠다. 숲 속에 들어온 듯 맑고 청량한 향기가 풍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