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4화 (4/96)

#04

어딜 봐도 그럴 것 같지 않던 남자가 입에 달콤한 말을 담았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이미 얼굴이 구겨지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전혀 멋이 섞이지 않은 말투 때문일까, 오히려 툭 하고 뱉은 말이 성의 없다기보다는 더 진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입을 비죽였다.

“치, 또 대충 대답한다.”

저런 말이 오가는 거 보면 당연히 연인이겠지.

사실 남자는 저런 말 외에도 몇 가지 의외의 행동으로 여자와의 관계를 드러냈다. 의자를 빼준다거나 여자의 식사를 먼저 챙기는 것은 물론 여자의 행동을 미리 잘 알고 그에 맞춰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밴 듯했다.

가령 지금처럼.

“이제 그거 그만 마셔. 또 나중에 잠 안 온다고 하지 말고.”

커다란 손이 여자 앞에 놓인 녹차 잔을 제 앞으로 가져갔다.

말투는 다정하지 않지만, 행동은 누구보다 다정한 남자. 무뚝뚝한 것 같아도 필요할 때 달콤한 말을 해 주는 남자. 누구나 쉽게 거절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아니, 일단 저 얼굴부터가 반칙이니까.

“사장님, 정말 잘 먹었어요.”

예상대로 그들은 시킨 음식의 절반 정도를 남겼다. 그나마 남자 쪽에서 예상보다 많이 먹었기에 그 정도였다. 계산서를 전해주기 전 보통은 먼저 다가가 포장을 할 건지 물어보는 것이 순서지만, 오늘은 묻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먹을 것 같지는 않아서.

타이밍에 맞춰 테이블로 가 계산서를 전달했다. 남자는 한 끼 식사에 200불이 훌쩍 넘는 금액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카드를 내밀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나를 향해있었다.

“혹시 혼자 남아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라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완전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한 박자 뒤늦게 아니라고 대답하자 다른 말이 들려왔다.

“사장님과 셰프는 제외하고요.”

리셉션을 맡았던 담당자는 11시에 그들이 오자마자 집으로 돌아갔고, 주방 이모도 튀김 요리를 내놓자마자 앞치마를 벗고 가셨다. 사장님과 일식 셰프님을 제외하면 나 혼자 남아있었다.

“아……. 일식 셰프님과 사장님 제외하면 맞아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손님에게 그걸 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뒤돌아섰다.

이러면 얼굴만 반칙이 아니잖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한 글자씩 꾹꾹 누른 음성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계산대로 가면서 건네받은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KANG SE HYEON」

강세현.

참 이름까지 완벽하구나.

그리고 남자는 조금 후, 내게 건네받은 카드 영수증 아래 더 완벽해 보이는 사인을 해 놓고 돌아갔다. 멋진 사람은 사인까지 멋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뒤늦게 적어놓은 숫자를 보고 머리가 멈춰 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AMOUNT: $269.29

TIP: $300.00

TOTAL: $569.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시 보고 또다시 봐도 똑같은 숫자였다.

“그만하고 가자. 내일 해도 돼.”

쏜살같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신 사장님은 피곤한 듯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뒤따라 나온 일식 셰프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사장님이 괜찮다는데 뭐해. 피곤하다. 가게 문 닫아야 하니까 얼른 가자.”

“그래도…….”

“괜찮아. 내일 어차피 다시 또 닦아야 해.”

손님이 돌아간 후 테이블 정리는 대강했지만, 기름이 덜 닦여 번들거리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한 번 더 닦으려 하자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제발 집에 좀 가자며 억지로 등을 떠밀었다.

“아, 맞다. 성하야. 넌 잠깐 기다려 봐.”

사장님은 가게 입구에서 갑자기 멈춰선 채 나를 부르셨다. 아까부터 집에 가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던 셰프님이 먼저 떠나가고, 나는 멀뚱히 서서 사장님을 기다렸다.

“이거 가져가야지.”

사장님은 까만색 지갑에서 백 불짜리 지폐 한 장과 오십 불짜리 지폐 네 장을 꺼내셨다. 정확히 300불이었다. 다짜고짜 손에 쥐여 주는 바람에 엉겁결에 받아들긴 했으나 이유도 모르는 돈을 덥석 받을 수 없어 물었다.

“사장님, 이건 저한테 주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네 건데 왜 안 되냐.”

“그렇지만 이건-”

“오늘 남아서 열심히 고생한 값이야.”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고생이라고 하기에 너무 민망할 정도로 한 게 없는 데다 겨우 한 시간밖에 되지 않은 시간에 300불이라는 팁은 과한 정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손님이 많이 준 걸 어떡하냐. 팁은 손님이 원하는 만큼 주는 거잖아.”

“그래도 제가 혼자 이만큼 갖는 건 좀……. 사장님이나 셰프님도 남아서 고생하셨잖아요.”

보통 셰프들은 손님이 음식을 먹으며 직접 팁을 건네기 때문에 계산할 때 영수증에 적는 팁은 오직 서빙하는 직원끼리 나눠 가진다. 그러나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끝까지 남아있었던 사장님이나 셰프님도 고생하셨을 텐데 서빙하는 직원이 나 하나라고 이렇게 많은 팁을 혼자 갖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말을 듣던 사장님은 피식 웃으시며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우리가 너보다 많이 받았으면 많이 받았지, 적게 받지는 않았을 거다.”

“……아.”

“너 계산하러 간 사이에 우리 몫은 따로 챙겨주셨어. 그러니까 그냥 감사하다 생각하고 받아.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괜히 싸움 날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사장님은 내일 보자는 짧은 인사를 한 후 차로 걸어가셨다.

나는 후덥지근한 차 안에 앉아 꼬깃꼬깃하게 접힌 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00불.

일주일 동안 일하면 벌 수 있는 돈. 그 돈을 단 한 시간 만에 번 셈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누구에게는 일주일이 필요한 돈을 단 한 시간 만에 쓰는 사람이 있구나.

* * *

6시 30분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뜨였다. 일부러 열어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새벽 6시가 막 지난 시각이었다.

지금 다시 눈을 감으면 혹시라도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30분의 달콤한 잠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정작 잠든 시각은 새벽 2시였으니 고작 4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한 것이었다. 걱정과 기대가 섞인 감정이 밤새 뒤척이게 했다.

잠을 깨기 위해 곧바로 샤워를 하고 발코니로 나갔다. 희뿌연 새벽하늘 아래 맑은 공기가 조금 남아있던 졸음을 단번에 쫓았다.

“후우…….”

오늘이었다.

드디어 개강. 대학 생활의 시작이 바로 오늘이었다.

‘너 어디 갈 거야?’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몇 개월 전부터 대학교 합격 통지서가 하나씩 도착했다. 뉴욕 근처에 있는 대학 네 곳,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대학 한 곳. 총 다섯 곳에 지원했고, 전부 합격했다. 그중 가장 먼저 합격 통지서를 보내온 곳이 지금 다니게 된 대학이었다. 지원한 곳 중 가장 순위가 낮은 대학이었고 사는 곳에서도 가장 먼 곳.

당연히 1순위였던 곳은 뉴욕에 있는 대학이었다. 그곳에 합격했으니 다른 대학의 통지서를 기다릴 필요도 없는데 자꾸만 선택을 주저하게 되었다. 그냥 한 번 보내볼까, 하는 심정으로 신청서를 보낸 대학 하나 때문에.

‘난 네가 여길 벗어났으면 좋겠으면서도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선택을 망설이자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소라는 솔직한 제 심정을 말했다. 진심이 묻은 그녀의 말은, 솔직한 나의 심정이기도 했다.

뉴욕에 머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처음에는 익숙한 학교, 익숙한 주변 환경, 익숙한 사람들, 그런 익숙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뭐든 수월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 때문에 어느 정도의 안일함이 허락되는 생활을 굳이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뉴욕 근처 대학에 간다면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나온 친구 중 누군가는 그곳에 있을 터였고, 이사를 하거나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뉴욕에는 딱 한 명, 절대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네가 권성하?’

고등학교 때 내가 일하는 곳에 불쑥 찾아온 사람은 한눈에 봐도 그 사람과 똑 닮아있었다. 그제야 이해했다. 그 사람에게 친아버지를 꼭 닮은 내가 얼마나 싫었을지.

‘혹여라도 허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버지 아들은 나밖에 없어.’

딱히 볼 일 없는 의붓형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나중에라도 자신이 물려받을 재산이 줄어들까 봐서였다. 그는 새아버지가 이혼 후에도 얼마나 자신을 아끼는지에 대해 말했고, 혹시라도 기대는 하지 말라며 그 사람에게 아들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열띤 설명을 할 때도 내 머릿속에는 그저 ‘부자는 떨어져 있어도 성격까지 닮는구나’, ‘혹시 그렇다면 나도 친아버지를 닮았을까’ 그런 생각뿐이었다.

의붓형은 그 후로도 아주 가끔 찾아와 똑같은 경고를 하고 돌아갔다. 그때마다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무덤덤하게 대응했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괜한 시비를 걸며 못난 말을 쏟아내고 떠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만취 상태로 집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시발, 어디서 거지새끼가 끼어들어 가지고.’

그때 하필이면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소라였다. 모든 걸 알게 된 소라는 누구보다 내가 뉴욕에 남길 바라면서도 누구보다 내가 떠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정 보고 싶으면 이 누나가 놀러 갈 테니까 성하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넌 어딜 가나 잘할 거야.’

나는 결국,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택했다.

아는 사람도, 친한 친구도, 편한 장소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언제나 처음은 힘들었다.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혼자서 미국에 왔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일 뿐, 어느 순간 두렵던 장소는 편한 곳으로 바뀌었고 낯설기만 한 주위 환경은 익숙한 배경이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생활도 곧 익숙해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띠링-.

윤소라: [굿모닝]

윤소라: [오늘이지?]

윤소라: [조심히 운전하고 잘 갔다와]

윤소라: [이 말 하려고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남]

왠지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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