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1)

5.

그것은 무척 오래되고 아련한 기억이었다.

거기에는 소년이 있었는데, 소년은 뭔가 달랐다. 그가 늘 다루어왔던 사람들과 어떻게 다르냐고 하면 선뜻 대답하기는 어려웠지만 여하튼 달랐다. 그는 그 소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지는 것은, 이놈과는 공존할 수가 없겠구나, 라는 느낌이었다. 공존은 그가 아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생각을 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눈앞에서 치워야 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고, 그렇다면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해치워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큼 더 어려워질 것을 알았던 탓이다.

왜냐면,

――그리고 그는 꿈에서 깨었고, 그가 떠올렸던 생각들을 잊어버렸다.

*

자정이 넘은 공항은 몹시 한산했다. 비행기들이 도착할 시각을 표시하고 있는 전광판 앞에나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을 뿐, 대낮처럼 환한 공항 안은 인적이 드물었다.

뉴욕발 비행기가 지금 막 도착했음을 알리며 깜박거리는 전광판을 쳐다보던 권기영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김건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도착하셨군요.”

권기영의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마찬가지로 전광판을 보며 “기철이가 나오려면 2, 30분은 기다려야겠어요.”라고 말하는 김건준에게 “예.”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한 권기영은 의자에 앉았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잠이라도 한잠 더 자는 게 나았겠지만, 그러나 같은 시간에 클럽에서 놈에게 깔려 뒹구는 것보다는 공항으로 오는 게 나았다.

원래 권기영은 귀국하는 동생을 마중 나갈 예정이 전혀 없었다. 그러잖아도 몸을 열 개로 쪼개고 싶을 만큼 바쁜 판에, 그놈을 마중하러 공항까지 갈 생각은 한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전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 섞여 든 김건준이 ‘그러고 보니 다음 주 금요일 밤늦게 기철 씨가 귀국한다고 했었죠. 그날 제가 늦게까지 인천에서 일이 있어서, 그 김에 마중이라도 나가 볼까 싶은데요.’라고 말을 꺼낼 때까지 권기영은 동생의 귀국에 대해서는 아예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지도 않았다.

‘아니에요, 건준 씨. 걔 자정 넘어서 도착해요. 그 시간에 피곤하게 어떻게 가요. 어차피 걔 데리러 따로 사람 보낼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낯도 익히고 점수도 따 둘 겸 해서요.’

누이에게 짐짓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김건준을 보며 권기영은 멈칫 낯을 찌푸렸다.

김건준이 권기철을 마중하러 간다.

권기철에게는 아직 김건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누이의 약혼자 이름이 김건준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 녀석이 김건준과 만나게 된다면.

‘기영 씨가 같이 가시는 건 어떨까요. 듣기로는 기철 씨가 기영 씨를 많이 따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인천에서 바로 공항으로 갈 수 있는 김건준과는 달리 그 시간에 누이가 따로 공항에 가기는 부담스럽다는 말끝에, 김건준이 권기영에게 말을 돌렸다. 권기영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김건준의 눈매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네가 같이 나가서 기철이를 데려오려무나.’

원래도 그랬지만 요 근래 특히나 김건준을 흡족하게 여기는 아버지가 말을 거들었고, 그것이 결론이었다.

“몇 년 만에 들어오는 거였죠, 거의 십 년쯤……?”

“그 사이에 두어 번 잠깐 들어왔었으니까 한 삼사 년쯤 됐습니다.”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놈의 말을 듣고서야 놈이 그 녀석과 마주치는 건 십여 년 만이라는 걸 깨닫는다.

권기영이 누이의 약혼자와 함께 마중 나온다는 것은 권기철도 알고 있었다. 녀석이 비행기에 타기 전 집으로 전화했을 때 어머니가 말해 줬다고 했다.

“기철이는 여전한가 보더군요.”

권기영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며 김건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정말로 형이 마중을 나오는 거냐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몇 번이나 묻더라면서요.”

“……. 누나랑 전화하셨습니까?”

“예. 공항에서 기철이와 만나면 연락해 달라고 하더군요.”

권기영이 어머니에게 들은 그 말을, 그는 누이를 통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뭐가 우스운지 한동안 나직이 웃었다.

“하긴, 시간이 흐르면서 처신하는 방식이 다소 바뀔 수는 있겠지만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일은 거의 없지요.”

권기영은 즐거운 일을 앞둔 듯 게이트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남자를 곁눈질로 보았다. 권기영이 기억하는 오래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워 권기영은 냉소를 띠었다.

놈이 굳이 권기철을 마중 나오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지는 오래 생각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즐기려는 것이리라. 그가 처음 누이의 약혼자로서 권기영의 앞에 나타났던 때처럼.

“어쩔 생각이야. 그 녀석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밟을 셈인가?”

“기영 씨와 같은 방식……, 기철이한테 말입니까?”

문득 권기영이 어투를 바꾸어 나직이 중얼거리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일순 표정마저 지우고 권기영을 빤히 바라보던 김건준이 기묘하게 낯을 찡그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내 낮은 헛웃음을 내뱉는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기철이, 기철이한테요? 아하하.”

무슨 우스운 말이라도 들었는지 한참을 그렇게 웃던 김건준은 여전히 웃음이 남은 눈으로 게이트를 보았다.

“저는 기철이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려는 건 없어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지요, 하고 덧붙인 김건준은 냉랭한 시선을 한 번 던지고 마는 권기영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가느스름한 눈매가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걱정되십니까? 동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김건준의 느릿한 물음에 권기영이 언뜻 눈살을 찌푸린, 그때였다. 예상보다 이르게 게이트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한둘씩 띄엄띄엄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나오는군요.”

권기영보다도 먼저 김건준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훌쩍 덩치가 큰 남자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스포츠백 하나만 둘러메고서 두리번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산한 로비에서 권기철이 그들을 발견한 건 금방이었다. 권기영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형!” 하고 크게 손을 흔든다. 권기철은 한달음에 그들에게 다가오면서 흘끔 김건준에게도 시선을 주는 듯했지만 별다른 기색 없이 권기영에게 고개를 돌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천천히 와도 됐는데. 내가 좀 기다리면 되니까.”

“금방 왔어. 넌 별일 없었지?”

어, 하고 대꾸하며 권기철은 자잘한 사고들을 기억하고 뜨끔해졌는지 슬쩍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곤 얼른 시선을 옆으로 옮겨 권기영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김건준을 보며 “그러고 보니 누나랑 약혼한 사람 같이 나온다며…….”라고 말을 돌렸다.

전화를 꺼내어 귀에 대고 있던 김건준은 권기철과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으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때 상대가 전화를 받았는지 입으로는 전화에 대꾸를 한다.

“예, 기윤 씨. 지금 막 도착했어요. ……예, 물론 아무 일도 없지요. ……예, 아버님과 많이 닮았네요. 기윤 씨가 말한 대로라서 금방 알아봤어요. ……하하, 맞아요.”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누이와 살갑게 통화를 하는 김건준을, 권기철은 처음에는 신기한 것을 살피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몸에 밴 오만함을 감추지 않고 값을 매기듯 흘끔거리던 권기철은, 그러나 어느 순간 고개를 기웃했다. 얼핏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껌벅인 권기철은 다음 순간 권기영을 보았고, 표정 없는 형의 얼굴을 확인한 뒤 다시 의아하게 김건준을 보았다.

어……?,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의혹이 뒤섞인 얼굴로 고개를 기웃거리던 권기철은 “그럼 주말에 봐요.”라고 통화를 맺던 김건준이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빙긋이 눈웃음을 지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 눈을 부릅떴다.

“아버님은 주무시고, 어머님과 기윤 씨는 아직 깨어 있나 봐요. 기다리겠다고 하네요.”

어서 가 봐야겠어요, 라고 권기영에게 웃으며 말을 건넨 김건준은 그런 뒤에야 다시 권기철을 보았다. 둥그렇게 부릅뜬 눈으로 김건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권기철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 ……어……?”

설마, 아니 하지만, 하고 권기철이 권기영과 김건준을 번갈아 보았다. 얼떨떨해하는 낯이 몹시 꼴사나워 권기영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권기철은 당황한 얼굴로 권기영을 보았고, 권기영은 무표정하게 김건준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해. 누나랑 결혼할 분이다.”

“반갑습니다. 기윤 씨한테 기철 씨 말씀 많이 들었어요. 김건준이라고 합니다.”

김건준이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건준, 권기철의 입술 모양이 그 이름대로 달싹거렸다. 낯빛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너……, 건…….”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권기철을 빙긋이 웃으며 내려다보던 김건준은 친근하게 말을 건네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권기철은 대답 대신 귀신을 본 것처럼 하얘진 낯으로 권기영을 보았다.

“형……, 이게, 무슨…….”

“꼴사납게 굴지 말고 인사나 해.”

권기영이 싸늘하게 말하자 그제야 권기철은 움찔하며 김건준이 내밀고 있던 손을 맞잡았다. 우물우물 입안으로 인사를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여전히 녀석은 귀신에 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건준은 손을 잡은 순간 움찔하는 권기철을 보고 피식 웃었다.

“반갑다, 기철아.”

권기철은 어, 하고 이번에도 어물어물 입술만 움직였다.

짧은 재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건준은 그 몇 마디로 만족한 듯 손을 놓으며 물러섰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봤으니 됐습니다. 기윤 씨와 어머님이 기다리실 테니 어서 가 보셔야지요.”

손목시계를 보며 저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고 말한 김건준은 당혹스런 가운데서도 안도하는 기색을 떠올리는 권기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고, “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라고 짧게 인사하는 권기영에게도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섰다.

청사 문을 빠져나간 김건준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권기철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의 등만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삼스럽게도 그 꼴사나운 모습에 화가 치민 권기영이 냉랭하게 홀로 저벅저벅 걸어 나서자 그제야 뒤늦게 권기철이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쫓아왔다.

“형, 형, 지금, 건준이지, 김건준, 그 새끼지?! 그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어? 설마――.”

“소리 낮춰. 바깥이다.”

권기영이 싸늘하게 대꾸하자 권기철은 금세 입을 다물었지만 녀석의 초조한 기색이 권기영에게까지 번져 왔다. 공연히 자신까지 초조해지는 기분이 들어 더욱 불쾌해진다.

주차장에 이를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권기철은, 그러나 조수석에 앉는 순간 인내심까지 끊긴 것처럼 봇물 터진 듯 말을 쏟아 냈다.

“형, 저거 건준이 맞지. 건준이잖아. 기억 안 나? 김건준? 나 고등학교 때에――.”

“그래, 약 하다가 사람 죽이고 지방으로 내려갔던 네 친구.”

권기영이 운전석의 문을 닫으며 냉랭하게 대꾸한 순간 권기철은 입을 다물었다. 권기영은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한적한 주차장의 저 앞에서 한발 먼저 나가는 김건준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공항에서 나선 뒤에도 눈만 뒤룩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는 권기철을, 권기영은 고속도로에 오른 뒤에야 돌아보았다. 그제야 파랗게 질려서 권기영의 눈치만 보고 있던 권기철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누나랑 결혼한다는 게, 정말로 저놈이야……?”

“그래.”

“어떻게――.”

“아버지와 누나의 눈에 동시에 들 만큼 인물이 출중하니까.”

여전히 냉정하게 딱 잘라 대꾸를 하는 권기영에게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권기철은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듯 불안스럽게 속삭였다.

“아버지랑 누나는 알고 있어?”

무엇을, 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권기영은 뻥 뚫린 고속도로를 수십 미터 앞서가는 놈의 차를 노려보며 한동안 침묵하다가 “아니.” 하고 대꾸했다.

“그럼 말해야지!”

권기철이 대번에 낯빛을 바꾸며 소리쳤다. 흥분해서 당장에 전화라도 걸 듯이 난리를 치는 그는 그제야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 같았다. 말해야지, 저런 놈이랑 누나가 어떻게, 저놈이 누군지 아버지가 아시기만 하면 당장, 헐떡거리며 말을 주워섬기는 놈에게, 권기영이 냉담하게 대꾸했다.

“말하면?”

그 냉랭하게 끊어지는 말투에 권기철은 움찔한 눈치였다. 권기영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해야지, 그래야 아버지가 당장 저놈을……” 하고 더듬거리다가, 뒤이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 하고 낯을 찌푸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난감한 빛을 띠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가족 모두 물밑에 가라앉혀둔 채 없었던 일인 양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권기철의 잘못을 다시 끄집어내어 저 무서운 아버지에게 말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저 얄팍한 사고마저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도 녀석은 그대로다.

권기영은 새삼스럽게 경멸이 치솟아 권기철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아버지의 진노는 문제가 아니다. 누이와의 혼사가 깨질 것도 아무 일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필경 둘 중 하나, 김건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어 회유하려 들거나 혹은 아들의 과오를 완전히 덮어 버리기 위해 김건준을 없앨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전자라면 도리어 이쪽의 카드가 모두 사라지는 셈이며, 후자라면 진흙탕이 될 것이다.

사람을 죽였다. 권기철이 아닌 권기영의 일이다. 호텔에서 KK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죽어 나간 남자는 권기영이 사주해서 죽였다. 또한――밤마다 거듭되는 놈과 권기영의 관계.

“…….”

권기영이 곤란해진다. 이것은 기철이 녀석처럼, 아버지에게 한바탕 혼이 나고 말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나 선거를 앞둔 이 민감한 시기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자칫하면 권기영만이 아니다. 저 빈틈없는 놈이 그러한 사태에 아무런 대비도 해 두지 않았을 리 없었다.

“쓸데없는 말 말고 조용히 있어.”

권기영이 싸늘하게 말을 던지자 권기철은 목을 움츠리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흘끔 권기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형은 어떻게……, ……건준이랑은 그럼 이야기가 다 된 거야?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로 화해했어?”

병신 같은 놈.

권기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옆에 앉아 있는 저 구제 못 할 병신에게 욕을 퍼부을 것 같았다.

모두 이 머저리 병신 때문이다.

놈을 처음 집으로 데리고 온 것도 이 멍청이였고, 클럽에서 약이나 하고 논 것도 이 멍청이였고, 그러다가 사람을 죽인 것도 이 멍청이였다. 이 멍청이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권기영은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머저리 따위는 애초에 어느 시골구석의 정신병원에라도 처박았어야 했는데.

차는 이윽고 시내로 접어들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저 앞에서 달리던 놈의 차가 그들이 갈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꺾어 들었다. 끊임없이 눈앞을 어른거리던 빨간 불빛이 겨우 시야에서 사라졌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말고 조심해. 집에서도.”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하고 권기영이 눈길을 던지자 권기철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도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과거의 일로 아직까지 권기철에게 고운 얼굴을 하지 않는 아버지다. 설령 말을 꺼내라 한다 해도 녀석은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뒤로 빼며 권기영에게 대신 말해 달라고 매달릴 터였다.

권기철은 꺼림칙하게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차를 달리던 권기영은, 집 근처 길로 접어들 즈음에야 권기철에게 시선을 주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정 변호사에게 그쪽 일은 정리 다 됐다고 연락 왔었다.”

“어……, 응.”

“그동안 고생했어. 힘들었을 텐데.”

권기영이 말하자 권기철은 눈을 커다랗게 껌벅이며 그를 보았다. 담담한 눈매와 시선이 마주치자 권기철은 머리를 긁적이며 뭘, 하고 중얼거렸다.

“그 정도 힘든 것쯤은 아무것도 아냐.”

제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의젓한 체 대답하는 권기철에게 권기영은 “그래, 오랜만에 들어왔으니 푹 쉬다 가라.” 하고 조용히 말해 주었다. 그의 음색에서 냉정함이 가신 걸 느꼈는지 “응, 형.”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권기철의 대꾸에 조금 기운이 살아났다. 거기는 음식이 양만 많고 맛도 없다느니, 주제도 모르고 건방을 떠는 놈들이 많다느니, 대뜸 화색이 돌아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권기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권기영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구제할 도리가 없는 얼간이.

그러나 이 멍청이는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권기영이 가장 확고하게 믿고 부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

뭘 하든 어리석고 어설픈 놈이었지만 권기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맹목하며 절대적으로 따를 것임에 분명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고, 권기영이 그렇게 길렀다.

그리고 녀석은 지금도 권기영이 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따를 터였다.

그래, 무슨 말이든.

“…―.”

권기영은 무심결에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남자는 죽어야 한다. 더는 어물거리며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권기영이 잠시 잠깐 어깨에서 힘을 빼는 순간, 놈이 예기치 못한 변덕을 부리는 순간, 혹은 놈이 알 수 없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놈은 소름끼치게 끔찍한 짓을 얼마든지 저지를 터였다.

심장이 크게 울렸다. 실패해선 안 된다. 반드시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놈을 죽이는 데에 힘을 빌려줄 사람은 권기영의 손닿는 범위에서는 없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럴 만한 힘이 있고, 절대적으로 권기영의 편에 설 누군가.

그래,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완력에 권기영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어리석고 충실한――최악의 경우에는 내버릴 수 있는 말.

권기영은 거울에 비친 권기철을 보았다.

여태 자신은 수없이 이 녀석의 뒤를 닦아 주었다. 그러니 이제는 녀석이 자신을 위한 궂은일을 해야 마땅했다.

* * *

바깥에서 조용히 물 흐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는 기척이 간간이 들린다.

권기영은 종업원이 미리 내어준 차를 마시며 열어 놓은 장지문 너머, 노란 등불만 점점이 보이는 새카만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의 건너편 자리에는 한 사람 몫의 물수건과 찻잔이 놓여 있었지만 아직 자리는 비어 있었다.

잠시 후 약속한 시간에서 조금의 오차도 없이 안쪽 복도로 난 문을 밀고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목례를 하며 들어선 김건준이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권기영과 김건준 두 사람만으로 준비되었던 자리는 다 찼다. “아닙니다. 저도 이제 막 왔습니다.”라며 고개를 저은 권기영은 그가 손을 닦고 찻잔으로 목을 축이기를 기다려 옆에 두었던 서류 봉투를 건넸다.

김건준은 봉투와 권기영을 차례로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일 이야기를 꺼내는 권기영에게, 김건준 역시 별말 없이 선뜻 봉투를 받아들었다.

“이런……, 과하게 믿어 주시는군요.”

김건준은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곤 짐짓 난감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미 대략적인 금액은 누이가 귀띔해 두었을 텐데도 놀란 기색을 보이는 그에게 권기영은 담담히 의례적인 말을 건넸다.

“김건준 씨의 수완이라면 충분히 기대할 만한 결과를 얻을 줄 믿으시니까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 부담 가지라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그러면 일이 진행되는 상황은 그때그때 인편으로 서류를 보내 드리고 따로 전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건준이 새로 손을 대려는 일에 권기영의 아버지가 흔쾌히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유통 확대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이미 판 갈라 먹기가 거의 고착되어 있다시피 한 업계 상황으로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 자칫하면 되레 큰 손해를 뒤집어쓰게 될 수도 있었음에도 아버지는 과거의 전적을 보아서인지 거리끼지 않았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전화 드렸다고 하시던데, 이것도 같이 부탁드리겠습니다.”

권기영은 어머니가 건너 건너 안다는 사람의 인적사항이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경력의 구색을 맞추는 데에 필요하다며 김건준의 회사에 잠시 적을 옮겨 놓는 유의 대수롭잖은 일이었는데, 평소라면 아버지나 권기영의 선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요즘은 어디서든 몸을 사려야 한다고 김건준에게 넘기고 있는 것이다.

첫 건은 투자이며 뒷 건은 청탁이다. 서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맞바꾸는 흔한 공존 방식이었고, 달리 덧붙일 관례적인 수식어가 없는 한 그 몇 마디로 볼일은 끝나 버린다. 오늘 권기영이 따로 김건준과 약속을 잡은 이유도 이렇게 끝나 버렸다.

“그러면 볼일은 마쳤고――마음 편하게 식사나 하면서 술이라도 한두 잔 가볍게 드실까요. 혹시 이 뒤에 가 봐야 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미 밤 열 시를 넘어 다른 일정은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의례적으로 물어보는 김건준에게 권기영은 고개를 저었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때맞춰 방문이 열리며 술을 곁들인 반상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기철이는 조용히 잘 지내는 모양이더군요.”

김건준이 권기영의 술잔을 채워 주며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예, 아직은요.” 하고 권기영이 대꾸하자 웃는다.

권기철이 귀국한 지 보름 남짓이 지났다. 선거철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집안에까지 조심스러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녀석이 아무리 눈치 없는 얼간이인들 함부로 나댈 리가 없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누이와 더불어 녀석이 김건준과 한두 번 만났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허물없이 권기철의 이름을 부르며 알은체하는 김건준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권기철이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는 사이에, 김건준은 의아해하는 누이에게 ‘공항에서 보고 어쩐지 낯이 익어서 얘기하다 보니 같은 중학교를 나왔더라고요. 반가운 우연이죠.’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어물어물, 같은 중학교를 나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라는 관계가 정립되었다는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은 권기영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거짓말은 싫어한다더니 과연, 멋지게 진실을 호도하는 참말이다.

그러잖아도 자신이 연상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꺼려 하고 있었던 누이는 김건준이 막냇동생과 동창이라는 화제를 내켜 하지 않았고, ‘어머, 우리 집이랑 원래부터 그렇게 인연이 있었나 보다.’라며 어머니가 멋모르고 기쁘게 말한 것 외에는 굳이 그 화제는 더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더군요. 예전이랑 딱히 달라진 데도 없어서 이야기하기도 편하고요.”

“기철이랑 잘 지내시나 봅니다.”

“예, 오늘도 여기 오기 전에 잠깐 만났습니다. 기윤 씨 없이 따로 만나서 가볍게 한잔하고 왔지요.”

권기영은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 누이와 더불어 만나는 건 놈이 누이의 약혼자라 그러려니 했지만, 따로 만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기철이가 원래 마음이 좋은 녀석이잖습니까. 워낙 오랜만에 만나고 여러 일도 있었고 하다 보니 처음에는 꺼려 하는 눈치였는데, 몇 번 만나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사이에 마음이 풀린 모양이더군요. 옛친구와 그렇게 마음 터놓고 술자리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라 저도 기분이 좋던데요.”

오늘은 유난히 술이 맛있는걸요, 하고 놈이 웃으며 술을 마셨다. 취한 기색이라곤 하나 없는 놈의 앞에서 권기영도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날이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혔다.

그 속없는 얼간이 같으니.

권기철이 김건준을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다 한들, 이 남자라면 말 몇 마디로 그 멍청이를 구워삶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가깝게 지내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당장 그 멍청이부터 단단히 잡아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이 무슨 맛인지 모를 술을 마실 때였다.

사타구니에 단단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떨어뜨리자 놈이 상 아래로 다리를 뻗어 권기영의 사타구니를 지그시 밟고 있었다.

정확히 성기 위를 짓누른 발은 그 위를 슬슬 쓰다듬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내려가 회음을 눌렀다. 그리고 곧 그 아래, 엉덩이 사이를 옷 위로 파고든다.

권기영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김건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벗으십시오.”

“…….”

“어차피 자정까지 오래 남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가볍게 몸을 풀고 모처럼 일찍 귀가해 푹 쉬시는 편이 나으실 텐데요.”

권기영은 놈을 노려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우물쭈물하는 게 더욱 꼴사나워, 사나운 시선을 똑바로 놈에게 향한 채 거침없이 바지 앞섶을 열어젖혔다. 벌어진 바짓자락 사이로 튀어나온 성기가 무겁게 늘어졌다.

상에 가려 보이지도 않을 성기를, 놈이 발을 뻗어 느릿하게 밟았다. 음경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지그시 밟다가 그 아래의 고환을 발가락으로 문지르며 둥글리던 놈이 문득 웃었다.

“요즘 속옷 빨래가 나오지 않아서 가정부 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여기시겠습니다. 양복 세탁이 잦아졌다고 세탁소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실지도 모르겠어요.”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상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던 놈은 권기영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피며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그러면 구멍을 볼까요. 속까지 보이도록 벌리십시오.”

권기영은 사납게 놈의 발을 뿌리치고 일어나 뒤돌아 무릎걸음으로 섰다. 차라리 놈의 면상을 마주 보지 않는 게 더 나았다.

눈앞을 가로막은 벽을 노려보며 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권기영은 두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고 바깥쪽으로 벌렸다. 서늘한 공기가 닿는 틈새로 놈의 시선이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한 번도 안 쓴 새 구멍 같군요. 여태 수천수만 번도 넘게 그 구멍으로 페니스를 먹어 치웠는데도 그렇게 깨끗한 모양이라니, 기영 씨는 정말로 타고나셨나 봅니다.”

엉덩이를 움켜쥔 권기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놈이 유유히 술을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자신의 비부가 놈의 안주가 된 것 같다.

달각,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이어 놈이 상을 옆으로 밀어놓는 기척이 났다. 권기영이 긴장한 찰나, 빠끔하게 벌어져 있던 틈새로 놈이 손가락을 불쑥 밀어 넣었다.

“――!!”

“찰지게 조이는 것도 새 구멍 같고…….”

구멍을 파고든 손가락이 안팎으로 드나들면서 하나둘 늘어난다. 이미 익숙한 듯 거침없이 안을 휘젓는 손가락은 정확하게 권기영의 전립선 위를 긁으며 두들겼다. 몸이 절로 움찔거리면서 놈의 손가락을 조여 대는 걸 권기영 자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번 쑤시지도 않았는데 건드리지도 않은 앞이 서는 걸 보니, 기영 씨가 구멍으로 성교하는 데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알겠습니다.”

바로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있었던 듯 놈이 웃는 숨결이 엉덩이를 간질였다. 권기영은 놈의 말마따나 슬그머니 힘을 받고 일어서기 시작한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는데, 하고 놈이 문득 입을 열었다.

“기영 씨는 정말로 기철이랑 안 닮았습니다. 머릿속부터 생김새까지. 심지어는 구멍 모양까지도 다르게 생겼어요. 그 녀석은 거무튀튀하게 생긴 게, 한 번도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거든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권기영은 눈을 부릅뜨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권기영의 경악스러운 시선을 받은 김건준은 찡그린 웃음을 웃었다.

“당시에 기철이랑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 중에, 그놈 사타구니와 엉덩이를 못 본 놈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여자와 뒹굴곤 했으니까요.”

저만 본 게 아닙니다, 하고 헛웃음을 웃는 김건준은 권기영의 엉덩이 속을 휘젓던 손가락을 끌어냈다. 아래를 뒤척거리던 느낌이 사라져 숨을 돌린 것도 잠시, 이내 놈의 우악스러운 성기가 빈자리를 짓치고 들어와 권기영은 “으……!” 하고 짤막한 신음을 터뜨리고 만다.

“기철이 그 녀석은 유난히 사람들 다 보는 자리에서 섹스하는 걸 좋아했는데, 다 끝나고 나면 그 여자를 선심 쓰듯이 친구들에게 돌리곤 했어요. 그걸 우정인 줄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말입니다, 하고 덧붙이는 김건준의 목소리가 등 뒤로 다가왔다. 벽을 짚었다가 미끄러져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한 권기영의 허리를 붙들고 놈이 사타구니를 거침없이 들이밀기 시작했다.

“아! ……으, ……! 윽, ……!!”

권기영은 손등을 물어뜯었다. 방 주위로는 사람을 물렸다지만 워낙 조용한 곳이라 조그만 소리라도 다 새어 나갈 것 같았다. 푹, 푹, 놈이 거칠게 추삽질을 하는 틈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와 물기 어린 소리가 섞인 음란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김건준이 등 뒤에서 팔을 뻗어 권기영이 물고 있던 손을 가만히 뜯어냈다.

“손등에 흉터가 남으면 그게 더 가리기 힘들 겁니다. 비밀스러운 일들로 찾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라 이곳 종업원들에겐 입이 없으니 얼마든지 안심하시고 소리 지르셔도 좋습니다. 얼마든지, 마음껏이요.”

“아악!! 아, ……으, 아아, 아! 흐, ……!!”

놈이 권기영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활짝 벌리며 거세게 허리를 들이받았다. 쾅, 쾅,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강제로 권기영의 입에서 비명을 짜내기라도 하려는 듯 거칠게 허리를 놀리는 놈에게 권기영은 정신없이 뒤흔들렸다. 아랫도리는 벌써부터 질퍽질퍽하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권기영은 방 안의 환한 불빛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김건준이 단정한 얼굴을 드러낸 채 바지춤만 풀어헤치고, 마찬가지로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다 흐트러진 양복을 걸친 권기영과 아랫도리를 섞고 있었다.

등 뒤에 있는 건 어둑한 클럽에서 맞닥뜨리는 KK가 아니다. 권기영을 벌리며 파고들고 있는 것은 김건준이었다.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그 감각이 소름 끼치게 낯설어,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다. 놈은 등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등 뒤에 있는 게 KK인지 김건준인지는 권기영이 알 노릇이 아니다.

권기영은 놈의 거친 추삽질에 몸이 자칫하면 넘어질 것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려, 손등에 이마를 박고서 몸의 균형을 잡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기영 씨와 비슷한 게 딱 하나 있긴 하군요.”

김건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기철이도. 그래서 그 녀석은 후배위를 그렇게 좋아했어요. 상대에게 굴욕을 주며 지배하는 느낌이 가장 확실하게 느껴지는 체위라고. ……하지만 그것도, 지금의 기영 씨와는 입장이 반대라고 해야겠군요.”

놈이 등 뒤에서 웃었다. 짐승 같은 자세로 엉덩이를 치켜올리고 놈에게 깔려 있던 권기영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무심결에 기듯이 앞으로 벗어나려던 권기영을, 놈이 허리를 움켜쥐고 거세게 끌어당겼다. 몸속이 확 벌어지며 놈의 성기가 거세게 틀어박혔다.

“흐, 으, ……!!”

“좋습니까?”

놈이 등을 핥아 올리며 권기영의 유두를 꼬집어 당겼다. 권기영은 숨을 들이켰다. 저릿한 감각이 몸속을 번개처럼 치달아 사타구니마저 욱신거리며 조여든다. 권기영의 몸속에 들어가 있던 놈이 탄성 같은 소리를 터뜨리며 웃었다.

“이제 안 느끼는 데가 없군요. 점점 더 남자를 홀리는 몸이 되어가고 있어요. ……아주 좋습니다.”

이놈은 악마다.

권기영은 이를 악물며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분노와 치욕으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서. ……어서.

어서 벗어나야만 한다.

어서 놈을 없애야 했다.

*

권기영이 돌아왔을 때에는 자정이 조금 지나 있었다.

다들 잠자리에 들었는지 노란 불 하나만 켜져 있는 거실을 스쳐 2층 계단을 막 오르려던 권기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은 딱히 없……, ……당분간 잘 알아보고……, ……조심히…….’

누이의 닫힌 방문 틈으로 조그만 불빛과 함께,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들릴락 말락 낮은 말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오고 있었다. 권기영은 그 문으로 냉랭한 시선을 던지곤 다시 계단을 올랐다.

감이 왔다. 놈을 미심쩍어하는 눈치더니 결국은 어딘가에 기별을 넣었나 보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 문을 닫자마자 거칠게 재킷을 내던지던 권기영은 스스로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혀를 찼다. 초조해할 것 없다. 놈이 순순히 꼬리를 잡혀 줄 만큼 어설픈 구석이 있는 남자도 아니었고,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결정적인 뭔가가 없는 한 권기영이 곤란에 빠지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괜찮다. 벌써부터 초조해할 것 없다. 그러나 이대로 어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욕실로 가 옷을 벗어 내던 권기영은 바지를 벗다가 움칫하고 말았다. 바짓자락에서 발을 빼며 다리를 든 순간 엉덩이 사이로 끈끈한 정액이 주룩 스며 나와 항문 근처를 끈적하게 적셨다. 다 닦아 내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엉덩이 속에 남아 있었나 보다.

“씨발……!”

이를 갈며 욕설을 뱉어 낸 권기영은 거칠게 샤워 노즐을 낚아채 엉덩이 위로 물줄기를 뿌렸다. 엉덩이를 벌리고 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끈끈하게 묻어 나오는 정액을 긁어내다가 이미 손가락쯤으로는 별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치밀었다.

권기영은 거울에 비친 남자를 노려보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다른 놈들의 위에 서 있던 남자다. 여태 죽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했다. 그것이 권기영이라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

권기영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집으로 들어올 때, 권기철이 잠자리에 들기엔 턱도 없는 시각인데도 녀석의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까 김건준이 뭐라고 했던가. 녀석과 가볍게 술잔을 나누고 왔다고 했었다.

김건준과 헤어진 뒤 바로 귀가를 했다면 이미 한참 전에 들어오고도 남았어야 했음에도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은 그 뒤에 다른 약속이 있었다거나, ……혹은.

권기영은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몸에서 물기를 닦아 내고 나온 그는 가운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권기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컴컴한 방안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했지만 권기철은 받지 않았다.

혀를 차며 전화를 끊은 권기영은 언제까지고 기다릴 생각은 없으니 일단 방으로 올라갈까 생각하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랫동안 말끔하게 비어 있었던 권기철의 방은 며칠 사이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바뀌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녀석은 변함없었다. 예전과 똑같이 너저분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책임도 지지 않고 정돈도 하지 않는 주제에 늘어놓고 다닐 줄만 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 그런 줄 모른다는 게 녀석의 가장 바보 같은 점이었다.

돈, 배경, 완력, 가장 쉽고 즉각적으로 우열을 판단할 수 있는 부분들에서 운이 좋았던―아무 노력도 없이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녀석은 저 스스로가 압도적으로 강하고 훌륭한 수컷인 줄 알았다.

그 오만하고 꼴사나운 허세를, 그러나 권기영은 싫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 맞다. 너랑 보기로 했었지. 깜빡했네. 여태 기다렸냐? 킥킥, 벼엉신. 야, 나 집에 들어왔어. 너도 집에 가라. 내일 보자, 내일. 뭐, 약속? 새끼야, 째. 건방지게. 내가 내일 보자면 내일――.”

방문을 벌컥 열며 키들키들 들어오던 권기철이 권기영을 보고 어, 하고 말을 멈추었다. 술이라도 잔뜩 마시고 왔는지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들어오던 녀석은 대번에 움츠러든 얼굴로 권기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야, 나중에 전화하자. 끊어.”라고 속삭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형, 여기서 뭐 해. 나 기다렸어? 그럴 줄 알았으면 일찍 들어왔을 건데, 미안.”

자신이 무엇을 잘했든 잘못했든 일단 권기영의 기분부터 살피며 숙이고 들어오는, 이 비천한 복종.

열등감이 기저에 깔려 있는 동경을 무조건적인 순종으로 드러내는 절대적인 충성.

그것은 녀석이 죽을 때까지 아둔하리라는 것만큼이나 명백하게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권기영은 어리석은 종을 가엾이 여기듯 그 아둔함을 너그럽게 눈감아 주는 것이었다.

“저녁에 김건준이랑 만났다며.”

“어? 어……,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 겸 만나자고 먼저 연락하더라고.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고, 얘기나 좀 하고 서로 오해도 있으면 풀자고……. 별일 없었어. 그냥 어떻게 지냈나 그런 얘기나 하고……, 금방 헤어졌어. 형이랑 약속 있다고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이야기는 좀 나눴어?”

“별 얘기는 안 했고, 그냥 뭐 일하는 얘기라든가, 누나 얘기도 하고. 얼마 안 있으면 서로 더 가까운 사이가 될 텐데 그게 참 기쁘다고 그러더라. ……뭐……, 서로 껄끄러울 옛날이야기 같은 건 거의 안 했고…….”

변명하듯이 주절주절 늘어놓던 권기철은 마지막 말을 꺼내며 흘끔 권기영의 눈치를 보았다. 권기영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곧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기우였나.

“그러면 여태 다른 친구랑 마시다 온 거냐?”

“어? 어……, 아니 뭐, 그냥.”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어설프게 웃는 권기철에게서 풍겨 오는 희미한 향수 냄새를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원래부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었다. 술까지 들어갔는데 어디 클럽에라도 가서 여자랑 놀다 오지 않았을 리 없지. 그런 것치곤 일찍 들어온 편이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너도 알지. 처신 조심하고 다녀라.”

“어, 걱정하지 마.”

여자와 자고 왔다고 별일은 없겠지만 가볍게 짚어 두자 권기철은 얼른 어, 걱정하지 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잘한다. 권기영은 코웃음을 치며, 별다른 일은 없었던 모양인 권기철을 한번 훑어보곤 걸음을 돌리려 했다. 문을 가로막듯이 서 있던 권기철이 얼른 옆으로 흔들흔들 비켜서다가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어, 하고 겸연쩍게 얼른 몸을 바로잡으려 하면서도 흔들거리는 녀석을, 권기영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말은 제법 멀쩡하게 하는 놈이 미묘하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다. 술김이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감이었다. 불길한 기분이 확 닥쳐오는.

“너.”

권기영이 인상을 그으며 입을 연 순간 아까부터 왠지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권기철의 얼굴이 더럭 굳었다. 권기영은 당장 권기철의 멱살을 움켜쥐고 벽에 밀어붙였다.

“너, 약 했지.”

“혀, 형, 어, 그, 안 했, 아니, 그, 아주 조금, 반응도 안 나오는,”

“이 정신 나간 새끼가……!”

권기영은 눈을 홉뜨고 눈동자를 데룩거리는 권기철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말았다. 벽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나뒹군 권기철이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권기영을 올려다보았다. 늘 이성적이고 냉랭하던 형이 주먹질을 한 게 믿어지지 않는 듯.

“형, 잘못했어. 하, 하지만 괜찮아, 정말, 정말로 조금이었고, 검사해도 반응도 안 나오는 거랬어. 게다가 거기 건준이 가게라고 했고, 또 가루 넣을 때엔 건준이밖에 없었어. 여자도 없었어.”

“그놈이 준 약이냐?”

이거였나. 오늘은 유난히 술이 맛있는걸요, 놈이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권기영은 열심히 변명을 주절거리고 있는 권기철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 병신 같은 놈은 아직도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권기영은 놈이 이 건수를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해 그 가능성의 종류를 이 자리에서 당장 열 가지는 댈 수 있었다.

“이 멍청한 놈아, 넌 눈이 없어? 머리가 없어? 그놈이 뭐로 보여? 그렇게 모르겠어? 그놈이 네 눈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기는 했냔 말이다.”

“혀, 형…….”

“병신아, 그놈이 반갑다고 해서 정말 반가워하는 줄 알았어? 잘 지내고 싶다는 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소꿉장난이나 치고 놀자는 건 줄 알았냐고? 머리가 비었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이 바보 같은 놈아!”

방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나직하게 죽인 목소리가 거침없이 권기철의 고막을 두들겼다. 권기철은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권기영을 보며 벼락을 맞은 듯 눈을 홉뜨고 있었다.

“건, 건준이가……, 그 새끼가…….”

약을, 나는 됐다는데 굳이, 더듬더듬 변명을 주워섬기며 떠넘기기 바쁜 이 얼간이는 지금 권기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권기영은 권기철을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병신이 얼간이 짓이나 더 하게 놔둘 수도, 놈이 어떻게 써먹을지 모를 꼬투리를 계속 주워 담게 놔둘 수도 없었다.

“김건준이 왜 누나랑 결혼한다고 했을 것 같아.”

권기영의 싸늘한 목소리에서 사납고 거친 빛이 가시자 그제야 권기철은 조금 진정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예쁘고 집안 배경 좋은 여자가 누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누나에게――네 앞에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해.”

“왜……내 앞에…….”

권기영은 ‘네 앞’이라는 말에 은연중 힘을 주며 무릎을 구부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권기철에게 고개를 가까이하고 녀석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놈이 깨끗이 다 잊었을까? 네가 저지른 짓을 뒤집어쓰고 쫓겨간 걸? 그 일 때문에 아버지가 목을 매고 어머니가 정신이 나갔는데? 누나와 결혼하려 하고 아버지의 신임을 사며 네 앞에 나타난 게 정말로 단순한 우연일 거라고 생각해?”

딱하다는 듯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느리게 한마디 한마디 귀에 파고들수록 권기철의 낯빛은 하얗게 바래 갔다.

“놈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너한테 말해 주는 이야기 말고 놈의 본심 말이야. ――잘 생각해 봐. 왜 지금인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는데 왜 이제 와서 나타났을까.”

권기영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얼굴로 혼란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권기철을 한동안 말없이 구석구석 바라보다가 녀석의 귓가에 대고 아주 나직이 속삭였다.

그놈은 너만 부수려는 게 아니야.

권기철은 부르르 어깨를 떨며 눈을 부릅떴다. 충격을 받은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망연히 권기영을 응시한다.

권기영은 녀석이 놈을 처음 마주쳤던 순간 덜컥 떠올렸다가 막연하게 묻어 두었을 불안을 다시 파냈다. 그의 삶에서 여태 거의 있을 리 없었던―있었다 한들 형에게 매달려 징징거리면 금세 어떻게든 해결되었던―위험이, 지금은 형조차 싸늘하게 화를 낼 정도로 급박하게 코앞까지 닥쳐와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너, 그놈 당해 낼 수 있겠어?”

――아닐걸.

권기영의 나직한 물음은 이미 대답을 담고 있었고, 그 대답은 선뜻 대꾸를 하지 못하는 권기철도 알고 있었다. 권기철은 허세로 뒤덮인 머리이나마―혹은 그 허세 때문에 오히려 더욱 정확하게―놈이 자신에게 넘치도록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놈이 작정을 하고 이빨을 드러낸다면 거기에 꼼짝없이 물어뜯기고 말리라는 것도.

권기철의 어깨가 떨렸다. 노골적으로 날아든 물음으로 인해 저 밑바닥에서 고개를 든 것은 무의식 아래 묻어 두었던 열등감이었고, 공포에 절어 버린 분노였다.

권기영은 공포와 분노, 불안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조차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권기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냉랭하게 일침을 박았다.

“그런데, 그놈이 주는 약이나 받아먹고 있어?”

권기철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현실적으로 겁이 더럭 솟았는지 입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 말은 고작해야 어떡하지, 형, 그런 말들일 걸 권기영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놈이 다시는 네게 위협이 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

“지금 당장만의 문제가 아니야.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결한다 해도 다시 십 년 뒤, 이십 년 뒤, 끈질기게 나타나겠지. 그때쯤이면 네가 지금보다 더 신변에 신경을 써야 할 시기일 텐데.”

권기철의 낯빛이 점점 더 시커멓게 물들었다. 권기영은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귓가에 입술을 바싹 댔다. 권기철이 흠칫한다.

“다시는 못 나타나게 해야지. ……죽을 때까지.”

비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주 낮아서 권기영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권기철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미묘하게 비틀린 발음 속에 담긴 의미까지. 권기영의 손 안에서 녀석의 어깨가 푸드덕 떨렸다.

권기영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려 권기철을 보았다. 형이 하는 말은 언제든 절대적으로 옳았다는 걸 알고 있는 녀석은, 시커멓게 일렁이는 낯빛으로 형형하게 권기영을 보았다.

“도와주마.”

권기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움찔하는 권기철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주면서 알았지, 하고 말을 이었다.

“안심하고 진정해. 다 잘 될 거니까. 여태 늘 그랬잖아. 당장은 아주 큰 문제인 것 같아도 지나고 보면 별일 없이 지나갔었지?”

권기철은 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러니까 진정해. 꼴사나운 얼굴 그만두고. 공연히 이상한 기색을 보여서 괜한 의심 사지 마라. ……괜찮아.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도와준다’고, 권기영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권기철은 여전히 낯빛이 거무죽죽했지만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을 거다. 그러니 다시는 못 나타나게 해야 해.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미묘한 희열이 녀석의 표정 위로 떠올랐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주먹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 * *

한 시간 남짓한 음반이 다 돌아가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던 피아노 소리가 그치자 권기영은 누가 깨운 듯 눈을 떴다. 저녁 약속으로 나가기 전에 시간이 떠 잠시 눈을 붙였었다.

적당히 2, 30분 있다가 나갈 채비를 하면 시간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권기영이 헤드폰을 벗자 바깥에서 낯익은 목소리들이 흘러들어 왔다. 창 아래 뜰에 누이와 김건준이 있는 모양이다. 외출했다더니 그새 돌아왔나 보다. 사이사이 권기철의 목소리도 섞이고 있었다.

권기영은 얼음이 다 녹아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커피잔을 들고 창가로 나갔다.

“…….”

권기영은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무심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김건준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거의 일주일은 못 본 것 같다. 그나마 밤에 본 것까지 꼽아서 그렇고, 이렇게 평소에 보는 건 거의 달포만인 듯했다.

새로 손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제반 상황이 썩 좋지 않아 그가 발을 들이민다고 했을 때부터 전망이 좋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놈의 수완이 워낙 뛰어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그럭저럭 풀어가는 것 같더니, 지난달에 입찰 하나가 어긋나면서 그 뒤로 줄줄이 일이 꼬이는 모양이었다. 이미 그 바닥을 틀어쥐고 있는 업체들이 합심해서 앞길을 막아 놓자고 작정한 눈치다.

그에게 상당히 큰 금액을 걸어 놓은 권기영의 아버지는 ‘그 남자라면 믿고 지켜봐도 괜찮다.’라고 하고 있었지만 딱히 낯빛이 좋지는 않았고, 보고가 들어오는 내용으로 봐서는 당분간은 활로가 트일 길이 멀어 자칫 운이 없으면 이러다 토막 나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권기영이 보기에도 처음부터 다소 무리 같아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아니나 다를까 싶었을 텐데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의외인 걸 보면, 뜻밖에 권기영 자신도 의식 못 하는 사이에 저 남자의 사업 수완만큼은 크게 사고 있었던 모양이다.

놈도 고전할 때가 있어야지, 아니 권기영으로서는 놈이 일을 다잡느라 잠시도 틈이 없는 편이 나았다. 요 일주일 남짓, 밤마다 ‘오늘 밤에는 오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를 받고 있었다. 늘 자정이 되기 한두 시간 전에 보내는 걸 보면, 일에 치여서 나날이 악전고투를 하는 와중에도 클럽에 갈 시간은 내 보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막판에야 단념하는 듯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 때문인지, 혹은 낮에 보는 게 오랜만인 탓인지, 확실히 김건준의 얼굴선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초췌해졌다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 살이 조금 빠졌다. 그러나 힘들거나 지친 내색은 전혀 없이 그는 여느 때처럼 선선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에는 누이, 그리고 그 앞에 권기철.

그 셋이 같이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누이와 김건준의 앞에서 권기철이 아령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말을 섞고 있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늘어놓는 누이와 그 옆에서 그녀를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며 다정하게 대꾸를 해 주는 김건준은 몹시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였다. 권기영은 소리 없이 코웃음 쳤다.

아무렴, 몹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남자는 단정해 보이는 거죽 안에 괴물을 숨기고서 밤마다 남자를 강간하는 미친놈이었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는 곱고 아름답게 웃으며 그 뒤로는 남자의 행적을 의심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까부터 가끔 시계를 보곤 하던 누이가 “나갈 준비 하고 올게요. 마사지 예약 시간 다 됐어.”라며 일어났고, 그녀가 떠나간 자리엔 김건준과 권기철만 남았다. 무난하게 흘러가던 대화가 뜸하게 뜨는가 싶었다. 권기철은 입을 꾹 다물고서 아령만 천천히 흔들며 흘끔 김건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거두었다.

멍청이. 별다른 기색 보이지 말라고 했었는데. 권기영은 속으로 혀를 차며 커피를 마셨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권기철을 쳐다보는가 싶던 김건준이 고개를 희미하게 기울였다.

“무슨 일 있었어?”

“……어?”

“아까부터 왠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싶어서. ――지난번에 우리 가게에서 보고 헤어질 때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랐다든가, 아니면 무슨 말이라도 들었다든가…….”

김건준이 눈가에 웃음을 짓는 걸 보며 권기영은 혀를 찼다. 놈은 이미 얼마간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내려다본 권기영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노골적으로 미심쩍은 눈치를 풍기고 있는 권기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제 생각만으로 그럴 리는 없다는 것을.

조금 당황한 듯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며 김건준을 노려보던 권기철이 불쑥 못마땅하게 입을 열었다.

“기영 형한테 한소리 들었어.”

“기영 씨한테? 뭣 때문에?”

“너 그날 나한테 가루 줬잖아. 그것 때문에 형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애초에 나한테 그런 건 왜 줬어.”

네가 안 줬더라면 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고 투덜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권기철을 보며, 권기영은 감탄했다. 저 정도면 저 녀석치고 상당히 선방이다. 제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고 화를 내는 태도가 딱 녀석다워, 저거라면 저 마뜩잖아 했던 눈치도 충분히 자연스럽게 납득이 가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저 녀석은 솜씨 좋게 둘러대려는 의도였다기보다는 정말로 김건준에게 ‘네 탓이다’라고 불평하고 싶었을 뿐이었겠지만.

“아아, 그거……. 그렇게 질 좋은 약은 워낙 귀해서 너한테만 조금 줬던 건데 그랬구나. 미안하게 됐다. 기영 씨한테도 내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려야겠네…….”

김건준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누그러진 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른 곳을 헤매지도 않고 곧바로 권기영과 마주치는 눈매는, 그러나 느슨하게 휘어지며 웃음 짓고 있었다. 권기영이 거기에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권기영이 권기철에게 매운 소리를 할 줄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웃음이다.

“…….”

권기영은 쓴 입맛을 커피로 넘기며 창가에서 물러났다. 그 한 모금으로 비어 버린 잔을 내려다보다가 방에서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어찌 되었든 무슨 쓸데없는 소리나 주워섬길지 모르는 저 얼간이를 저대로 더 두고 보고 싶지도 않았고 제풀에 물러났다고 비치고 싶지도 않았다.

썩 내키지는 않는 걸음이나마 권기영이 뜰로 나가자, 그가 내려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김건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많이 시끄러웠습니까?”

“어, 형 왔어?”

김건준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린 권기철은 권기영과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김건준과 권기영 사이라는 위치를 못내 거북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재미난 얘기들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지.”

권기영은 벤치에 앉으며 권기철을 보았다. 권기영의 시선이 차가운 걸 느꼈는지 권기철은 잠시 어물거리다 “난 샤워 좀 하고 올게. 운동을 했더니 땀이 많이 나서.”라고 변명처럼 중얼거리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권기영에게, 김건준이 느릿하게 웃음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모처럼 뵈니 반갑군요. 오늘은 여유가 있으신가 봅니다. 이 시간에 댁에 계시는 건 오랜만인 것 같은데요.”

“저녁에 나가 봐야 합니다. 김건준 씨야말로 여유로우신 모양입니다. 일이 잘 풀리시나 보지요.”

권기영의 비아냥을 이내 알아차린 김건준은 그러나 기분 상한 빛도 없이 웃었다.

“노력하는 중입니다. 어제 목포에 내려갔다 새벽에 올라왔는데, 밤에 다시 내려가 볼 예정입니다. 인천항은 한동안 상황이 막힐 것 같으니 그쪽으로 알아볼까 하고요.”

연이어 목포까지 왕복이라. 권기영은 헛웃음을 웃었다. 비단 목포뿐 아니라 지금 그의 사업 상황을 생각하면 발이 닳도록 뛰어다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텐데 그 와중에 오늘같이 약혼자와의 예정까지 챙기다니,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체력도 좋군요. 아직 결혼 예정일까지는 날짜가 좀 남았는데 그때까지 일과 결혼 준비를 병행해 가며 버티려면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안 되시겠습니다.”

“하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는 눈 붙이는 것조차 사치라고 여길 만큼 가쁘게 지내 왔거든요. 지금은 이렇게나마 쉴 시간도 있으니 오히려 나태할 만큼 여유롭다고 해야지요.”

권기영은 김건준이 여상하게 하는 말에 그의 과거를 떠올렸다. 한순간에 밀려 떨어진 저 까마득한 밑바닥에서부터 지금의 자리까지 기어 올라오는 동안 그가 어떠한 나날을 보내 왔는지. 그날들이 애초에 남보다 월등했던 수컷을 손댈 수 없는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확실히 그때에 비해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밤중에 잠시 잠깐 사람 만날 한두 시간을 도무지 뺄 수가 없으니 말이죠. 오늘도 밤엔 목포에 가야 하니 사람 만날 짬이 없겠어요.”

오늘도 클럽은 패스다. 권기영에게 시선만 돌리며 그 요지를 말한 김건준은 눈이 마주치자 가느스름하게 웃음 지었다.

“권기영 씨도 바쁘실 텐데, 이참에 푹 쉬어 두십시오.”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요.”

차갑게 대꾸한 권기영은, 빙긋이 웃는 한편 시계로 시선을 주는 김건준을 일별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듯 앉아 있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그는 아마도 누이를 바래다주고 나면 그 길로 곧바로 목포로 내려갈 성싶었다. 과연 야윌 만하다.

“김건준 씨야말로 누나가 나오기 전까지만이라도 눈 좀 붙이고 쉬시지요.”

길어야 고작 일이십 분이겠지만, 하고 시계를 보며 말한 권기영은 미묘한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건준에게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김건준은 이내 아니요, 하고 웃었다.

“제가 지쳐 쓰러지면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이라서 말입니다.”

“…….”

“하지만, 그러면 그 말씀에 기대어 조금 쉬어 볼까요. 아닌 게 아니라 요 며칠 잠이 좀 부족하다 싶기는 하던 참입니다.”

김건준은 반듯하게 앉아 있던 몸을 아주 약간 뒤로 기울이는가 싶더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낮게 가라앉으며 곧 조용한 침묵이 찾아왔다.

사업이 안 풀리긴 어지간히 안 풀리는 모양이다. 하긴 바로 며칠 전에도 중요한 입찰 하나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떨어졌다고 들었다. 그런 일이 지난달부터 계속 거듭되고 있어, 혹자는 이 남자가 여태 고작 몇 년에 지나지 않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얻어 왔던 걸로 그의 평생 치 사업 운을 다 써 버린 게 아니냐고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권기영은 김건준의 살짝 팬 뺨이며 거칠어진 턱선 따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업의 성패란 의외로 한순간이라 저런 식으로 조금씩 천천히 야위어 가다가 결국은 어느 순간 재기할 수 없이 망가진 인간을 권기영은 수없이 봐 왔다. 과연 이 남자도 그런 치가 될 것인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이 남자가 과연 얼마나 더 오래 살아 있을 것인가.

“오래전에 기영 씨 방에서 책을 보다가 한 십여 분, 저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잠든 듯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던 김건준이 잠꼬대처럼 낮은 목소리로 불쑥 중얼거렸다.

“눈을 뜨니까, 다른 일을 하고 있던 기영 씨가 절 보더니 ‘일어났어?’라고 한마디 툭 던지곤 다시 그대로 하던 일을 하셨었죠.”

권기영은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때라면 아직 그가 고교생으로 가끔 권기영의 방에 찾아들곤 했을 무렵일 테니 그런 일이 있었음직도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서 자도 괜찮은 거구나, 그때 처음 생각했어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김건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권기영은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끝에 낮은 웃음과 함께 돌아온 건 “그게 답니다.”라는 짤막한 말이었다.

“…….”

놈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수 없어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작도 끝도, 별것 없는 싱거운 얘기다. 놈의 뜻 모를 이야기는 그걸로 끝났다.

“잠시만 눈 붙이겠습니다. 5분 뒤에 깨워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김건준은 이번에야말로 침묵에 잠겼고 그 뒤론 아무 말도 없었다.

*

놈은 정말로 운을 다 썼는지도 몰랐다.

놈의 성과에 대해 신통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 길로 가면 저쪽에서 막고, 저 길로 가면 다른 쪽에서 붙드는 상황 속에서 그가 계속 버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권기영의 아버지에게서도 여유가 사라졌다. 넉넉하게 웃으며 ‘기다려 보자’고 말하던 아버지는 표정 없이 묵묵히 상황을 노려보고 있었고, 권기영에게는 그것이 아버지가 언제쯤 손을 떼야 할까를 가늠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권기영은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저 남자가? 저 남자는 저 어느 아득한 밑바닥에 처박아 놔도 결국은 꾸역꾸역 기어올라 와 그들의 머리통을 짓밟고 설 남자였다. 운 따위, 제 것을 다 썼다면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먹어 치우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까――지금밖에 없다.

정말로 놈의 숨통을 송두리째, 뿌리까지 뽑아 버릴 거라면 지금밖에 없었다. 놈이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는 이때.

권기영은 슬슬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럴 즈음이었다, 김건준에게서 부고를 받은 것은.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목을 매어 죽은 그의 어머니는 심신상실에 우울증을 앓아 왔다고 했다.

십여 년을 요양 병원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유난히 해가 화창한 날 목을 매달았을 때 김건준은 전라도 저 아래까지 내려가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그 소식을 들은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여섯 시간쯤 걸릴 겁니다. 다른 곳에는 연락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 데도 연락하지 마십시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고, 다른 사람들을 비롯해 권기영이 소식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저녁, 귀경해서 영안실의 채비를 다 마치고 난 김건준이 연락을 해서였다.

아무의 손도 빌리지 않고 홀로 묵묵히 장례 절차를 알아보고 연락하고 처리한 김건준이 유일한 상주였다. 도와줄 친척은 거의 없는 듯 고용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와 더불어 장례식장을 찾은 권기영은 상복을 입고 묵묵히 선 김건준을 보며 그냥 놔둬도 죽겠군, 하는 생각을 불쑥 했다. 그만큼 놈은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초췌해져 있었고, 평소 늘 여유로운 얼굴로 선선하게 웃곤 하던 놈이 거무죽죽한 낯으로 표정을 지우고 있는 것이 몹시 낯설었다.

딱히 돕는 사람이 없는 식장을 둘러본 아버지가 ‘발인 때까지 네가 여기 앉아서 좀 거들어라.’라고 말해 권기영이 그곳에 남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놈은 말수가 줄고 낯빛이 가라앉았을 뿐, 그 외에는 다른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연이어 몰려드는 장례 관련 업자들과 비용 이야기, 절차 이야기 등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고 요양 병원 정리와 장지 연락 등의 현실적인 일들을 빈틈없이 하나하나 처리하는 그는 슬픔에 잠길 겨를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남의 시선도 있어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권기영은 만 이틀 반을 거기에 있는 동안 놈과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워낙 조문객이 많이 오기도 했지만, 한밤중이 되어 한적한 시간에도 놈은 묵묵히 빈소 앞에 앉아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친척은 거의 없었다. 아주 가끔, 놈이 연락한 것 같지 않은데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놈과 어렴풋이 닮은 데가 있는 사람들이 한둘씩 오곤 했지만 그들도 금방 훌쩍 돌아가 버리곤 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오래전 김건준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지방으로 내려갈 즈음 친척들 모두 등을 돌려 거의 연락이 끊기다시피 했다는 사정을 그네들끼리 수군거렸고, 또 누군가는 김건준더러 들으라는 듯 “머리 좋고 돈 잘 벌면 뭐하나, 사람 죽인 죗값을 제 부모가 치렀는데.”라고 비아냥거렸다.

권기영은 묵묵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김건준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놈이 홀로 남았음을 깨달았다. 놈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혼자였지만, 이제는 정말로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놈은 이제 기댈 데도 없었고 마음 붙일 데도 없는 천애 고아였다.

“…….”

이 괴물 같은 남자에게도 그런 인간 같은 단상이 있을까.

권기영은 그런 생각을 하다 입매를 비틀고 말았다.

그런 인간 같은 단상이 있으니 이런 괴물이 되어 버린 거지.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그 이유. 그 무렵. 그때의 감정.

그것은 필경 원망이나 원한, 그런 것들이리라고 생각했지만, 장례를 마칠 때까지 놈은 그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침묵할 뿐이었다.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은 단출했다.

그나마 화장터까지는 몇몇이 따라갔지만 장지에서 돌아오는 자리에는 김건준과 권기영뿐이었다.

“바쁘신 때일 텐데 오래 머무르셨군요. 고맙습니다.”

김건준이 그제야 여느 때처럼 권기영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그 내용은 무척 여상하고 담담해, 권기영은 물끄러미 김건준을 보다가 “별말씀을요.”라고 대답했다. 놈이 화를 낸다거나 침울해하는 모습을 볼 거라곤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평소와 같은 모습에 조금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세워 둔 차로 가자 자연스럽게 운전석 쪽으로 돌아드는 김건준에게 권기영은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말렸지만 김건준은 굳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피곤하셨을 텐데 조수석에서 눈 좀 붙이십시오.”

“김건준 씨야말로 거의 안 주무셨을 텐데요.”

그러나 김건준은 권기영에게 끝내 고개를 젓곤 운전석에 앉았고, 권기영은 입매를 찡그렸지만 굳이 실랑이를 할 생각은 없어 조수석으로 갔다.

휴일 저녁이었다. 귀경길은 막힐 게 뻔해, 두어 시간은 족히 운전을 해야 할 거다. 권기영은 사흘 내내, 자신이 아는 한은 한 번도 제대로 눈을 붙이지 않은 김건준을 흘끔 쳐다보곤 말없이 앞을 보았다.

차가 출발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김건준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 안에서는 상대방이 어찌나 목청 높여 떠드는지 옆에 앉은 권기영마저 어렴풋이 그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방의 현장에 있는 모양인 그 남자는 당장 일이 넘어갈 판인데 어쩔 거냐고 떠들어 댔고 그의 말을 한동안 듣고 있던 김건준은 “내일 정오까지 그쪽으로 내려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맺고 전화를 끊었다.

권기영은 어이없이 놈을 보았다. 이미 저녁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벌써부터 막히기 시작하는 걸로 보아 귀가하면 한밤중일 텐데, 내일 정오까지 지방 현장이라. 몇 시간 잠깐 눈만 붙이는 둥 마는 둥하고 바로 다시 달려갈 모양이다.

“김건준 씨 하시는 일이 망할 판이라더니 사실인가 봅니다. 제대로 쉬지도 않고 바로 달려가시겠다니.”

“예, 상황이 좀 급해서요. 원래라면 오늘 밤에 당장에라도 내려가 봐야 합니다.”

권기영이 코웃음 치며 한 말에 김건준은 불쾌한 빛도 없이 선선히 대답했다. 차선을 바꾸어 차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그 차선마저 앞이 막혀 속도를 줄여야 했다. 내비게이션에 표시되던 도착 예정 시각이 점점 더 늦춰지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차 돌려서 곧바로 내려가시는 게 낫겠습니다. 차까지 이렇게 막히는데.”

저는 적당한 터미널에 내려 주시면 됩니다, 하고 반쯤은 진담으로 중얼거리는 권기영에게, 김건준은 도착 예정 시각을 흘끗 쳐다보며 여상하게 말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영 씨 구멍을 먹어야겠어서 말입니다. ……차가 많이 막히는군요. 더 오래 참을 자신은 없는데.”

권기영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이라 일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옆에서 김건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장례식 내도록 그 생각을 했습니다. 기영 씨에게 쑤셔 박고 싶다고. 어디 화장실로라도 갈까,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서 박아 버릴까, 그러다가 막상 정말로 박아야겠다고 일어서려고 하면 때맞춰 사람이 찾아와서 그만둬야 했지만 말입니다.”

권기영은 고개를 돌려 김건준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미친 새끼.” 하고 혼잣말처럼 불쑥 중얼거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놈은 아무렇지 않게 진담을 하고 있었다. 놈은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던 거다.

“그냥 쉽게 말하십시오. 분풀이가 필요하다고.”

권기영이 이를 갈며 말하자 “분풀이?” 하고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뭐에 대한 분풀이입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죽고 어머니마저 그렇게 죽은 분을 풀어야겠다고, 공연히 에두를 필요 없이 그냥 그렇게 말하란 말입니다.”

김건준은 웃는 듯 마는 듯,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앞을 보았다. 점점 속도가 줄어드는가 싶던 차는 이제 가다가 섰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기영 씨 잘못인 것 같습니까?”

“아니요.”

“예, 아닙니다.”

권기영이 잠시 사이를 두고 조용하나 단호하게 대답하자 놈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지에서 출발할 때 이미 저녁이었던 하늘은 확연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주위에는 온통 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줄지은 자동차 등불의 양쪽으로 가로등 하나 없는 들은 밤바다처럼 시커메지고 있었다.

차가 너무 막히는군요, 놈이 중얼거리더니 차선을 바꾸었다.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차들 사이로 끼어들어 갓길 쪽으로 붙으면서 놈은 말을 이었다.

“기영 씨가 뭘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아 이참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그리고 이젠 어머니까지―가 돌아가시게 된 경위를 생각하면 언제나 괴롭고 후회스럽습니다. 내 머리를 찍어 버리고 내 목을 잘라 버리는 생각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해 왔습니다. 아마 앞으로 계속 그럴 테고요.”

갓길에서 옆으로 난 길로 빠진 차는 어둑한 들판 가운데로 난 좁은 길을 달렸다. 그 길 끝에는 시커먼 숲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남김없이 모두 제 잘못입니다. 그걸로 다른 사람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그 몫까지 원망받아야 할 사람은 저겠죠. 제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은 결과이니까요.”

차는 숲으로 들어설 무렵, 어둑하던 하늘은 이미 군청으로 가득했고 그 사이사이로 별이 보였다. 숲은 나무가 듬성듬성해 그리 울창하지 않았는데도 밤이 내려앉은 탓인지 온통 어두웠다. 차가 멈춘 곳은 무성한 수풀 사이로 앙상하게 솟은 소나무 사이였고, 그 앞으로는 저만치 국도 빼곡하게 차들의 빨간 불빛이 늘어선 게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시동을 끈 김건준은 미심쩍게 놈을 노려보는 권기영을 평연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에 대해서’입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저이지만, 저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입니다.”

“내가――.”

“예, 기영 씨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놈이 피식 웃으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권기영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놈이 입을 맞추었다. 이미 수백 수천 번이나 맞닿았던 입술이지만 이렇게 다 말라 바삭바삭하게 일어난 입술은 처음이었다. 놈의 낯빛만큼이나 초췌하게 바싹 갈라진 입술이 왠지 낯설다.

묵묵히 입술을 벌린 권기영의 입안에 문득 어렴풋한 피 맛이 번졌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거칠어져 있는 입술에 갑자기 속이 치민 권기영은 놈의 입술을 씹었다.

권기영은 아주 쉽게 터져 버리는 입술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빨았다. 권기영이 먼저 놈의 입술을 빠는 건 처음이다.

그러나 이건 입맞춤 따위가 아니다. 그저 화가 나서 놈을 짓씹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왠지 놈은 잠시 우두커니,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있는다. 한층 더 속이 뒤틀린 권기영은 말없이 침묵하는 놈의 입술을 그렇게 한참 짓씹으며 빨았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늘어놓지 마. 겉멋 든 말로 포장하지 말고 그냥 말해. 네가 바라는 게 뭔지.”

자신의 잘못이다, 다른 사람을 원망한 적은 없다, 담담한 낯으로 지껄여 대는 게 거슬렸다. 그래 봐야 결국 놈이 바라는 건 보복이고 앙갚음이다. 권기영을 뼛속까지 짓밟으며 통쾌하게 웃는 게 놈이 바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위선적인 말로 포장한다 한들 결국은 그거다.

권기영이 입술을 바싹 맞댄 채 나직이 내뱉자 잠시 침묵하던 놈이 문득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웃는다.

“기영 씨는 몇 번을 말해도 모르는군요. 나는 당신에게 모든 걸 다 말했는데. 아마 당신은 끝까지 모를 겁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상관없습니다.”

놈이 권기영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등 뒤에서 시트가 넘어가자 놈이 권기영을 밀어 쓰러뜨리며 그 위로 엎드렸다. 거침없이 권기영의 바지 속으로 밀고 들어온 손이 우악스럽게 성기를 움켜쥔 순간 권기영은 움칫하며 몸을 굳혔다.

“나는 결국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가 가슴을 치고, 내 어머니가 죽을 때 눈도 편히 감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만 쫓았고, 그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내게는 달리 남은 것도, 관심 둘 것도 없습니다. 당신밖에는.”

소름이 끼쳤다. 조용조용 속삭이는 놈의 말은 빈말도 과장도 없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집요함.

놈이 잡아 뜯듯이 권기영의 옷을 풀어헤쳤다. 양복 바지도, 넥타이도 셔츠도, 순식간에 피부 위에서 미끄러진다. 놈이 대번에 권기영의 목덜미를 물었다.

“……!!”

권기영이 소리 없는 헐떡임을 삼켰다. 잘근잘근 씹어 내리던 김건준이 가슴팍까지 내려와 권기영의 유두에 굶주린 듯 달라붙었다. 권기영의 드러난 허벅지는 그 위를 문질러 대는 놈의 성기에서 배어나기 시작한 선액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이대로 가는 겁니다.”

조용하게 귓가를 어루만지는 목소리는 몹시 부드러웠는데도 무시무시한 짐승이 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짐승이 속삭였다.

죽을 때까지.

놈은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놈은 죽을 때까지 권기영을 놓지 않을 터였다. 죽을 때까지 권기영을 쫓고, 손아귀에 움켜쥐고, 만신창이로 일그러뜨릴 터였다. 권기영이 더 이상 권기영이 아니게 될 때까지.

순간 권기영은 심장을 두들겨 맞은 것 같아 눈을 크게 부릅뜨고 만다.

“크, 헉, 억……!!”

예고도 전희도 없이 놈이 아랫도리를 파고들었다.

한동안 열린 적이 없어 뻑뻑하게 조이는가 싶던 아래는, 그러나 놈의 성기가 몸속을 반쯤 파헤치고 들어온 순간 마치 그제야 그것이 익숙하고 낯익은 물건이라는 걸 기억해 낸 것처럼 이완되며 단숨에 놈의 물건을 끝까지 먹어 치웠다.

몸이 놈을 기억하고 있었다. 몸속 구석구석까지 놈이 새겨 놓은 감각이 몇 주 만인데도 바로 어제 일처럼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권기영은 그의 이성과는 상관없이 물결치듯 연동하며 놈의 물건을 받아들이면서 희열하는 아랫도리를 깨달았다. 머릿속으로 치솟은 구역질은 여전한데도 저릿저릿하게 아래를 달구는 감각 속에서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든 권기영의 성기는 선액을 흘리며 꺼덕거리고 있었다.

놈이 굶주린 듯 권기영의 몸을 닥치는 대로 물고 빨았다.

“으, ……으! 아! ……!!”

권기영은 부옇게 흐려오는 눈으로 놈을 내려다보았다. 초췌하고 마른 얼굴은 평소와 똑같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도 왠지 모르게 일그러져 보였다. 마치 미친 듯이 목말라하는 사람처럼, 굶주림을 주체할 수 없어하는 것처럼 권기영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사흘 동안 침묵하며 그 속에 눌러 담아 왔던 게 일시에 터져 버린 것처럼.

“――.”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이걸 마지막으로 해야 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굴욕으로 가슴이 새카맣게 타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고, 몸뚱이가 제멋대로 환희하며 떨리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고, 놈이 권기영을 유린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놈이 이유 모르게 눈에 걸리는 것도, 자신의 기분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도, 때로 참을 수 없는 감정에 속이 뒤집히는 것도 모두 이걸로 마지막이다.

죽을 때까지? 개소리.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모두 다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이건 마지막 전별이다.

권기영은 놈의 팔뚝을 잡아 뜯을 듯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간신히 힘을 풀었다. 덜덜 떨리며 멈칫거리는 두 팔은 한동안 망설이다 어느 순간 놈의 등을 세게 부둥켜안았다. 다리마저 놈의 허리를 감았다. 빈틈없이 꽉, 한몸이 된 것처럼.

놈이 멈칫했다. 마치 상상조차 못 했던 몹시 기묘한 일이라도 벌어졌다는 듯, 추어올리던 허리마저 멈춰 버린다.

‘――.’

권기영은 거친 숨소리를 섞어 놈의 귓가에 짧은 말을 속삭였다. 놈은 잠시 동안 말없이 침묵하다가 다음 순간 으스러질 듯 권기영을 끌어안았다. 빈말도 때로는 듣기 좋군요, 낮은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놈은 단숨에 권기영을 집어삼켰다.

* * *

전화 속에서 권기철은 낮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금 형이 말한 표지판 앞에서 오른쪽으로 빠졌어. 형은 어디쯤이야?」

“너보다 십 분 거리 뒤. 막 방금 석면 휴게소 지났어.”

권기영이 냉담하게 대꾸하자 권기철은 그제야 아주 조금 마음이 진정된 듯 응, 하고 중얼거렸다. 권기영은 시계를 보았다. 이제 슬슬 그가 외진 숲길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동시에 약이 들을 즈음이기도 하다.

“조심해라.”

「걱정 마, 형. 그럼 끊을게.」

이내 전화를 끊는 권기철은 지금 권기영보다 차로 십 분쯤 앞선 곳에서 바이크를 달리고 있었고, 그보다 몇 분 거리 앞에서 김건준은 외진 길을 달리고 있을 터였다.

권기영은 전화를 조수석에 던져 두며 지그시 액셀을 밟았다. 밤이 깊어 거의 다니는 차가 없는 지방 국도를 달리는 그의 심장이 일렁거렸다. 권기영은 혀를 차며 거의 끊다시피 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긴장할 것 없어. 다 잘 될 거다. 권기영은 창백한 보름달 아래 아무것도 앞을 가로막은 게 없는 도로를 달렸다. 얼마 있지 않아 조금 전 권기철이 전화 속에서 말했던 표지판이 나왔고, 권기영은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중장비 차 한 대 정도가 지나갈 만큼만 포장이 되어 있는, 대낮에도 그리로 지나다니는 차가 거의 없는 산길로 접어든다.

고요한 보름밤이다.

김건준이 사라지는 밤이었다.

청양의 물류 창고에서 유통이 막혔다는 소식은 권기영에게 먼저 전해졌다. 청양에서 막히면 그 뒤로는 줄줄이다. 시한폭탄에 불이 붙었다는 것과 같은 소식은, 투자한 것이 있으면 회수를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라는 조언과 함께 날아들었다.

그럴 기미가 보인다는 연락은 이미 며칠 전,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고 미리 귀띔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저녁 늦게 ‘청양 도화선 점화. 잘 챙기시오’라고 문자가 왔을 때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가만히 전화를 그러쥐었다.

오늘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김건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권기영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시선을 옮기며 이미 차려져 있는 술상 앞의 자리를 권했다.

‘요즘 밤에 운전해야 할 일이 잦아서, 죄송하지만 술은 다음에 마시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차 사고가 나셨다고요?’

‘그 얘기가 벌써 김건준 씨 귀에까지 들어갔습니까? 사고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뻑뻑해서 주차하다가 가벽에 살짝 닿았을 뿐이라서요. 범퍼에 실선이 간 정도입니다.’

정비를 맡겼으니 이삼일이면 브레이크도 멀쩡해져서 돌아올 겁니다, 라고 대수롭잖게 대꾸한 권기영은 그에게 따라 주려고 들었던 술병을 내려놓고 그 대신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던 차를 따라 주었다.

곧 김건준이 권기영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고, 그의 손을 거쳐 아버지에게로 갈 그 내용물을 훑어본 권기영은 잠시 침묵하다 ‘일이 요즘 좀체 안 풀리시나 봅니다.’라고 운을 뗐다. 김건준은 평연하게 웃었다.

‘아버님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고, 그리고 오래지 않아 회복될 거라고도 말씀 전해 주십시오.’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그렇습니까? 요즘은 거울 볼 시간도 없어서요. 아무래도 바쁘다 보니 그런가 봅니다. 곧 나아질 겁니다.’

곧 나아진다, 벼랑 앞에 위태롭게 선 사업가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걸 권기영은 수차례 들어 봤다. 그들 중 정말로 회복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권기영은 그새 눈에 띄게 수척하고 거칠어졌는데도 여전히 여유가 엿보이는 김건준을 바라보았다. 언짢을 정도로 여유롭다. 그 몸에 밴 담대함이 눈에 거슬렸다. 인정해야 한다. 놈은 저 밑바닥까지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려도 결국은 다른 놈들을 죄 뜯어 발기고 기어오르고 말, 아마도 권기영이 다시는 보기 힘들 수컷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놈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곧 끝날 겁니다.’

잔을 들던 권기영은 김건준이 돌연 중얼거리는 말에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잔을 입으로 옮기며 그를 보았다.

‘오래 끌지는 않을 겁니다. 상황은 곧 호전될 거예요. 사람이 언제까지고 힘들기만 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아아, 일 이야기였나, 일순 서늘하게 멎었던 심장에 가만히 숨을 불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권기영에게 그의 가느스름한 시선이 날아왔다.

‘기영 씨는 좀 어떠십니까.’

‘저요? 저라면 별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한동안 채워 주지 않아서 엉덩이 속이 허전하겠다 싶었습니다만, 조금 더 참을 수 있으신가 보군요. 좋습니다. 굶주리다 못해 아무 놈이나 먹어 치우려 들어서야 곤란하니까요.’

권기영은 무표정하게 놈을 바라보았다. 그런 권기영의 표정을 즐거운 듯 낱낱이 살피며 눈을 가늘게 뜨는 놈에게, 권기영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김건준 씨 말고는 아무도 들이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하하,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인데요.’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린 놈은 싸늘한 표정으로 잔을 비우는 권기영에게 말을 이었다.

‘계속 힘들기만 한 인생은 없다고, 저를 처음 거두어 주셨을 무렵에 성 회장님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까지고 괴롭기만 할 수는 없다고. 맞는 말씀 같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저는 지금 상태로는 앞으로 시간이 지난다 해서 괴롭지 않아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놈과 그 짓을 하고 있는데 괴롭지 않다라, 아주 낙관적인 개소리다. 권기영의 비웃음을 놈은 이내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놈은 한동안 물끄러미 권기영을 바라보다가 흐리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기영 씨는 하나를 못 버려서 그런 겁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가 보지요.’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놈이 찻잔을 비웠을 때였다. 놈의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권기영은 직감적으로 그 전화가 청양의 상황을 알리는 내용임을 짐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전화를 받는 동안 김건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말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는 ‘알았어. 바로 가지.’라는 말만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같이 일어나죠. 저도 일찍 돌아가서 마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 ――그러고 보니 차를 정비 맡기셨다면, 뭐로 오셨습니까?’

‘아아, 집에 들를 시간이 없어서 그냥 택시로 왔습니다.’

‘그럼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급하신 것 같은데 가 보십시오. 저는 택시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청양으로 내려가 봐야 하는 일이라 1, 20분 차이입니다.’

청양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라고 아무 내색 없이 물으며 권기영은 김건준이 권하는 대로 그의 차에 탔고, 김건준은 별일 아니라고,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만 대꾸할 뿐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생각에 잠긴 김건준의 옆에서 권기영도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권기영이 그나마 입을 연 것은 집 근처에 이르러서였다.

‘근처까지 오신 김에 잠시 들렀다 가시죠.’

‘아닙니다. 바로 가 봐야 합니다.’

‘저런……, 누나가 아쉬워하겠군요.’

시계를 보던 김건준은 그 시선을 권기영에게 주었다. 권기영의 누이에 대해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서야 떠올린 듯한 빛이 놈의 눈에 스쳤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있었지, 라는 듯한.

집에 다다를 때까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끝에 김건준이 불쑥 ‘기윤 씨와는 결혼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응시하고 말았다.

‘처음 듣는 말이군요.’

‘그러실 겁니다.’

‘누나와는 이미 이야기를 마치신 겁니까?’

‘아니요. 기영 씨에게 처음 말하는 겁니다.’

권기영은 여상한 낯으로 그 말을 하는 놈을 바라보다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미심쩍은 시선을 주던 권기영을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던 김건준이 눈가에 언뜻 웃음을 띠었다.

‘갔다 와서 다시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예. 김건준 씨도 청양까지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좋은 결과 바랍니다.’

권기영은 그에게 마주 인사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기 전 아주 짧은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권기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친다.

그의 눈매가 언뜻 휘어지는가 싶었다. 동시에 권기영은 심장이 뜨끔하게 내려앉는 듯해 얼른 조수석의 문을 닫아 그 시선을 막아 버렸다.

곧 차가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의 기척을 등 뒤로 느끼며 대문 안으로 들어온 권기영은 전화를 꺼내었다. 권기철의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니, 싸늘하게 식은 건 손가락만이 아니다.

가슴속에서 서늘함이 가시지 않는 건 심장도 차가운 탓이다.

“…―.”

아까부터 줄곧 그렇다.

권기영은 운전대를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손에는 온기가 돌아와 있었지만 심장은 아까부터 계속 서늘했다.

권기영은 자신의 심장이 느리게, 그러나 무겁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손끝이며 발끝까지 피가 도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감각이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

놈을 뒤쫓으며.

보이지 않는 저 앞에서 앞서가고 있을 놈을 뒤쫓아, 오늘에야말로 놈의 숨통을 끊어 버리려 달려가면서.

라디오에서 자정을 알리는 시보가 울렸다. 권기영은 라디오를 꺼 버렸다. 슬슬 시간이 되었다. 입이 바싹 말라왔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게 천천히 약효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뚝, 끊기는 거라서요. 그전까지는 아무런 기미도 없이 잠잠하다가 말이죠.

권기영은 물통을 찾아 조수석 위를 더듬다 손에 걸린 조그만 비닐백을 내려다보았다. 안에 하얀 가루가 아주 약간 들어 있는 그 비닐백을 건네준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뭐 약 자체는 그냥 수면 효과뿐이지만요. 용량에 따라 효과가 나타나는 시각을 조절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이걸 먹고 운전 같은 걸 하면 아주 위험하니까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매우 느릿하고 미묘한 어투로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잇몸을 드러내던 그 얼굴을 떠올리며, 권기영은 무표정하게 차창을 열곤 비닐백의 내용물을 쏟아 버렸다. 저녁 자리에서 찻물에 대부분을 섞고 손톱만큼 남아 있던 가루가 밤바람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남자가 ‘쓰실 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덤으로 같이 드리지요. 그냥 잠잘 때 머리맡에 두면 더욱 깊이 잠들 수 있게 해 주는 방향제 같은 겁니다. 아무런 냄새도 없는 데다 병뚜껑만 따면 금방 휘발되기 때문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편하게 깊이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빙긋이 웃으며 건네준 조그만 병은 지금쯤 놈의 차 조수석 시트 아래서 텅 비어 뒹굴고 있을 터였다.

권기영은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축이며 다시 시계로 눈길을 주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됐다. 그 남자가 알려 준 대로라면 이제 곧이다. 곧 놈은 혼곤히 의식을 잃을 터였다. 운이 좋다면 그 뒤를 쫓아가고 있는 권기철이 손을 쓸 것도 없이 끝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

권기영은 저도 모르게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을 주다가 갑작스럽게 부우웅 힘을 받으며 나가는 감각에 멈칫 정신을 차리고 발을 들었다. 정신 차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권기영은 몸에 익지 않은 승차감에 혀를 차며 조금씩 속도를 높여 갔다. 도중에 휴게소에서 몇 번 갈아타고 온 차는 역시 오래 길들여 온 자신의 차가 아니라 불편하다. 이러다 오히려 내가 사고를 내기라도 하면 아주 웃긴 꼴이 되겠군, 권기영은 냉소를 흘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사고가 날 일은 없을 터였다. 권기영이 월등하게 운전을 잘한다는 사실은 제쳐 두고서도, 그가 달리는 길에는 다른 차라곤 한 대도 없었다. 오로지 권기영이 달리는 차뿐이었다.

이미 그는 울창한 산길에 들어서 있었다.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난 숲이 길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차 한 대 지나갈 만큼이나마 포장이 되어 있는 게 신기한, 낮에도 어두컴컴할 만큼 울창한 숲길이다.

산을 가로질러 뚫어 놓은 이 길은 원래는 도로가 날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래전 이 등지가 개발 소문으로 들썩였을 때 관련 부서의 행정 직원이 뒷돈을 먹고 서류에 도장을 찍어 준 탓에 아무런 쓸모도 효용도 없는 길이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발 건이 무산되자 한동안 부정부패로 인한 예산 낭비니 뭐니 떠들썩했었다.

그나마 청양 방면으로 뚫린 지름길이라곤 하나 중심가까지 가려면 오히려 돌아가는 데다 노면 상태는 나쁜데 시간 차는 거의 나지도 않아, 저질 시멘트로 덮어 놓은 이 거친 포장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길을 유용하게 이용할 만한 사람이라고 해 봐야 청양 외곽에 있는 철강 물류 창고로 가는 사람쯤일까.

――다른 차가 다니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 딱 한 번, 물류 창고에 거의 다 갔을 때 그쪽에서 나오던 차와 스친 적이 있긴 하군요.

언젠가 김건준과 더불어 일 관련 이야기를 할 때 놈이 웃으며 말했었다. 예산 낭비의 훌륭한 사례로 남을 길이에요, 라며.

굽이굽이 굽어진 이 울창한 길의 저 앞 어딘가에서 놈은 달리고 있을 터였다. 그 뒤로 권기철이, 그리고 다시 그 뒤로 권기영이 있다.

오늘이 놈의 마지막이다.

그렇게 될 터였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다면.

“…―.”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권기영은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며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놈은 오늘부로 영원히 권기영의 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를 다시 보게 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너는 내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때,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고 죽은 듯이 살라고 했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너는 계속해서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었을 테고, 나는 널 기억 아래에 잠가 둘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너를 죽이는 일은 없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권기영은 혀를 찼다. 운전대를 쥔 손만이 아니라 무심결에 액셀을 밟은 발에도 힘이 들어가, 차가 우우웅 소리를 내며 속도를 높였다. 텅 빈 길 위를 거침없이 달리는 차의 양옆으로 시커먼 숲이 흘러갔다. 숲 위로는 보였다 말았다 하는 보름달.

――형, 좋아해요.

권기영은 담배를 물었다. 냄새가 밸까 불은 붙이지 않았지만 뭔가를 씹어서 초조감을 달래야 했다.

――형을 정말로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오래전에 어느 풋내 나는 얼간이가 그런 말을 했었다.

――뭐든 할게요. 형이 원하는 건 뭐든.

그렇다면 너는 나타나지 말아야 했다. 그때도 얼마든지 나는 널 죽일 수 있었지만 기억 아래 잠가 두는 걸로 끝냈다. 그런 내 앞에, 너는 다시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권기영은 기어코 김건준을 죽이게 될 것이다. 모두 놈이 잘못한 것이다. 놈이 기어이 이렇게 만들고 말았다.

시커멓게 좌우로 흘러가는 울창한 숲 가운데서, 권기영은 일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서늘하게 달아올라 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희열 같은 흥분이다.

심장이 낮게, 느리게, 그러나 분명한 존재감을 주장하며 쿵, 쿵, 뛰었다. 열병이 머릿속을 잠식한 듯한 이――고양감.

바로 그때, 손끝까지 저릿저릿한 그 열기 어린 감각이 쨍, 소리를 내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수석에 던져 두었던 휴대전화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권기철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 형, 그놈이, 사고가 났어. 나무를 들이받았어.」

권기철이 속삭이는 말을 듣고 권기영이 시계를 보았을 때에는 그가 예측했던 시각에서 딱 5분이 더 지나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의식을 잃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큰 오차는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르겠어. 지금 막 도착했는데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 ……그런데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차에서 꼼짝도 안 해.」

“주위는 어때.”

「아무도 없어. 게다가 커브에서 일직선으로 나가서 나무를 받아서, 차가 지나간다 해도 길가에선 잘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아.」

권기영은 차 옆으로 휙휙 스쳐 가고 있는 숲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 캄캄한 밤중에 이 울창한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들, 설령 지나가는 차가 있다 하더라도 달리는 차에서 그 작은 이변을 알아차릴 리는 없었다.

“거의 다 갔으니까 잠시 기다려. 바이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세워두고.”

「응. ……응, 형. 기다리고 있을게.」

권기철의 속삭임은 거의 헐떡임에 가까웠다. 권기영은 권기철이 횡설수설하며 알려 준 위치가 그리 멀지 않음을 깨닫고 속도를 낮추었다. 숲이 흘러가는 게 완만해진다.

구불구불한 숲길이다. 국도에서 빠져나와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권기영은 다른 차를 한 대도 못 봤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산속에 권기영과, 조금 떨어진 곳에 권기철, 그리고 놈이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묵직해졌다. 고동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권기철이 말한 곳까지 다다르는 데에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권기영은 그 근처에 이르자 차의 속도를 바싹 낮추며 주위를 살폈다. 커브길에서 미처 커브를 틀지 못하고 직선으로 달려 사고가 났다는 그 장소는 얼마 가지 않아 나왔다. 그러나 무성하게 자란 수풀로 뒤덮인 그곳은, 미리 말을 듣고 자세히 살피며 간 게 아니었더라면 모르는 채 스쳐 갈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밤중에 그냥 이 길을 지나쳐 가는 차라면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권기영은 조심스럽게 도로에서 벗어났다. 덜컹하고 차가 흙길로 들어서는 기척이 전해졌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저만치에 김건준의 차가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죽이 고개를 내밀더니 손을 흔드는 권기철의 모습도 보인다.

권기영은 우람한 나무 뒤에 차를 세운 채 권기철에게 오지 말라고 손짓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그 손짓을 알아본 듯 권기철이 걸음을 떼려다가 멈칫한다.

권기영은 나무를 들이받은 채 멈춰 있는 김건준의 차를 주의 깊게 살폈다. 차는 일직선으로 나무로 돌진하면서 그 아래에 있던 구덩이에 바퀴가 빠진 듯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다. 저대로는 지게차라도 부르지 않으면 금방 빼기도 힘들어 보이는 상태임에도 주위에 다른 흔적은 없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 데다 어두워서 차 안까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권기철에게서 전화를 받은 지 십여 분은 지났는데도 그 자리에는 놈이 나무를 들이받은 뒤로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듯했다.

놈은 저 안에.

저 안에서 의식을 잃고 고꾸라져 있다.

“…….”

권기영은 놈에게 전화를 걸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놈의 차 안에서 조그맣게 불빛이 새어 나오며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자 운전대 위에 엎어져서 꿈쩍도 하지 않는 인영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가 자동응답으로 넘어갈 때까지 놈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제야 권기영은 권기철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 단번에 끝내.』

만에 하나를 대비해 무기를 건네주긴 했지만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도록, 목을 꺾어서 처리하라고 말해 뒀다. 놈을 없애는 것만 그들 사이에서 해결하고 나면 나머지 뒷수습은 어렵지 않아 사고 흔적을 지우는 것도, 저 차를 처리하는 것도 어떻게든 손쓸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흔적은 적게 남길수록 좋다.

어둠 속에서 큼직한 인영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권기철이 놈의 차로 다가가고 있었다. 멀찍한 어둠 속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권기철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거칠게 흥분한 호흡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권기철은 완력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권기영도 누구와 겨루어서 진 적은 없지만, 아마도 순수하게 완력만 따지자면 그를 당해 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완력을 지닌 데다 어릴 때부터 권기영과 더불어 갖가지 격투기를 익힌 권기철이라면 정신을 잃은 사람의 목을 단번에 꺾어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권기영은 차 안에서 숨을 죽이고 그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자 그 컴컴한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그럭저럭 식별할 수 있었다.

권기철이 운전석 안을 기웃거리며 들여다본다. 그 안에서 의식을 잃고 늘어져 있는 남자를 확인한 그는 미리 손에 넣어 둔 차 열쇠를 밀어 넣었다. 손이 떨리는지 몇 번이나 실패한 다음에야 겨우 차 문을 연다. 좁은 차 안에서 꾸물거리는가 싶던 권기철은 몸을 움직이는 게 자유롭지 않자 초조해진 눈치였다. 혀를 차는가 싶더니 김건준을 차 바깥으로 끌어낸다.

멀리서 보고 있던 권기영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상관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놈을 죽이고 나면 사체는 따로 옮겨야 한다. 차 안에서 자칫 요동치기라도 하면 쓸데없는 흔적이나 더 남을 뿐이다.

차에서 김건준이 끌려 나왔다. 축 늘어진 몸을 뒤에서 부둥켜안고 차에서 주르륵 끌어내자 놈의 다리가 수풀 위로 무겁게 풀썩 떨어졌다. 그대로 질질, 마치 무거운 마네킹을 끌고 가듯이 차에서 몇 미터쯤 더 끌어내는 권기철을 보고 권기영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역시 아무 말 않았다.

김건준은 죽은 듯이 미동도 없었다. 다리가 땅으로 툭 떨어지는 순간 조금 꿈틀한 것 같았지만 그뿐, 몸에 힘이라곤 하나 없이 늘어져 권기철이 손을 놓으면 그대로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나뒹굴 것 같았다.

권기영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숨조차 쉬지 않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것은 몹시 기묘한 기분이었다. 저 괴물 같은, 패도적인 남자가 저렇게 순순히 늘어져서 의식을 잃고 있다니. 이미 죽어 버린 것처럼.

“…―.”

심장이 서늘해졌다. 놈이 죽는다. 시체처럼 풀숲 위로 끌려가는 그를 보자 얼음물처럼 실감이 닥쳤다. 손끝이 차가워지며 부들 떨리는 이 기분.

갑자기 지독한 초조감이 밀려들었다. 막연한 불안감이 홍수처럼 머리 위로 밀어닥치는 느낌이었다. 어서. 어서. 지금 당장. 저 괴물이 눈을 뜨기 전에 어서 죽여 버려.

운전대 위에서 손을 꾹 맞잡는 권기영의 시야 저편에서, 권기철이 이윽고 놈을 수풀 위에 눕혔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김건준을 내려다보는 권기철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눈을 크게 부릅뜬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포, 흥분, 혹은 기묘한 희열로 머릿속이 마비된 양.

권기철은 놈의 목 앞으로 부들거리는 팔을 둘러 머리통을 끌어안다시피 했다.

이제 곧 끝이다. 남은 건 한순간.

저 팔을 옆으로 비틀어 돌려 버리는 순간.

놈이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반사되어 눈만 하얗게 반들거리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권기철이 숨을 삼키며 퍼득 경련하듯 어깨를 움츠렸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화드득 놈의 목을 비튼다. 죽어……!, 낮고 거친 속삭임을 비명처럼 뱉어 낸다.

그러나 화급하게 비틀어 버린 팔은 정확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놈이 도중에 그 팔을 움켜쥔 탓이다.

히익, 권기철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거의 반사적으로 놈에게 마구 주먹을 휘두른다. 죽어, 죽어, 씨발, 죽어, 이성을 잃은 권기철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을 한동안 놈은 고스란히 맞았다. 약에 취해서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반각성 상태인 듯 휘청거리며 맥없이 얻어맞는 놈과, 그 앞에서 미친 듯이 눈을 뒤집고 손발길질을 퍼부어 대는 권기철을, 권기영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놈이 일어났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이 깨어났다.

어째서. 어떻게.

소름이 끼쳤다. 뭐가 뭔지 모르고 아직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듯 벌써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쓰러지지 않고 있는 놈을 보며, 권기영은 신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여. 멍청아, 지금 이 사이에 얼른 죽여 버리란 말이야. 더 늦어 버리기 전에――저 괴물이 완전히 눈을 떠 버리기 전에.

“……! ……!!”

마구잡이로 놈을 후려갈기던 권기철은 뒤늦게야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아, 그래, 죽여야 한다, 심지어 이렇게 된 이상은 죽일 수밖에 없다, 권기철은 반쯤이나마 정신이 든 상태에서는 놈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품에서 칼을 꺼내었다. 반들거리는 나이프가 달빛에 번쩍인다.

죽여.

권기철이 나이프를 그었다. 놈의 팔에서 화악 핏물이 튀었다.

죽여. 당장 숨통을 끊어 버려.

그리고 권기철은 이번에야말로 놈의 목을 노렸다. 목만 꿰뚫으면 끝이다. 놈의 멱살을 움켜쥔 권기철이 무시무시하게 포효하며 칼을 찔러 넣었다.

순간 화악, 놈이 눈을 부릅뜨는가 했다.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고개를 튼 놈의 어깨에 칼이 꽂혔다. 순식간에 그 부위의 옷이 피로 푹 젖어 들었고, 그와 함께――놈이 의식을 차렸다.

“――!!”

그것은 놈이 권기철의 얼굴에 거침없이 주먹을 박아 넣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짐승들이 사투한다.

권기영은 이를 사리물었다. 눈앞에서 흉포한 맹수 두 마리가 무시무시하게 서로를 죽이려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있었다.

권기영은 권기철이 압도적인 완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갖가지 격투기를 두루 섭렵해 싸움으로는 어디서든 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권기철과 맞붙어서 호각으로 싸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놈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 잊어서는 안 되었다. 놈은 괴물이었다. 권기영을 단숨에 짓누르고 옴짝달싹을 못하게 했던 그 무지막지한 힘. 체력. 기술.

그것은 어느 순간이었다.

호각으로 싸우며 누가 살지 누가 죽을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아슬아슬하던 사투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기울었다. 권기철이 심장 바로 위를 직격당한 때부터였다.

순간 숨을 삼키며 몸을 구부정하게 움츠린 권기철을, 놈은 무자비하게 짓이겨 갔다.

철저하게. 뼈마디 하나하나. 한 푼의 인정도 남기지 않고.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저 권기철이 저렇게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걸.

놈은――포효하는 늙은 호랑이처럼 무시무시하게, 잔인하게, 침착하게, 희생물을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권기영은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놈을 지켜보았다. 잠시도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손을 맞쥔 그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안 된다.

놈은 죽어야 했다. 반드시.

이윽고 권기철이 무너졌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바닥에 나뒹군 거대한 몸집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놈이 돌아보았다.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 느리게 몸을 돌린 놈은 정확하게 권기영을 바라본다. 숲의 캄캄한 어둠 속, 거대한 나무 수풀 뒤에 묻혀 있는 차 안에 권기영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거침없이 이쪽을 직시하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

시커먼 피를 덮어쓴 얼굴이 가면을 뒤집어쓴 듯 표정 없이 권기영을 보았다. 달빛에 비친 눈만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권기영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차 열쇠를 비틀고 있었다. 부르릉, 엔진이 움직이며 시동이 걸리는 기척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놈은 죽어야 한다. 오늘 밤 반드시. 이렇게 된 바에는 놈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

피부 위로 얇은 얼음이 덮이는 듯했다.

권기영은 액셀을 밟았다. 으직, 키 작은 나무들이 차에 받혀 넘어가며 부러진다. 나무며 수풀들을 바퀴 아래로 짓밟아 버리면서 권기영은 놈을 향해 차를 몰았다. 무서운 기세로 놈에게 닥쳐들면서, 권기영의 머릿속에는 놈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

아슬아슬하게 차 앞에서 비켜서는 놈을 집요하게 쫓았다. 어쩌면 권기영은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도 몰랐다. 놈을 죽여야 한다, 그것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모든 것이었다.

무시무시하게 닥쳐드는 차를, 다칠 대로 다쳐 자유로이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어 보이는 놈은 번번이 간발의 차로 비켜 갔다.

차가 놈을 치려 닥쳐들 때마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권기영은 그의 눈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권기영을 똑바로 응시하는 놈의 새카맣게 빛나는 눈이 망막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안 돼.

안 된다.

안 돼……!!

퍼억

피가 후드득 튀었다. 유리 조각이 섞여 권기영의 위로 쏟아진다. 그리고 시체 같은 몸의 상반신이 권기영의 몸 위로 축 늘어졌다.

권기영은 숨을 삼키며 얼어붙었다. 액셀을 밟던 발이 굳어 버린다.

놈이 쓰러져 있던 권기철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들어올려 권기영의 운전석 유리창을 후려갈겨 버렸다. 유리가 단번에 박살이 나며, 피투성이가 된 권기철의 상반신과 함께 쏟아져 들었다.

“이런 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놈의 느릿한 목소리가 깨어진 창틈으로 흘러든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생을 넋 놓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권기영이 멈칫멈칫, 시퍼렇게 얼어붙은 고개를 돌렸다.

놈은 웃고 있었다.

달을 등지고, 시커먼 숲을 등지고, 놈은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소름 끼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저한테 좋은 거 주셨나 봅니다. 아직도 머리가 제대로 안 깨고 꿈결 속에 있는 것 같은 걸 보니.”

“…―.”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놈이 피식 웃는다. 그 새카만 시선은 권기영의 얼굴 위에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권기영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놈을 노려보았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시선을 떼는 순간 저 웃고 있는 야수는 필경 괴물로 돌변해 권기영을 찢어 삼켜 버릴 터였다.

언제 저런 눈을 봤던가.

저렇게 새카맣게 가라앉은, 차가운, ――미친 눈이다.

운전대를 세게 움켜쥐어 하얘진 손마디가 부들, 떨렸다. 입술이 떨리고, 이윽고 심장이 떨렸다. 권기영은 자신이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툭, ……툭, 땀방울이 떨어진다.

권기영의 홉뜬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놈이 어느 순간 눈동자만 아래로 떨어뜨려, 아직껏 머리를 움켜잡힌 채 의식을 잃고 있는 권기철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알았을 것이다. 권기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또한 권기영이 이곳에 있는 이유도.

놈의 시선이 다시 권기영에게로 올라왔을 때, 권기영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일그러진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기영 형.”

놈이 나직이 불렀다. 하얗게 핏기가 가시는 권기영의 얼굴을 뚫어질 듯 내려다보며 가느스름하게 눈가를 휜 놈이 웃었다.

“아무래도 해야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놈이 운전석의 문을 연다. 깨어진 창에 상반신을 걸치고 있던 권기철이 덩달아 밀려가다 바닥으로 미끄러져 나뒹굴었다.

권기영은 놈이 자신의 코앞으로 얼굴을 바싹 가까이하는 동안 얼어붙은 듯 놈을 지켜보기만 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새카만 눈이 웃는 듯 마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놈이 귀신처럼 입술을 틀어 올린 순간,

“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 말입니다.”

놈이 권기영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차에서 끌어내었다. 거의 떠밀리듯이 끌려 나와 넘어질 뻔한 권기영을 붙잡아 부축해 준 놈은 부들거리며 질린 얼굴로 놈을 올려다보는 권기영에게 빙긋이 웃음 지었다.

“청양 쪽 일이 급하지만 않았더라도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볼 테지만, 이번엔 늦으면 때를 놓치거든요. 지금도 살짝 아슬아슬해서 말이지요. 그럼 차 좀 빌리겠습니다.”

놈은 권기영의 가슴을 살며시 밀었다. 두어 걸음 뒷걸음질치며 멍하니 놈을 보는 권기영에게 웃음을 남긴 그는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탕, 운전석의 문을 닫고 시동을 걸더니 후진으로 차를 뺀다.

“나중에 댁으로 들르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기철이한테도, 몸조심하라고 전해 주시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놈은 차를 돌렸다. 수풀을 짓이기며 잔가지들을 부러뜨린 차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묵직한 엔진 소리가 어둠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그곳에 남겨진 건 창백하게 빛나는 달과 시커먼 어둠이 도사린 숲뿐.

권기영은 그곳에 우두커니 선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권기영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밤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새카만 새벽이었다. 밤새도록 불을 켜 두는 현관 바깥 등만 노랗게 밝혀져 있었고 집안은 온통 캄캄했다.

대문 옆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원은 차고를 통해 바로 올라가지 않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권기영에게 시선을 주다가 흠칫하는 눈치였다. 평소 권기영의 성격을 알기에 딱히 말은 걸지 않고 목례만 한 경비원이 권기영의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옷자락과 흐트러진 차림새를 기묘한 눈으로 흘끔거렸지만 권기영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아니, 그런 따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권기영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는데,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리다 그쳤다. 흠칫하며 부르르 어깨를 떤 권기영은 전화를 꺼내어 얼어붙은 눈으로 수신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 정리했습니다. ××××병원 1120호』

권기영의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늘어졌다. 가끔 요긴하게 이용하곤 하는 용역은 상당히 쓸 만했다. 고작 두어 시간 만에 자리를 말끔히 정리한 모양이었다. 병실 번호만 찍은 걸 보니 권기철의 상태도 심각하게 위험하지는 않은가 보다.

……아니.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권기철, 잘난 척만 하고 일도 제대로 못 하는 그 병신 머저리 따위는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권기영은 이를 악물었다. 손마디를 짓씹으며 계단을 올라간 그는, 주인의 기척을 듣고 계단 위에 먼저 와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개를 보는 순간 속이 울컥 치밀어 그놈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요란한 비명을 터뜨리며 저만치 날아가 꿈틀거리는 개를 밉살스럽게 노려본 권기영은 어떻게 하지, 다시 생각한다.

놈의 약점은 뭘까. 가족. 아니다. 놈은 더 이상 가족도 없다. 그러면. 일. 그래, 일일지도 모른다. 방금도 놈은 일이 급하다며 먼저 가 버리지 않았던가. 그래, 차라리 일 쪽을 치고 들어가면 좋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기울어 가고 있는 사업, 뒤로 조금만 손을 써 보면 어떻게든――.

권기영이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을 두서없이 굴리며 집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이미 느슨하게 흐트러져 있던 넥타이를 풀어 내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면서 2층의 자기 방으로 가려고 계단에 막 발을 올렸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온 집안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깊은 새벽.

새벽 일찍 눈뜨는 가족들조차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 이른 시각에, 초인종이 집 안의 조용한 공기를 찢어발겼다.

“…―.”

순간 권기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더니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능이 정확하게 알려 주는 감이었다. 저 초인종 소리 너머에 불길한 것이 닥쳐와 있었다. 권기영은 굳어 버린 고개를 돌려 인터폰을 보았고, 거기에는 그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비치고 있었다.

김건준이 서 있었다.

그의 옆에서 경비원이 뭐라고 하는 듯했으나 그는 아랑곳 않고 거기에 서서, 권기영이 보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듯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권기영이 꼼짝도 하지 않고 얼어붙은 듯이 서서 인터폰을 보고 있을 때, 끊임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가장 먼저 방에서 나온 건 어머니였다.

“아니 이 새벽에 누가 이렇게 벨을……. 어머, 기영이 너는 거기서 뭐 하니. 지금 온 거야?”

잠옷 위에 겉옷을 껴입으며 졸린 눈으로 나온 어머니가 거실의 불을 켰다. 눈을 비비며 인터폰 앞으로 가는 어머니의 뒤로, 방안에서 “이 새벽부터 어떤 놈이야.”라고 잠에서 덜 깬 아버지의 노성도 흘러나온다.

“어머……, 어머나……, 김서방이잖아?”

벌써 사위와 매한가지로 챙겨 부르는 어머니의 놀란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파리하게 굳은 얼굴로 인터폰 화면 속의 놈을 노려보고 있는 권기영의 뒤로, 누이의 방문도 열렸다.

“뭐야, 누가 시끄럽게 이 시간에……, 어머, 건준 씨?!”

짜증스럽던 누이의 목소리가 놀람으로 바뀐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초인종 소리에 결국 아버지까지 역정이 난 얼굴로 침실에서 나올 즈음에야 누이가 황급히 인터폰을 들었다. 경비실로 이어진 인터폰에 대고 누이가 얼른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말한다.

곧 화면이 꺼지며 놈의 얼굴이 사라졌다. 권기영은 시커메진 화면을 노려보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놈이 왔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권기영의 옆에서 누이가 ‘무슨 일일까 갑자기.’라고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나갔고 어머니도, 그리고 여전히 언짢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아버지도 뒤를 따랐다.

가장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권기영이 이를 악물고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현관이 열리며 “안녕하십니까. 이른 시각에 실례합니다.”라고 평소와 똑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김건준의 말이 들려왔다.

“자네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있나? ――뭐, 뭔가, 그건!”

언짢게 대꾸하던 아버지의 말끝에 놀람이 섞였다. 누이와 어머니도 작게 비명 같은 소리를 낸다.

그리로 굳은 걸음을 옮긴 권기영은, 현관에 서 있는 김건준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사람의 머리통도.

형상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만큼 피떡이 된 그 남자는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여기까지 질질 끌려온 듯 대문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핏자국이 길게 줄을 잇고 있었다. 숨을 쉬는지 아닌지도 모를 그 남자의 머리통을 그러쥐고서, 김건준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로 담담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권기영이 현관 복도로 모습을 드러내자 눈동자만 돌려 그를 흘끔 쳐다본 김건준이 언뜻 더 짙은 웃음을 띠는 듯했다.

“그 남자는 뭔가! 자네 이 시간에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짓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호통치는 아버지에게 김건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이며, 손에 쥐고 있던 머리통을 툭 내던졌다. 피투성이의 남자가 발치에 나동그라졌다. 누이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선다.

“자네, 자네 지금 어디서 이런 깡패 놈이나 하는 짓을……, 뭐야! 이게 뭐 하자는――.”

“줄줄이 묶어 놨는데 일단 하나만 집어 왔습니다. 아버님께서 먼저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아버님께서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김건준은 현관을 장식하고 있던 꽃병을 들어 쓰러진 남자의 머리 위로 뒤집었다. 촤악, 꽃병의 물이 쏟아지며 남자의 얼굴에서 피를 쓸어 낸다.

권기영은 그 남자에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모르는 얼굴이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와 놈 사이에 오간 뒷이야기가 있었던가 아버지를 살폈지만, 굳은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던 아버지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모르네. 처음 보는 얼굴이――.”

“…―.”

그때다. 뒤에 물러난 채 고개를 기울여 흘끗 내려다본 누이가 조그맣게 숨을 삼키는 기척이 들렸다. 무심결인 듯 어머니의 팔을 꼬옥 움켜쥐는 그녀의 뒤를 이어, 남자를 흘끔거리던 어머니도 한 박자 뒤에 에그머니, 하고 바람 새듯이 작은 소리를 삼킨다.

조용하게 벌어진 고요한 소란 속에서 그 소리를 못 들은 사람은 없었다. 김건준은 물론 권기영도, 그리고 아버지까지.

싹 굳어 버린 낯빛으로 경악스러운 듯 남자를 내려다보는 누이와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돌리는 어머니를 권기영과 아버지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김건준의 목소리가 유유히 흘렀다.

“제가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간발의 차로 구멍이 생겨서 이상하다 싶던 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박승수 씨?, 하고 김건준이 남자의 안면을 걷어찬다. 신음도 제대로 못 지르고 꿈틀거리는 남자에게서 피가 퍼억 터져 나오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누이와 어머니가 다시 작게 소리를 지른다.

“이, 이놈이……?!”

아버지가 더듬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린 놈이 권기영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기영 씨라면 이해해 주시겠지요.”

“…―.”

기억났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아는 바가 없었지만 박승수라는 이름은 짚이는 데가 있었다. 언젠가 권기영이 어머니의 청으로 놈의 회사 중추에 적을 두도록 해 달라고 서류를 건넸던 남자다.

“기윤 씨. 저는 기윤 씨를 정말로 내 사람이라 생각하고 모든 걸 다 터놓으며 밝혔지만, 그건 기윤 씨가 바깥에 흘려도 될 말과 안될 말은 구분할 줄 아실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겁니다. 회사 내부 일까지 다 말씀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김건준이 누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웃음 짓고 있었는데도 누이는 작게 숨을 삼키며 두 걸음 물러섰다.

“패스워드는 어떻게 알았어요? 아아, 기윤 씨랑 같이 있으면서 몇 번 일하느라고 접속했을 때 봤습니까? 눈썰미도 좋으시군요.”

아마도 권기윤에게서 시작되어 그녀의 부탁을 받은 어머니에게로, 그렇게 이어졌을 연결고리를 권기영은 짐작했다. 그녀들의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의원님, 제가 사업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아니, 그게 무슨, ――기윤아?”

아버지가 더듬거리며 누이를 돌아본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던 누이가 꽉 깨문 잇새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난 그러라고 한 적 없어요. 정말이야. 나는 그냥, 건준 씨에 대해서 좀 알아봐 달라고 한 것뿐이야. 나는 건준 씨가 뭘 하고 지내는지 알고 싶어서 그냥 그것만, 나는,”

“이 남자가 내부 자료들을 그때그때 빼 간 걸 모르셨다고요.”

“몰랐어요! 몰랐어, 나는!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아버지!”

김건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누이가 절박하게 주장했다. 일렁일렁 부풀어 오른 눈동자에 눈을 부릅뜬 아버지와, 여전히 표정에 변화 하나 없는 김건준이 비친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김건준은 결백을 외치며 불안하게 눈동자를 일렁이는 누이를 보며 알아차렸다. 아니,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도중부터 저 누이가 이상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뒤를 알아보는 데 필요하다며 저자가 요구하는 것들을 알려 주며 점차 이상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돌이키기는 어려웠을 테고――결국 그녀는 의심을 품은 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모른 척 덮어 두고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저 남자는, 김건준은.

“…―.”

권기영은 표정 없이 놈을 보았다. 난처한 얼굴로 웃는 듯 마는 듯 입매를 올리고 있던 김건준과 눈이 마주쳤다. 놈의 눈이 가느스름한 웃음을 띠었다. 그것은 비밀스럽고도 확실한 웃음이었다.

놈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마도 처음부터.

놈은 모든 것을 다 알고서 입 다물고 기다렸다.

“그러니까 기윤 씨는 이 남자가 당신을 속였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냥 이 남자에게, 제 뒷조사를 부탁하셨을 뿐……?”

김건준이 조금 누그러져 중얼거리자 누이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권기영은 혀를 찼다. 바보 같으니.

“저의 뭘 그렇게 알고 싶으셔서 저 몰래 알아보시기까지 하셨습니까? 저에 대한 거라면 이미 의원님께 들으셨을 텐데.”

그가 이미 오래전 김건준에 대해 뒷조사를 했던 내용을, 이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지만 여기서 그 뜻을 이해 못 할 사람은 없었다.

문득 아버지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걸음을 돌린 아버지는 거침없이 누이의 뺨을 후려쳤다. 누이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고, 어머니가 놀라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이런 바보 같은 것, 썩 들어가라! 네 방에서 나오지 마!”

아버지가 호통을 내지르자 누이는 커다랗게 눈을 홉뜨고 무슨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김건준을 한 번 쳐다보곤 이를 악다물며 휙 걸음을 돌렸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녀를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김건준의 눈치를 살피더니 누이의 뒤를 쫓았다.

그 자리에는 짧은 정적이 남았다.

난처한 빛을 띠고 얼핏 찌푸린 웃음을 웃고 있는 김건준과 화가 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침묵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권기영도 묵묵히 놈을 보았다.

난처하다고? 곤란해? 이 남자가? 헛소리도 이 이상 우스운 헛소리는 없을 거다.

느슨한 웃음을 눈가에 띠며 권기영을 바라보는 그를, 권기영은 사납게 노려보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제대로 된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 그래서. 어쩔 테냐. 네가 생각한 대로 상황이 흘러왔다. 내가 너를 죽이려 했다. 그래서.

놈과 시선을 마주하고 무시무시하게 눈을 치뜨는 권기영의 옆에서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네. 내가 식솔들 단속을 제대로 못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보이. ……그래, 자네는 그래서 이 새벽에 저 흉측한 꼴을 끌고 부러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아버지의 딱딱한 어조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설령 자신의 딸 때문에 김건준이 곤란하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감히 흙발로 집안을 망쳐 놓다니, 재간깨나 있어 곱게 봐 주었더니 아주 되바라진 애송이가 아닌가, 그런 심경이 매서운 눈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여기까지 일을 일궈 오느라 공 많이 들었습니다, 의원님.”

김건준이 빙긋이 부드러운 웃음을 띠었다.

“그런데 자칫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을, 없었던 것으로 치는 대가로 이 정도라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실 만하지 않습니까?”

“무어……?”

“저는 앞으로도 여러모로 의원님께 도움받고 가르침을 받으며 지내 가고 싶습니다. 이런 일로 마음 상해하기에는, 의원님께 가르침 받을 일들이 더욱 중하지 않겠습니까.”

입을 꾹 다물고 놈의 말을 듣는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조용한 한숨을 내쉬는 김건준의 얼굴이 진지한 것으로 바뀌었다.

“기윤 씨에게는 제가 믿음을 드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제가 부족했던 소치이니, 기윤 씨에게는 더 이상 제게 앞날을 맡겨 달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의원님께 가르침 받을 기회마저 없애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의원님께서 너그럽게 받아 주시기만 하신다면요,”

김건준은 거기에서 입을 다물고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여기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아버지라며.

아버지는 사납게 부릅뜬 눈으로 뚫어지게 놈을 노려보았다. 놈이 무슨 속셈인지, 무엇을 바라는지 찬찬히 놈의 낯 구석구석을 살핀 아버지는 이윽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천천히 생각해 봄세. 새벽잠을 설쳐서 지금은 명쾌한 판단을 내릴 때가 아닌 것 같아. 일단 돌아가게. 그 흉물도 같이 데리고 가게나. 나는 모르는 일이니.”

냉랭하게 잘라 말한 아버지는 김건준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남자를 차갑게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한 뒤, “배웅해 드리거라.”라고 권기영에게 짧은 말을 남기곤 도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두 번 다시는 보지 않을 듯 서슬 퍼런 문소리가 쾅, 하고 울렸다.

권기영은 일그러지는 입매를 사리물었다.

아버지는 틀림없이 놈의 손을 잡는다. 마지막으로 놈을 쳐다보며 번쩍인 만족스런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토록 탐내던 남자다. 오죽하면 아무것도 없는 자를 사위로 들이려 할 정도로 탐내었었다. 혼담이 물 건너갔다 한들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저 흉물을 끄집어낸 놈은 이제 자신을 밟아 놓으려 일을 꾸몄던 자들을 하나씩 짓이기며 그 위로 밟고 설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원래 상태로, 아니 오히려 그 이상까지 올라설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놈의 저 불손함도 든든한 배짱이라고 평하며 놈의 손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보다 한층 더 확고하게 그를 뒷받침해 주겠지.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한다 말했더라도 그 빚까지 없었던 일로 돌릴 수는 없었으니.

그리고 그 모든 상황 뒤에 권기영은, 지금 김건준과 둘만 남았다. 이 자리에서도, 그리고 앞으로도.

“…―. 여기, 올라오십시오. 치울 게 있으니. 혼자로는 안 될 테니까 한 사람 더 데리고 오세요.”

권기영은 인터폰을 들어 경비실에 연락했다. 저 넝마 같은 고깃덩이를 놈의 차에 싣든, 어디에 내던져 버리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끌어내면 그만이다.

지금 권기영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당장은 눈앞에서 사라진다 한들 온전히 끌어낼 수는 없을, 이 남자였다. 사람 좋은 얼굴에 빙긋이 웃음을 짓고서 권기영을 내려다보고 있는 김건준.

“집에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되셨나 봅니다. 이런, 옷이 엉망이군요.”

혀차는 소리와 함께 놈의 손이 다가왔다. 권기영의 목을 꺾어 놓을 수도 있을 그 커다란 손은 느리게, 느리게 다가와, 굳은 듯이 서 있는 권기영의 구겨진 옷깃을 살며시 매만졌다.

“죄송합니다. 그 외딴곳에 두고 먼저 자리를 떠서. 제가 직접 바래다 드리고 싶었지만 아까는 좀 급했었거든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남자도 놓칠 뻔했어요, 라고 웃는 놈을 차갑게 바라보던 권기영은 가만히 자신의 뺨으로 올라오는 놈의 손을 뿌리쳤다. 놈이 언뜻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웃음은 더 짙어졌다.

“그러고 보니 기철이가 안 보이는군요. 기철이는 좀 괜찮습니까?”

“어쩔 셈이야.”

권기영이 나직이 내뱉었다. 놈은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고, 그때 경비원이 들어와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경비원은 피범벅으로 쓰러진 남자를 보고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를 짊어지고 나갔고, 그 뒤를 따라 김건준도 걸음을 돌렸다. 바깥을 고갯짓하며 웃는 놈의 얼굴은 여기서 계속 이야기할 거냐고 말하고 있었다.

권기영은 앞서 나가 버리는 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의 뒤로 따라 나갔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겠다……?”

권기영이 잇새로 내뱉자 뜰 한구석에 앉아 있던 개에게 다가가 그 턱을 간질이던 김건준이 웃음으로 긍정했다.

“그렇다면 내 치부를 약점으로 쥐고 흔들 수는 없을 텐데.”

아버지와의 관계를 지속하려 한다면 그 아들의 치부를 외부에 폭로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물며 그 아들을 죽이거나 해칠 도리도 없다.

그렇다면 놈은 과연 무엇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그를 죽이려 한 권기영에게.

“왜 그러셨습니까?”

그러나 권기영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놈은 개를 쓰다듬으며 평연하게 물었다.

왜 그를 죽이려 했는가.

권기영은 낯을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웃긴 물음이 또 있을까.

아까부터 가슴속 밑바닥에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공포와 불안과 뒤섞여 있던 그 찌꺼기 같은 감정들은 이내 미친 듯한 분노가 되어 부풀어 올라――결국 터져 버리고 만다.

“왜……?”

권기영은 이를 갈았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네가 죽어 사라지길 원했으니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날 수 없길 바랐으니까. 죽을 때까지. 저 땅 밑에서 영원히 입 다물고 있어야 했으니까.”

“…….”

“왜, 화가 나나? 여태 발밑에 깔려 있다고 생각했던 게 발목을 물어뜯어서?”

권기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놈에게 이를 드러내었다. 그래. 그래서. 네놈 따위가 화가 났으면 그게 왜.

“그래, 너 같은 놈 하나 치워 버리려고 했어. 그래서. 지금 이상으로 더 뭘 어떻게 하려고. 난 지금 이상으로 더 짓밟힐 것도, 더 굴욕을 겪을 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왜, 아니면 그 구역질 나는 곳에서 돌리기라도 할 건가? 개에게 던져 주게? 마음대로 해, 네놈에게 깔리느니 차라리 개가 나을 테니까!”

그것은 오래도록 짓눌리며 쌓여 온 것의 폭발이었다. 그 굴욕과 수치와 분노,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공포와――자신이 누군가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그 자괴적인 울분.

놈은 죽어야 했다. 그래야 옳았다. 이 나를 짓누르며 위협하는 것은 뭐든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갔고, 이제 권기영에게 남은 것은 놈이 과연 어떤 끔찍한 짓으로 되갚을지 모른다는 아득한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는 굴욕이 되어 광기 어린 분노에 불을 붙인다.

내가 누군가를 무서워한다고. 이 권기영이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누구에게든 외경을 샀을지언정 해 본 적은 없었던 이 내가.

권기영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런 꼴사나운 감정 따위 나는 느낄 필요 없다.

그래. 더 두려울 게 무엇인가. 이미 모든 것이 망가지고 무너졌다. 권기영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그 말은 외부로―적어도 바깥에서의 권기영을 아는 이들에게는―흘러나가지 않을 터였고, 그렇다면 더 지킬 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널 죽이려고 해서 미안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추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구걸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 추악한 소굴에서 돌려지든 개에게 던져지든, 놈에게 숙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무슨 짓이든 멋대로 해 봐. 그 잘난 힘으로는 짓누를 수 있을지언정 내 의지로 네놈에게 숙이고 들어갈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언제든 반드시 네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말 테니까 그때까지 마음대로 해 보라고.”

권기영은 묵묵히 침묵하는 놈을 노려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직이야. 아직이다. 좀 더 화를 내. 좀 더 분노해야 한다. 자칫 의식을 돌리면 그 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공포가 기어올라 올 터였다.

“너 같은 놈과 애초에 마주치는 게 아니었어. 기철이 그 병신 같은 놈이 너 같은 걸 데리고 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거야.”

권기영이 악문 잇새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순간, 그때까지 말없이 권기영을 바라보고 있던 놈이 눈썹을 꿈틀했다.

“애초에 마주치는 게 아니었다……?”

“그래, 애초에. 내 삶에서 네놈을 마주친 게 제일 큰 오점이다.”

권기영은 서서히 표정이 사라지는 놈의 얼굴을 노려보며 잇새로 내뱉었다.

“지금 실컷 멋대로 굴어 둬. 나는 절대로 네게 숙이는 일은 없을 테고, 언제까지고 네놈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테니.”

권기영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놈은 완전히 표정을 지워 버렸다.

그 씻은 듯한 무표정을 보며 권기영은 희열과도 같은 쾌감을 느꼈다. 저 얼굴에 늘 새긴 듯 자리 잡고 있던 여유로운 웃음이 사라진 꼴이라니. 권기영은 찰나의 승리감을 느끼며 일그러진 쾌감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그런 권기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그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는가 싶었다. 마치 뭔가를 망설이기라도 하듯.

그것은 아주 짧은 주저였다.

놈은 곧 다시 권기영의 얼굴로 속을 알 수 없는 새카만 시선을 되돌렸고, 놈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권기영은 그때 처음으로, 그토록 차가운 눈매에 입가에만 웃음을 띠는 놈을 보았다.

“……글쎄, 과연 어떨까요.”

심장이 얼어붙도록 차가운 시선, 웃음이 아닌 웃음.

그 순간 권기영의 짧은 승리감은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머리, 무겁게 쿵, 쿵, 불길함을 알리며 뛰기 시작하는 심장.

그 감각들 속에서 권기영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몸속으로 싸늘한 뭔가가 끈끈하게 흘러내려 뒤덮이는――소름 끼치는 섬뜩함.

비틀린 웃음이 사그라지는 권기영을 놈이 바라보고 있었다. 흉측하고 거대하고 냉혹한 어떤 것이 권기영을 내려다본다.

“기영 형. 잊지 마세요.”

놈이 속삭였다.

“당신이 저를 이렇게 만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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