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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109화 (1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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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나의 전생 보고서.

“……누구?”

민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청객은 짧게 자른 금발을 살짝 쓸어 넘긴, 무척 잘생긴 외국인이다. 처음 만났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남자였다. 아스트리드 바덴이던가. 소문으로 듣던 교환학생인 게 틀림없다. 신은 한 사람에게 몰아주길 좋아한다더니 그 말이 틀린 게 없다. 집도 꽤나 부자라고 들었는데, 얼굴도 배우 뺨치게 잘생겼다. 패션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 키가 크고 몸매도 좋았다.

“글쎄. 그저 선약을 한 사람이라고 해두지.”

익숙한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스탄?”

목이 졸린 듯 꽉 잠겨서 목소리가 쉬이 나오지 않았다.

“많이 기다리게 하였지. 미안하다.”

아스탄이 윤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아릿한 재회의 순간이었다.

**

터덜터덜, 홀로 걸어가는 민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었다. 윤은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이었으니까. 그의 마음속을 차지한 사람을 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할 거라는 점도 잘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인적이 드문 캠퍼스에서 고백했다. 남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거절당했다면 너무 비참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잘한 거야, 이민영.”

민영은 스스로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교환학생과 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처럼 친근하게 한 우산을 쓰고 멀어져갔다.

“그런데 해윤 선배랑 교환 학생이 아는 사이였나?”

민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갑자기 머릿속을 지배하는 추측을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했다. 자문자답하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고개를 든 민영의 눈썹이 곧장 찌푸려졌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선배였으니까.

“야, 잘 끝났냐.”

“시비 걸어요, 현일 선배?”

민영이 눈을 새치름하게 치켜떴다.

“선배한테 말하는 뽄새 보소.”

현일이 아프지 않게 그녀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실제론 목을 조이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걸친 정도에 불과했다. 민영은 캑캑거리는 척 장난에 응수했다.

“나 심심한데 좀 놀아주라. 요 앞에 안주 무한리필집 생겼더라.”

“체대 애들 금지 먹은 거 몰라요? 하도 처먹어서 주인이 오지 말라고 했대요.”

“그럼 샐러드바는 어때? 나 배고파서 많이 먹고 싶은데.”

“거기도 뺀찌 먹었거든요. 학생증 검사까지 하는 곳이라고요.”

민영은 현일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하며 툴툴거렸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체대에서 상상치도 못할 행동이었지만 현일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기꺼운 듯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그럼 다른 데 가지 뭐. 내가 위로주 사줄게. 그렇게 될 줄 알았거든.”

현일의 얄미운 말에 민영이 울컥했다.

“선배…. 진짜 나쁜 거 알죠.”

“야, 이 세상에 나만큼 차칸 남자 없어.”

“내가 말을 말아야겠네요.”

민영이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현일이 몸을 쭉 펴며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이 선배는 늘 열려있고 한가한 남자거든? 그러니까, 나랑 놀아주라. 이민영.”

“진짜 나빠요. 선배.”

민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현일은 일부러 보지 못한 척 제 쟈켓을 벗어 민영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비 피하라고.”

현일이 깍지낀 손으로 뒷목을 받친 채 그녀의 앞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걷는데, 비가 점점 많이 내렸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음소리를 가렸다. 쟈켓이 그녀의 얼굴을 숨겼다. 덕분에 민영은 누구에게도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었다.

**

아스탄이 머무는 집은 학교에서 멀지 않았다. 목을 꺾어야 그 끝이 보이는 고층 아파트는 무척 비싸 보였다. 저쪽 세상에서도 황태자더니, 여기서도 부호인가 보다. 걸어오는 내내 윤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집 안으로 들어온 순간, 윤은 아스탄의 멱살을 잡아 문으로 밀어붙였다.

-쾅!

아스탄의 등과 현관의 철문이 충돌하며 큰 소리가 났다. 윤은 멱살을 틀어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명색이 초월자다. 이 정도로 그가 다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너!”

윤이 으르렁거리듯 아스탄에게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코끝이 부딪힐 만큼 가까웠다.

“왜 그렇게 날 보낸 거야! 내가 얼마나……!”

끓어오르는 말을 삼킨 윤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네가 한계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몇 분도 더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멱살이 잡힌 상태였지만 아스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아스탄이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글쎄. 연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남자의 집착이라고 해두지.”

아스탄이 허리를 숙여 윤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대었다. 붉은 눈동자가 다정한 빛으로 물들었다.

“……네가 내 곁에서 죽는 것보단, 차라리 살아있기를 바랐다.”

윤은 침묵했다.

“하지만 널 놓아주겠다는 뜻은 아니었어.”

아스탄이 녹아내릴 듯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울림이 좋은 음성이 뒷목을 오싹하게 간질인다. 윤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저절로 멱살을 잡은 손이 미끄러졌다. 윤은 팔을 늘어트린 상태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스탄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팔을 뻗었다. 이번엔 윤이 그의 품속에 갇혔다.

“너는 매정한 남자이지. 붙잡혀도 잡히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니 내가 이렇게 올 수밖에…….”

그의 가슴에 뺨이 닿았다. 생동감 있게 심장이 쿵쿵 뛴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선 채 이야기를 나누기도 곤란하니 안으로 들어가지.”

아스탄이 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급 아파트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만 사람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아 살풍경한 느낌을 주었다. 크고 안락한 소파에 앉은 윤은 저도 모르게 등을 기대었다. 몸을 폭 감싸왔다. 아스탄은 윤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란디아와 서울,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익숙한 자세였다.

“어, 어떻게 여기에 온거야?”

윤은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스탄은 이곳의 좌표를 모른다. 벨라드나 다른 신들이 협조해주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율리히의 도움을 받았다. 네 목에 걸었던 목걸이는 문스톤을 개조해서, 자동으로 좌표가 찍히도록 만들었지. 그러고난후 내게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분명 아스탄이 자신의 목에 무언가를 걸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 그란디아는 어떻게 된 거야?”

아스탄은 그란디아의 황제다. 책임감 있는 녀석이 나라를 버려두고 이곳에 올 리 없다고 단정 지었다. 물론 아스탄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도 우선순위가 있었고, 윤에게 비교한다면 그란디아는 한참 밑이다.

“이레인에게 물려주었다. 녀석이 크길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지.”

아스탄이 제 계획을 밝힌 순간 제르센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미하엘은 싱글싱글 웃고, 3대 공가의 수장들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레인은 성년이 되지 마자 황제로 등극했다. 기틀을 닦아주고 떠났으니, 나라를 꾸려가는 건 녀석의 몫이다.

“……마지막 질문. 이곳에 환생한 거야?”

벨라드는 자신이 그란디아에 남기 위해선 어떤 방법으로든 죽은 후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스탄은 그다지 변한 게 없어보였다. 좀 더 성숙한 외양으로 변했을 뿐이다.

“아니, 내 몸 그대로다. 이 땅은 마나가 희박하여 몸이 이상을 일으킬 확률이 높으니 지속적으로 마나를 공급해줄 도구만 있으면 충분했지. 훌륭한 마력 공급체가 있지 않은가. 가리온의 심장이라고.”

“뭐야.”

윤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아스탄은 이리도 쉽게 건너올 수 있었는데, 자신은 온갖 죽을 고비를 다 겪었다. 그럼 자신들이 벌인 갈등은 무어란 말인가. 사실 아스탄이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을 좇아올 거라 예상치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긴 했다.

“―믿을 수 없어.”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면 네 몸으로 직접 확인을 해보지 않겠나? 모든 것이 그대로일 테니.”

아스탄이 윤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명백한 성적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의미를 깨달은 윤이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그럴 일 없네요.”

아스탄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뗐다.

“어쨌든 일을 마무리 짓느라 조금 늦었다. 그리고 네 학교에 오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혹시 말이야. 네가 그… 교환학생, 아스트리드야?”

아스탄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스트리드. 무척 곱고 예쁜 소녀의 이름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 실체는 190cm에 육박하는 건장한 남자다. 그것도 무섭도록 잘생긴.

“하하하! 그 이름은 뭐야! 아스트리드라니! 여자 이름이잖아.”

윤이 배를 붙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스탄의 잘생긴 눈썹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그건… 이 세상의 황룡이 한 짓이다.”

“이곳에도 가리온이 있어?”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의 똥색 용은 착하기라도 한 걸까. 여하튼 녀석을 믿을 수 없었다.

“비슷해. 내가 살던 곳과 다르긴 하지만… 영적 존재이긴 하더군. 내게 신분을 준 게 황룡의 도움이 컸다.”

“녀석이 순순히 도와줬어?”

“다른 세상의 당신이 저지른 일은 그쪽이 책임지라고 생떼를 피웠지.”

아스탄이 농담처럼 말했다. 서늘하게 생긴 남자가 억지를 부렸다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윤은 푸흐흐 웃으며 “농담도.” 하고 대꾸했다. 아스탄은 믿기 싫으면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진실은 이세계의 황룡을 협박해서 도움을 강요한 거지만 윤에게는 비밀로 했다. 제 아무리 그란디아의 황제일지라도, 이 땅에서 그는 신분 없는 이방인이었다. 황룡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황룡이 나의 신분을 만들 때 이름 때문에 고민했지. 아스탄이라는 이름 자체는 없다더군. 최대한 비슷한 이름으로 바꾸어준다더니 가져온 게…… 저 이름이다.”

아스탄이 이를 갈았다. 끝끝내 아스트리드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언젠가 이름을 꼭 고칠 생각이야.”

“왜에? 예쁜데? 별명으론 아스라고 부르면 되고.”

그리 말하면서도 윤은 킬킬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웃음기가 가셨다. 먼저 입을 맞춘 건 아스탄이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심장을 쥐어짜듯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그리움이 해소되는데도 고통이 수반되는 모양이었다.

“……아스, 보고 싶었어.”

길고 긴 키스가 끝난 후 거친 숨을 토해내는 윤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윤은 손을 뻗어 아스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높고 날렵하게 솟은 콧날, 단단한 입매와 말캉한 입술, 부드러운 뺨을 더듬었다.

“나야말로.”

“다른 세상에서 괜찮겠어? 네가 살아온 곳이 아닌데.”

“나 역시 다른 세상에서 살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러니 네게 그란디아에 남아달라 바랄 수 있었던 거지.”

아스탄이 미소 지었다. 단단한 결심이 선 표정이었다. 윤은 아스탄이 제 곁에 남아달라고 수차례 말했어도, 대답 여부에 상관없이 결국은 이렇게 되돌려 보냈을 거라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사랑해. 아스.”

윤이 천천히 고백했다. 윤의 뺨은 젖어있었고, 붉었다. 바깥의 노을이 그에게 옮아온 듯 사랑스러운 빛깔이었다.

“나도 사랑한다. 윤. 이 생이 지나도 이 마음은 변치 않아. 내 모든 생을 걸고 너를 사랑해.”

아스탄은 윤을 꽉 끌어안았다.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 소리가 각자 서로의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같은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심장 소리는 하나가 되었다.

오랜 시간 홀로 겪던 외로움은 마치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하늘 높이 떠올라서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영혼까지 채우는 완전한 감각만이 그의 곁에 남았다. 윤은 마치 운명 같다고 생각되었다.

모든 생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를 위해 머나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었다.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의 앞에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나의 전생 보고서 結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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