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성하야. 이거 저쪽 테이블.”
“8번이요?”
“응.”
아보카도와 날치알이 잔뜩 든 캘리포니아롤을 받아들고 맨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서빙을 하는 동안에도 다른 테이블 두 곳에서 호출을 받았다. 주말도 아닌데 전체 테이블의 2/3가 가득 차 있었다.
추가 주문을 받아 셰프님에게 전해드리고 튀김 요리는 주방 쪽에 따로 전달했다. 기본으로 나가는 샐러드를 챙기러 홀 끝에 있는 샐러드바로 가자,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 나이부터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해 올해로 3년이 된 진호 형이었다. 화요일에 보고 오늘이 겨우 두 번째 만남인데도 살가운 성격 덕에 금방 가까워져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아, 오늘 왜 이렇게 바쁘냐. 쉴 타임이 없네. 성하 너도 정신없지? 안 힘드냐?”
“괜찮아요.”
확실히 오늘은 화요일보다 손님이 많았다. 비록 몸은 힘들지만, 테이블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가져갈 수 있는 돈이 늘어난다는 사실에 내심 기쁘기도 했다.
한인 신문 광고를 보고 문을 두드린 이곳은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일식당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꽤 먼 곳에서도 손님이 찾아오는 유명한 식당이었다.
실제 메인은 철판요리고, 초밥이나 다른 일식 요리는 식당의 한편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작은 홀에서 서빙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이라도 철판요리를 담당하는 큰 홀과 일식을 담당하는 작은 홀로 나뉘었는데, 오늘 나는 작은 홀을 담당했다.
“근데 일식당은 처음인데도 잘하네. 메뉴 안 헷갈려?”
“네. 화요일 날 가져가서 대충 외웠어요.”
“크, 좋다. 넌 제발 오래 일해라. 여긴 도통 오래 일하는 사람이 없어. 좀 빡세긴 해도 여기만큼 돈 되는 곳도 없는데.”
“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된다는 것만큼 기쁜 소식은 없었다.
저녁 시간이 다 지난 9시까지도 홀에는 손님이 북적였다. 하지만 절대 빠질 것 같지 않던 손님은 마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줄어들었고, 10시 30분이 넘어가자 일식 쪽 한 테이블을 제외하곤 남아있지 않았다.
10시 35분, 칵테일을 마시던 커플 손님이 나가고 마지막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조리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철판요리 셰프들이 한쪽 테이블 의자를 당겨 시끄럽게 착석했다.
아직 20분 남았는데.
어쨌거나 영업 종료 시간은 11시였다. 저래도 되나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평상복을 입은 사장님이 너무나 익숙하게 셰프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마감 시간 남지 않았어요?”
옆에서 정리를 거드는 직원 누나에게 묻자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고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철판요리는 쇼 때문에 음식 나오는 데 오래 걸리니까 보통 식사 시간이 길거든. 그래서 10시부터는 예약 손님 아니고선 일부러 안 받아. 있는 손님 나가고 나면 거의 끝이라고 봐야지.”
“그렇구나.”
“마지막 손님 다 나가고 나면 맨날 저기 에어컨 아래 모여있어. 종일 불 앞에 있으니까 덥잖아.”
“사장님도요?”
“응. 사장님이 저러시니까 다들 똑같이 하지. 우리도 빨리 정리하자.”
미리 나머지 테이블을 정리해놓은 덕분에 뒷정리를 하는 데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늘 일식 쪽 홀을 맡은 인원끼리 팁을 나누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여전히 클로징 타임이 되기까지 시곗바늘이 한 칸 남아있었다.
“어, 어, 누구냐, 그-”
“성하요.”
“아, 그래. 성하야. 잠깐 와 봐라.”
사장님의 부름에 큰 홀 쪽으로 가자 저들끼리 떠들던 인원이 한 번에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큰 홀이 작은 홀보다 테이블 수가 훨씬 많아 철판요리 쪽 인원이 많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함께 모여 앉아있으니 괜히 더 많은 느낌이었다.
“화요일에는 늦게 끝나는 바람에 인사를 못 시켰다. 이리 와서 인사해. 여기, 홀에 새로 왔어. 오후 타임만 나오고 주중에는 일식, 주말에는 대빵1)쪽 맡을 거야.”
“안녕하세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와. 시원시원하게 생겼네.”
“잘생겼지?”
“인상 진짜 좋네요.”
“뉴욕에서 왔단다.”
“오- 뉴욕-”
그저 인사 한번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몇몇 사람은 체격도 크고 인상도 험악해 무뚝뚝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가장 덩치가 크신 분이 오히려 의자까지 빼 주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 좋은 데 있다가 왜 시카고까지 왔어?”
“대학 때문에요.”
“아. 학생이구나. 그럼 파트로 하는 거야?”
“네.”
“부모님은 뉴욕 계시고?”
“아니요. 한국에 계세요.”
“그럼 유학생이네. 아,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성하요. 권성하.”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졌지만, 다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나 짓궂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중간에 술은 좀 할 줄 아냐는 질문이 나오긴 했으나 아직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내 대답에 착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모두 겉보기와는 다르게 재밌고 유쾌한 사람들이라서 다행이었다.
주방에서 뒤늦게 나온 진호 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다들 왜 이러고 있어요?”
“성하 새로 왔대서.”
“누가 새로 왔는데 분위기가 뭐 이렇게 좋아? 저 왔을 때는 이런 식으로 환영 안 해 주지 않았어요?”
불만을 품은 목소리를 듣고도 모두가 동시에 웃었다.
“넌 이렇게 안 귀여웠어.”
“맞아. 얘 봐라. 너랑 같냐?”
가만히 있어도 호감형. 자꾸만 뭘 해 주고 싶은 얼굴. 괜히 챙겨 주고 싶은 외모.
지금껏 나를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다.
‘넌 부모님께 진짜 감사해라.’
제일 친한 소라마저 그런 소리를 하길래 진지하게 거울을 보며 따져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본인이 본인 외모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흔히 말하는 ‘인상 좋다’의 기준을 찾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모두가 좋아하는 이 외모가 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외모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찌 된 게 넌 클수록 네 아빠를 닮는구나.’
만약 내가 엄마를 닮았다면 조금은 이보다 나았을까.
“아니, 다들 집에 안 가냐? 이제 좀 가자.”
“어? 시간 됐네. 가자, 가자.”
“고생하셨습니다.”
“다 수고하셨습니다.”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무덥던 날씨가 그새 선선해져 있었다. 집까지 차로 20분.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고 차가 없는 도로를 달리자 기분이 조금 상쾌해졌다.
뉴욕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늘 높은 건물들과 빽빽한 차들 사이에 놓여있어서 똑같은 운전대를 잡아도 여유롭다는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다시 한번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모, 캘러마리 언제 나와요?”
“금방 나와. 이거 먼저 가져가.”
“새먼도 안 나왔어요.”
“7번 스테이크부터 밀렸어. 한꺼번에 나올 거야.”
“여기! 여기도요!”
금요일 저녁. 바쁠 거라는 말에 미리 각오까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큰 홀에서 들어오는 일식 주문을 작은 홀에서 맡아서 해 주는데도 감당이 안 될 만큼 정신이 없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철판 테이블이 두 개 더 늘어난다는 설명을 듣긴 했어도 서빙 직원 또한 늘어나므로 그다지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주말을 앞둔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지 않을 리 없는데, 그것까지 계산에 넣지 못한 탓이었다.
이제 겨우 일한 지 3일째, 게다가 철판요리 쪽 일은 오늘이 완전 처음인 나는 테이블 하나만 배정받았다.
손님이 많아지자 여러 테이블을 맡은 직원들의 실수가 잦았다. 특히나 연달아 주문 실수를 한 진호 형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 3번 테이블, 10시 40분에 예약 있어요?”
“응.”
10시에 마지막 예약 팀들이 들어오고, 내가 맡은 테이블만 예약이 없어 바쁜 테이블을 돕기 위해 예약리스트를 훑어보는데, 맨 아래 예약이 눈에 띄었다.
“3번 테이블이면 사장님 테이블이잖아요. 마지막 예약은 10시까지 아니에요?”
“응. 그런데 오늘만 특별히 한 팀 받는대. 사장님 미국 오시기 전에 한국에 있는 유명한 식당에서 일하셨거든. 그때부터 단골손님이라나 봐.”
철판요리를 먹겠다고 밤 10시에 예약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11시 가까이 되는 늦은 시간에 예약이라니.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자 직원 누나가 그런 날 보며 피식 웃었다.
“최대한 사람 적을 때 오고 싶다고 한 모양인데, 우리 가게가 사람 적은 시간이 어딨어? 브레이크 타임 때 오라고 설득해 봤는데 그때는 또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이 시간에 잡았어. 참나, 오후 3시는 싫고 밤 11시는 괜찮다는 건 뭐냐? 나도 절대 이해 안 가는데 사장님이 괜찮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
“그래도 사장님이 그만큼 맞춰주시는 거면 진짜 중요한 손님이겠죠. 사람이 적어야만 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수도 있고.”
“……성하 너,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말 많이 듣지?”
“아니요.”
“그럼 지금이라도 알아라. 너 성격 좋아.”
상대는 또 한 번 날 보며 웃었다.
1) 철판요리를 부르는 속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