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왜 이렇게 늦게 나와! 하여간 졸라 바빠.”
기현 형이 강세현에게 잔소리를 하는 동안 정우 형이 머쓱한 우리 사이로 들어왔다.
“서기현. 너 조용히 좀 하고. 세현아, 인사해. 얘가 우리가 말한 성하. 권성하. 너랑 동갑인 거 알지?”
얇은 티셔츠 너머 언뜻 보이는 상체나 짧은 소매 아래 보이는 팔뚝이 단단해 보였다. 그래도 역시 할 말을 잃게 만든 건 넓은 어깨 위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주변 지인이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는 일은 꽤 흔한 일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럴 때 어떤 표정으로, 어떤 인사말을 건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 수도, 제 소개를 할 수도 없어 그냥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상대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부릅떴다. 놀란 얼굴을 보고도 어째 그때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때 상대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있어서인지 대놓고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 없을 것 같아 나도 따로 말하지 않았다.
“이제 카드 칠까?”
“그러자. 야, 게임기 꺼.”
어색할 겨를도 없이 카드 게임을 하자는 형들의 손에 이끌려 소파 뒤에 있는 테이블에 강제로 앉았다. 친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형들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카드를 손에 쥐여 주었다.
“인원 많으니까 홀덤1)으로 한다. 성하 너 할 줄 알지?”
“룰은 알아요.”
“그래, 그럼 시작하자.”
친구들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배워 대충 룰은 알고 있지만 직접 누군가를 상대할 만큼 잘 아는 건 아니어서 연습게임 몇 판을 내리 졌다. 한번 이기기만 하면 푹 빠진다던데 그 전에 이미 흥미를 잃어 그다지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저, 잠시만요.”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핑계로 슬쩍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본 게임을 앞두고 다들 집중하는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의외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담배 피우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커다란 스낵 봉지를 한 손에 든 집주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같이 안 하지?
강세현은 모두가 테이블에 앉을 때도 시큰둥하더니 어느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가 지금까지 찾지 않는 걸 보니 원래 카드 게임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장소는 제공해 놓고 함께 어울리지는 않는 게 조금 의아했다.
‘걔는 우리랑 있는데도 혼자 놀아.’
진짜 혼자 노는 건가.
“흡연실이 따로 없어서 8층 아니면 1층까지 내려가야 돼.”
“아. 알았어.”
사실 담배를 피운다는 건 카드 게임을 하지 않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는데 상대가 대뜸 현관을 가리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현관으로 가 운동화를 신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갑자기 앞에 큰 그림자가 졌다.
“어?”
“같이 가.”
정말 놀랍게도 의외의 인물이 따라 나왔다.
굳이 같이 안 가도 되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8층으로 가는 동안 그저 어색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먼저 말을 걸어볼까도 몇 번 생각했지만, 너무 담담한 상대의 표정을 보고 그냥 말았다.
띵-.
상대는 8층에 도착해서 나보다 앞서 걸었다. 동일한 형태의 내부는 24층보다 문이 많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흡연실이 있는 건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상대를 따라 도착한 곳은 건물 중간에 있는 바깥 공간이었다.
휘이익- 살짝 열린 문틈으로 꽤 강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막상 문을 완전히 열고 밖으로 나가자 오히려 잠잠했다. 새벽이라서 그런지 그곳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재떨이 두 개가 세워진 곳에서 각자 담배를 물고 조용히 불을 붙였다.
“후우…….”
고층은 아니지만 여기서 보는 야경도 꽤 괜찮았다. 이런 데는 한 달에 월세가 얼마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어둑한 배경 속에서도 선명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여태 누군가의 외모를 부러워한 적은 없었는데 볼 때마다 감탄을 불렀다.
“넌 카드 안 쳐?”
딱히 궁금했다기보다 정말 생각난 말이 그것밖에 없어서 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든 하긴 해야겠는데 도저히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아서.
상대는 내 물음에 쉬운 대답을 내놓았다.
“별로 재미없어서.”
맞아. 별로 재미없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말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 나 왜?”
“너는 왜 안 하냐고. 하기 싫었던 거 아냐?”
“어. 나도 별로 재미없어서.”
피식, 상대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또 한 번 생각했다. 자식, 그것참 잘생겼네.
불과 몇 초 전까지 어색하기만 했는데 갑자기 아무렇지 않아졌다. 아무 말도 없이 각자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이 정적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상대가 고작 한 번 웃어줬다고.
“기현 형이랑 같은 강의 듣는다면서.”
“어.”
“형 강의 잘 안 듣지?”
“……어.”
교수의 소문이 별로긴 해도 워낙 설명이나 말을 잘해 강의 자체가 지루하지는 않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기현 형은 늘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성적은 좋을걸. 형 머리 좋거든.”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직 기현 형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했다.
그 후로도 우리는 기현 형을 주제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의외였다.
아는 사람도 잘 만들지 않는다길래 엄청나게 낯을 가리거나 아예 말을 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단지 까탈스럽다는 형들의 말만 믿고서 혹시 재수 없게 행동하면 어떻게 하나, 잠깐이나마 고민했던 게 무색할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일부러 따라와 준 거고.
“뉴욕에서 왔다던데.”
담배를 거의 다 피워갈 때쯤이었다. 생각보다 나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꽤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가 뉴욕에 있었지.
당연히 그에 관한 질문이 딸려올 줄 알았는데 상대는 담배를 끄며 짧게 가자는 말만 뱉었다.
다시 돌아갔을 때는 여전히 모두가 카드에 집중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는 생소한 모습이었다. 쉬지 않고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이 없는 것도, 진지한 표정을 하는 것도 놀라웠다.
“다시 하게?”
내가 물끄러미 테이블을 쳐다보자 강세현이 물었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쳐다본 거야. 다들 너무 조용해서. 저게 저렇게 재미있나 싶기도 하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절대 다시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성의 있는 내 대답에 만족한 상대는 그래, 하고 짧은 말을 내뱉었다.
“뭐 마실래?”
차가운 맥주병을 든 집주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맥주 뚜껑을 연 뒤 잔뜩 인상을 쓴 제이슨 형 앞에 놓았다. 마치 본인이 마실 것처럼 해 놓고 그 후로도 다른 술병을 열어 형들 앞에만 놓아주었다.
“넌 뭐로 줄까? 맥주 아닌 것도 있어.”
“그럼 콜라.”
“술 안 마시고?”
“어.”
맥주 아닌 것도 있다길래 당연히 술이 아닌 음료를 말하는 줄 알았다. 주방 선반 위 줄지어 놓여있는 위스키와 보드카를 보고서야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커다란 손이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집과 너무나 어울리는 메탈 빌트인 냉장고는 우리 집 것보다 족히 세 배는 더 커 보였다.
“얼음은?”
“줘.”
냉동고가 있는 아래 칸이 열릴 줄 알았는데 한쪽 편에 자그마한 아이스 메이커가 있었다. 참 별 게 다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해야 했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런 것도 있어?”
“어. 하도 많이 먹어서 샀어.”
“진짜 안 어울린다.”
그렇게 말하자 어이없는 웃음이 뒤따랐다. 강세현은 대뜸 형들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식구가 많아.”
“아.”
“너도 달라며.”
그거야 그렇지만.
확실히 자주 모이는 게 맞는지 평범한 대학생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갖춰진 게 많았다. 집 크기부터가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거실에 있는 커다란 티브이와 게임기, 당구대, 카드 테이블 등 그 안에 갖춰진 것들은 더 놀라웠다. 어떻게 보면 아이스 메이커 정도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걸 수도.
“영화 볼래?”
얼음이 가득 담긴 컵을 건넨 강세현은 내가 형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 하자 정 반대편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란 다리가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이 집이 평범하지 않음을 다시 느꼈다.
영화를 보자고 하길래 기껏해야 빔프로젝터 정도를 떠올렸는데 사방에 암막 블라인드가 설치된 방 안에는 홈씨어터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거실에 있는 티브이보다 더 큰 화면은 물론 큼직한 스피커가 양쪽에 서 있었다.
“보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아무거나 상관없어. 너 보던 영화 있는 거 아니야?”
“한 번 봤던 거라서 다른 거 봐도 돼.”
화면에는 낯익은 장면이 멈춰져 있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감독의 영화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상미가 뛰어난 꽤 괜찮은 영화였다. 여러 번은 아니더라도 한두 번 정도는 다시 볼만한 그런 영화.
“그냥 보자. 나도 이미 봤던 건데 다시 봐도 돼.”
재생 버튼이 눌리자마자 화면이 돌아가고 바로 옆에서 귀를 울리는듯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영화에 집중하기도 잠시 한쪽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하아…….”
귀찮은 듯한 한숨 소리.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집주인은 계속 보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돌연히 사라져버렸다.
1) 텍사스 홀덤. 2장의 플레이어 카드와 5장의 커뮤니티 카드를 포함한 총 7장의 카드로 하는 포커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