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0화 (10/96)

#10

덩그러니 혼자 남아 영화에 집중했다. 방음이 매우 잘 되어있는 곳이라서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고, 천장 홈을 따라 은은히 들어오는 조명 때문인지 큰 화면을 보는데 눈에 부담이 적었다. 정말 말 그대로 영화에 집중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벌컥-

“세현아. 우리…… 어?”

허락 없이 문을 연 기현 형은 혼자 남아있는 나를 보고 턱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세현이는?”

“전화 받으러 갔어요.”

“헐. 또?”

“왜, 세현이 없어?”

기현 형 뒤로 익숙한 얼굴들이 차례대로 나타나 한마디씩 거들었다.

“또 통화 중이래. 최소 30분은 걸리겠다.”

“아까 한 번 왔었으니까 더 짧을 수도 있어.”

“아닐걸. 오늘 기분 별로랬어.”

“그럼 30분 본다.”

형들은 이미 통화 상대가 누군지 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데요?”

“여자친구.”

“여자친구.”

“여자친구.”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터져 나온 대답에 그저 고개만 까딱였다. 생각해 보면 이런 새벽 시간에 마음대로 전화를 걸만한 사람은 상대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 만한 연인이나 가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뉴욕에 있다던 여자친구요?”

“어. 맞아. 둘이 엄청 자주 싸우거든. 맨날 붙었다 헤어졌다 해.”

“싸운다기보다는 매번 세현이가 일방적으로 욕먹다가 차이는 거지. 쟤도 대단해. 또 돌아오면 매번 알았다고만 하고 그걸 받아준다니까.”

가게에 함께 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넌 쪄도 예쁠걸.’

무덤덤하게 툭 뱉었던 그 말이 다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많이 사랑하나 보죠.”

정말로 그렇게 느꼈기에 한 말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거나 다름없는 사람을 어떻다고 평가하긴 어렵지만, 그때 본 강세현은 정말 상대에게 진심으로 보였으니까.

그런데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쏟아졌다. 장난스레 웃는 정우 형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찡그린 표정이었다.

“왜요?”

“아니, 그런 결론이 나온다는 게 정말 신기해서.”

“그게 왜 신기해요?”

“네가 강세현을 알고 나면 절대 그 말이 안 나올 거거든.”

그러면 아니라는 건가. 진짜 그렇게 보였는데.

“그냥 귀찮아서 그러는 걸 수도 있어. 아니면 익숙해졌거나. 오래 사귀었으니까…….”

“얼마나 됐는데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했다던데. 여자친구한테 여전히 잘하는 건 맞는데 그게 진짜 좋아서 그런 건지는……. 뭐,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니 우리도 사실 잘 모르겠다.”

확실히 서로 잘 아는 것 같아 보이긴 했었다. 여자친구도, 강세현도 서로에게 익숙해 보였었다. 그렇다면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을 텐데 형들은 계속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성하 너 진짜 모르냐? 세현이 여자친구 뉴욕에서 꽤 유명하다던데.”

내 기억에 얼굴은 낯이 익었지만 분명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워낙 한인 인구가 많은 곳이라서 우연히 스친 적은 있을 수도 있지만 일하는 곳에서도 만난 적이 없었다.

“너랑 동갑이야. 이름이 차-”

“아, 됐고. 일단 우리끼리 피자 시키자. 없는 사람 이야기 그만하고.”

정우 형이 신나게 떠들던 기재 형의 입을 막았다.

“지금 배달되는 데가 있어요?”

“응. 이 근처는 새벽 2시까지 하는 데 있어. 우리 윙도 시키자.”

“성하 너 피자 뭐 좋아해? 제일 좋아하는 거 말해봐.”

“전 하와이언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너도 파인애플 싫어하냐?”

“네. 익힌 건 별로.”

“세현이랑 똑같네. 세 판 시킬 거니까 그럼 두 판은 없는 거로 할게.”

“야, 나는 페퍼로니.”

늦게 와서 빈손으로 온 게 영 맘에 걸려 지갑에서 20불짜리 지폐를 꺼냈다. 하지만 ‘형, 저기……’ 하고 운을 떼자마자 곧바로 제지당했다. 원래 피자는 게임에서 진 사람이 내는 거라고.

“저는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안 내도 돼.”

“그러면 게임 안 한 사람은 못 먹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건 너무 치사하다. 그래도 같이 있는데.”

“만약 그런 거면 그냥 카드 안 치고 얻어먹는 게 낫잖아요.”

“그러면 재미없잖아.”

한쪽에서 제이슨 형이 피자 주문을 하고, 다른 형들은 전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어떻게 기현 형이 가장 먼저 파산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느라 화면은 아까부터 멈춰선 채 있었다. 뒤늦게 우울한 표정으로 지갑을 쳐다보던 기현 형이 멈춘 화면을 보며 물었다.

“이거 재밌어?”

“네. 괜찮아요.”

“뭔데? 액션은 아닌 것 같고. 로맨스야?”

“아니요. 로맨스는 아니고…… 그냥 드라마? 솔직히 스토리는 평범한데 감독이 영상이나 사운드를 많이 신경 써서 볼만해요.”

그렇게 말하자 어떤 내용이냐는 추가 질문이 돌아왔다. 기껏 성의있게 설명까지 했는데 대답을 다 들은 형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아무에게도 흥미를 끌지 못한 영화는 계속 그 화면에 멈춰선 채 있었다.

강세현이 돌아온 건, 형들이 포켓볼을 치겠다며 거실로 나가고 난 뒤 화면에서 멈춰있던 남자 주인공이 홀로 여행을 떠날 때였다.

달칵-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강세현은 짧은 숨을 내쉬며 옆자리에 앉았다.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긴 머리 아래 반듯했던 이마가 구겨져 있었다.

“너 없을 때 피자 시켰어.”

“오늘은 누가 낸대?”

“기현이 형.”

“또?”

얇은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기현 형이 피자값을 내는 게 한두 번은 아닌 모양이었다.

“세 번 중 두 번은 기현 형이 낼걸. 좀 괜찮다 싶으면 무작정 올인1)하니까. 기현 형 아니면 정우 형이야.”

“정우 형?”

“어. 정우 형은 이상하게 게임만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나서. 카드는 하면 안 되겠더라.”

“의외네.”

“그렇지.”

계속 형들에게 상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반대로 상대에게 형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형들 와서 여기까지밖에 못 봤어?”

강세현은 아직 앞부분도 지나가지 못한 화면을 가리켰다.

“어. 조금 전에 왔다 갔어. 포켓볼 친다던데. 너도 치려면 지금 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걸.”

“됐어.”

“당구도 안 좋아해?”

“아니, 그건 아닌데 중간에 자리 비워야 할지도 몰라서.”

“아…….”

하마터면 아직도 할 말이 남았냐고, 또 통화해야 하냐는 눈치 없는 질문을 던질 뻔했다. 어느새 시간은 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여전히 느릿하게 흘러가는 도입 부분이었다. 흥미로운 중반에 들어서려면 주인공이 비엔나에 도착해야 하는데, 여전히 그는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지나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끔뻑끔뻑 잠이 오기 시작했다. 반쯤 누울 수 있게 된 소파도 한몫했다.

“끌까.”

아닌 척해 봤지만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그새 눈치챈 상대가 불쑥 리모컨을 내밀었다. 상대 역시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앞부분은 좀 지루하네. 그렇지만 않으면 흥행했을 텐데. 뒤부터 재밌어지는데 앞부분이 장벽이라서 사람들이 안 본 거야.”

“그러게. 그럼 다른 거 보든가.”

“됐어. 그냥 보자. 한 10분만 참으면 그때부터 재밌는 장면 나올 텐데.”

“그쯤 되면 피자 도착할걸.”

“아……. 맞다.”

강세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보다 잘 웃는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유독 웃음을 아끼던 얼마 전이 떠올랐다.

“우리 가게, 왔었던 거 맞지?”

사실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었지만 그래도.

딱히 아는 체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글렌뷰에 있는 일식집 말하는 거지?”

강세현은 익숙한 상호를 대며 물었고, 나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한번 보고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듯했다.

“맞아.”

역시 그랬구나. 너 맞구나, 300불.

“그때 같이 온 사람이 여자친구?”

“어.”

“예쁘더라. 잘 어울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나를 보는 눈이 커졌다. 혹시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 설마 칭찬이 기분 나빴을 리는 없고.

“그날,”

“어?”

“너무 늦게 가서 민폐였어.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후회가 담긴 말에 이번에 놀란 사람은 나였다. 그때도 느꼈지만 강세현은 300불이 넘는 팁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낼만큼 돈이 많은데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자란 제멋대로인 사람들과는 달랐다.

뉴욕에 있을 때도 돈 많은 집 자제들은 여러 명 봤었다. 집에 있는 거라곤 돈밖에 없는데 한국에서 하도 사고를 쳐서 유학 온 벼락부자의 자제도 있었고, 체면을 신경 쓰는 집안에서 그럭저럭 명함 내밀 정도의 학력을 만들어 주기 위해 대단한 선생의 작품 실력을 빌려 아트 스쿨에 입학하는 재벌 집 자제도 있었다.

물론 부잣집에서 태어난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으로 유학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대부분이 돈이 있는 만큼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돈이 있으니까 설령 옳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더라도 그 죄를 사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세현은 그날 저녁 비록 늦게 와서 가게에 남아있는 우리에게 민폐를 끼쳤지만, 단 한 시간이라는 시간을 빼앗는 대신 며칠 동안 일하지 않아도 되는 값을 지불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돈으로 그만큼의 보상을 했으므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텐데, 놀랍게도 자신이 한 행동과 돈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딩동-.

“피자 왔나 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루하게 흘러가는 영화를 멈췄다. 곧 문이 열리고, 요란한 고함이 들려왔다.

“성하야, 세현아- 친구랑 나와서 피자 먹어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지만 신은 좀 불공평하구나. 얼굴도 잘났고 돈도 많은 애가 공부도 잘해. 그런 데다 성격까지 똑바르니 화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런 강세현을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었다. 친구로 두면 정말 괜찮

겠다, 하는.

1) 카드 게임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한판에 전부 거는 일.

@MINT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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