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3화 (3/96)

#03

“그나저나 진호 걱정이다.”

“왜요?”

“쟤 오늘 상태 별론데 아까 그 예약 손님 맡아 주기로 했거든.”

“아……. 아까 그래서 오늘 집에 늦게 간다고 했구나.”

“응. 다 끝나면 아마 12시쯤 될 거야. 나라도 대신해 주면 좋은데 하필 친구 생일이라서 끝나고 바로 가 봐야 하거든. 다른 사람들도 안 해 줄 것 같고.”

“매니저님이 하시면 안 돼요?”

“매니저님이 안 되셔서 진호가 하게 된 거야. 되셨으면 당연히 매니저님이 남으셨을걸.”

“그러면 제가 대신할까요?”

“넌 아직 잘 몰라서 매니저님이 절대 안 된다고 할걸? 어휴, 그러니까 어제 왜 그렇게 술을 마셔서. 아마 오늘 오후 타임이라고 신나게 마셨을 거다.”

진호 형은 오후 5시가 될 때까지도 술 냄새가 날 만큼 무리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냐고 묻자 익숙한 듯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대답이 돌아와 그럴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지금이 아까보다 훨씬 좋지 않아 보였다.

“어쨌든 일이나 하자. 넌 테이블 끝났어?”

“아. 네. 예약 많은 테이블 확인하러 왔어요.”

“그럼 진호 테이블이나 도와줘.”

철판요리 쪽은 대부분 예약 손님이라서 셰프를 지정하는 손님들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똑같은 바 형태의 테이블이라도 특정 테이블에 손님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서빙도 공평하게 돌아가며 맡았는데 하필이면 오늘 진호 형이 맡은 3, 4번 테이블에 사람이 몰려 있었다.

화려한 불 쇼가 펼쳐지는 사이 정신을 놓고 있는 진호 형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어, 어? 아니. 미치겠다. 이제 배도 아파.”

“숙취 제대로 왔나 봐요. 제가 이쪽 하고 있을 테니까 화장실 다녀오세요.”

“좀만 더 있다가.”

“지금 식은땀 나요.”

망설이던 진호 형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사실은 정말 급했는지 가는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빨랐다.

[여기요.]

[네-]

다행히 3번 테이블은 식사를 거의 끝낸 손님뿐이라서 수월하게 두 테이블을 오가며 일할 수 있었다. 진호 형은 거의 15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조금 전보다 확실히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형은 몰래 옆으로 와 고맙다고 속삭였다.

슬슬 테이블이 빠진다고 생각해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10시 30분이었다. 확실히 손님이 많으면 몸은 힘들지 몰라도 바쁜 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성하야.”

“네?”

“나 또 다녀와야겠다. 미안.”

“어? 형, 그러면-”

진호 형은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급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예약 손님 올 때가 다 됐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내 물음은 그저 허공에 맴돌았다.

그 모습을 보고 계시던 사장님이 손님이 다 빠진 테이블로 나를 불렀다. 사장님은 깨끗이 정리된 테이블을 한 번 더 살펴보고 철판 온도를 확인하고 계셨다.

“성하야. 주방에 가서 스테이크랑 랍스터 준비해달라고 해. 스테이크는 필레미뇽으로.”

“네. 1인분만요?”

“그래.”

혹시 손님이 혼자서 오는 건가?

“그리고 경식아, 잠깐만 이야기 좀.”

내가 주방에 다녀왔을 때 사장님은 여전히 매니저님과 이야기 중이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또 오라고 손짓하셨다. 옆에 있는 매니저님의 살짝 접힌 이마가 괜히 이유 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아, 그래. 음…….”

사장님은 잠깐 머뭇거리시다가 웃으며 물었다.

“오늘 끝나고 약속 있니?”

원래 이런 말투가 아니지 않았나. 유독 다정한 말투였다.

“아니요.”

“그럼 예약 테이블 하나만 더 맡아줄 수 있어? 진호 안 되겠다, 집에 보내야지.”

“네. 그럴게요.”

이미 사정을 알고 있어 바로 대답했을 뿐인데, 두 분 다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퍽 감동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차피 그 손님밖에 없으니까 할 게 많지는 않을 거야. 사장님께서 가져다 달라는 것만 갖다 주면 돼.”

“네. 저쪽 마감은요?”

“예약 손님 오면 다른 테이블 신경 쓰지 말고 이쪽에만 있어. 네가 맡았던 테이블 마감은 내가 할게.”

아직 잘 몰라서 절대 허락 안 할 거라던 매니저님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일하는 내내 진호 형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큼 형의 상태는 심각했으니까.

핼쑥한 얼굴로 돌아오던 진호 형은 다시 또 걸음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매니저님은 낮게 혀를 찼다. 동시에 내일 오면 두고 보자는 살벌한 말이 들려왔다.

10시 40분에 예약한 손님은 11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늦게 예약하고도 20분이나 늦다니. 아무리 중요한 손님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게 정말 예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갑자기 못 온다는 최악의 상황이 올까 봐 늦더라도 꼭 와줬으면 하는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이미 음식 준비도 다 해놨는데.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예약 한 팀 때문에 사장님, 나, 주방 이모, 일식 셰프, 그리고 리셉션 담당자까지 5명이나 되는 인원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비싼 걸 주문하더라도 이 정도면 완전 손해 보는 장사였다.

“사장님, 오셨어요.”

리셉션 담당자가 11시 정각에 그 문제의 손님을 홀로 데리고 왔다. 혼자일 줄 알았던 손님은 여자와 남자, 두 명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먼저 다가온 남자 쪽이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중요한 손님이라기에 당연히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일 줄 알았다. 적어도 4, 50대 정도를 생각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놀랍게도 내 또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려 보이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남자의 생김새 그 자체였다.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외모는 저런 거지.

살짝 그을린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눈, 코, 입. 거기에 쉽게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이미지. 날카롭고 무뚝뚝한 인상을 날려버릴 정도로 남자는 매우 훌륭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남자인 내가 봐도 넋을 잃을 정도로.

심지어는 큰 키와 체격 때문인지 흔히 볼 수 있는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도 남들과 확연히 달라 보였다.

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남자는 182센티나 되는 내 키를 훌쩍 넘어 보였다.

“두 분 일단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두 분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남자의 옆에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늘씬한 몸매를 강조하는 원피스에 높은 하이힐. 잘 세팅된 긴 머리카락과 화장. 의상과 맞춘 듯한 액세서리까지.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며진 모습이었다. 작고 왜소한 체구였지만, 얼굴이 작고 비율이 좋아 누구나 한 번쯤은 돌아볼 만큼 예쁘고 매력적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지?

남자 쪽은 완전 처음이지만, 여자 쪽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예전 기억을 되돌려봤지만, 알고 지낸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은 아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운전 중이었어서……. 어쨌든 죄송합니다.”

굉장히 무례할 거라고 예상했던 남자는 예상외로 예의가 바른편이었다. 오자마자 늦은 것에 대한 사과도 몇 번이나 했고, 사장님을 대할 때도 높은 사람을 대하듯이 했다. 그래서인지 사장님도 상대를 다르게 대하셨다.

“이렇게 오셨으니 됐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제는 진짜 어른이 되셨습니다.”

평소 농담을 하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하시던 사장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 다른 손님을 대하던 것과도 달랐다. 한참 어린 사람인데 이토록 깍듯하게 대하는 게 이상하고 신기했다.

“원래 좋아하시던 거로 준비해 뒀는데 괜찮습니까?”

“네.”

“같이 오신 분은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니 천천히 메뉴 보시고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저, 같은 메뉴 말고 다른 거로 혹시 추천하는 메뉴 있나요?”

“아, 그렇다면……”

매니저님이 말한 대로 사장님께서 직접 손님을 상대했기에 내가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차라리 무언가 하고 있으면 나을 텐데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게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필요해질 순간을 위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 그걸로 할게요. 혹시 이쪽에 있는 메뉴도 지금 가능한 거예요?”

“네. 가능합니다.”

“어? 그러면 초밥이랑 튀김도 몇 가지 시키자.”

메뉴를 받아적고 주방으로 가자 뒤쪽에 모여있던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철판요리만으로도 이미 2인분은 충분히 넘은 것 같은데 초밥과 우동, 그리고 튀김까지 4명은 먹을만한 양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이걸 다 먹겠대?”

“네.”

여자의 주문이 전부 먹을 수 없는 양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남자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사장님도 그 모습을 보고만 있으셨다. 당연히 나 또한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중간중간 물이 없거나 접시가 비었을 때 조용히 옆으로 갔지만, 따로 말을 섞을 일은 없었다. 너무 할 일이 없어 눈치껏 빠져있는 게 힘들 정도였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취미는 없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을 수는 없어 그들이 하는 대화를 전부 다 듣고 있어야 했으니까.

“아줌마가 자랑을 얼마나 하시던지. 제가 어떻게든 오고 싶다고 졸랐어요.”

“사모님께서요?”

“네. 물어봤더니 아시더라고요. 몇 번이나 가 보라고 하셨어요.”

“만족하십니까?”

“완전요. 너무 늦었으니까 조금만 먹어야지 했는데 과식했어요.”

“그러면 디저트는 패스하시겠습니까?”

“에이, 그래도 그건 먹어야죠.”

여자분이 꽤 수다스러운 거에 비해 남자 쪽은 말이 없었다. 오래 알고 지낸 단골은 남자 쪽인데도 처음에 왔을 때 몇 마디 안부를 건넨 것 외에는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딱 생긴 것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러다 큰일 나겠다. 그렇지 않아도 2킬로나 늘었는데, 요즘. 남들은 여름 되면 좀 빠진다는데 왜 나는 반대야?”

“말랐으니까 좀 쪄도 돼.”

“그렇게 방심하다 정말로 찌면 어쩌려고?”

그런데, 한참 다이어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던 남자가 완전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넌 쪄도 예쁠걸.”

아. 저건 진짜 의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