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2화 (12/96)

#12

“둘이 비슷하게 왔네. 너네 그러고 서 있으니까 몇 번은 만난 사이 같다.”

기숙사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기현 형이 아닌 정우 형이었다.

“형 오늘 늦게 끝나는 날 아니에요?”

“마지막 강의 안 갔어.”

“그래도 돼요?”

“출석 체크도 없고, 오늘 중요한 거 없는 날이라서.”

정우 형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형 잠 못 잤어?”

“어. 오전에 프레젠테이션 있어서 며칠 동안 거의 밤새웠더니 피곤해 죽겠다. 나는 올라가서 바로 잘 테니까 알아서 놀다가.”

지금껏 말끔한 모습만 보이던 정우 형은 오늘 실로 놀라울 만큼 폐인이었다. 매번 캠퍼스에서 눈에 띌 만큼 옷을 잘 챙겨입고 다니던 사람이 후줄근한 후드티를 입고 있었고, 무엇보다 며칠 사이 제법 길어버린 수염을 밀지 않아 자칫해서는 못 알아볼 뻔했다.

대체 무슨 프레젠테이션일까. 나도 내년이면 같은 수업 들어야 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그룹 프레젠테이션이었어요?”

“아니. 나 혼자. 왜, 걱정돼서?”

“네. 내년에 저도 그 수업 들어야 되잖아요.”

“안 그래도 돼. 미리 좀 준비해뒀으면 괜찮았을 텐데 내가 너무 갑자기 준비해서 그래. 귀찮아서 미루다가 완전 까먹었거든.”

아마 강세현 다음으로 의외인 인물은 정우 형일 것이다. 카드 게임 결과를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잊어버렸다는 건 더 충격이었다. 지금껏 일과 학업을 균형 있게 잘하는 완벽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애들 왔어.”

오늘도 역시 현관문은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준성 형이 소파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는 잔다.”

“형, 핫도그는요?”

“남겨놔. 일어나서 먹을 거야.”

정우 형이 방으로 들어가고, 짠 것처럼 그 타이밍에 기현 형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아니요, 형. 그러면 제가 좀 이따 갈게요. …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를 보고 손을 들던 기현 형은 살짝 인상을 쓴 채 다시 걸음을 돌렸다. ‘먼저 먹어.’ 소리 없이 그렇게 말하곤 방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통화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식탁 위에 핫도그를 내려놓은 강세현은 소파로 가 앉았다. 기스가 나고 한쪽이 푹 꺼진 싸구려 소파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역시 물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구나. 단지 강세현이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촌스러운 소파가 달라 보였다. 마트에 파는 7불짜리 티셔츠도 강세현이 입으면 명품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매고 있던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소파에 팔을 길게 늘어트린 채 삐딱하게 기대어있던 강세현이 손을 까딱거렸다.

까딱까딱. 딱 두 번. 겨우 작은 손짓만으로 홀린 듯이 소파로 가 그 옆에 앉았다. 뒤늦게 나 혼자만 아는 민망함이 밀려왔다.

“왜 거기 앉아?”

“핫도그 먼저 먹으려고. 배고파서.”

오늘은 점심이 조금 일렀다. 보통 세 번째 수업이 끝날 때쯤 먹는데 오늘은 도서관에 가기 위해 두 번째 수업이 끝난 후 먹었기 때문에 샌드위치로 하나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나있었다. 평상시에 딱히 먹는 데에 집착하는 편이 아닌데 평소와 다르게 유독 허기가 일었다.

“그럼 말하지.”

강세현은 기다란 몸을 일으켰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세 개의 종이봉투 중 하나를 들고 와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탄산음료를 꺼내 들고 왔다. 집주인은 따로 있는데 마치 여기서도 집주인인 것처럼.

강세현과 3인실 기숙사라. 정말 어울리지 않는데도 또 완벽히 어울리는 듯한 이상한 조합이었다.

“쟤가 진짜 네가 맘에 들긴 했네.”

집주인 흉내를 내는 강세현이 컵과 냅킨을 챙기러 간 사이 준성 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요?”

“우리도 설마 했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할지 몰랐지.”

“그러니까 뭐가요?”

“강세현이 원래 몇 번 본 사람한테 이렇게 잘하진 않거든. 토요일 날도 솔직히 우리 다 놀랐다. 저 자식 처음 본 사람한테 절대 그렇게 안 하거든.”

“아…. 원래는 어떻게 하는데요?”

“나중에 말해줄게.”

“그냥 지금 말해. 어차피 다 들리는데 아예 대놓고 말하지 그래.”

그새 돌아온 강세현은 그 큰 키로 가만히 서서 뚱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형 목소리가 좀 크긴 했어요. 나는 준성 형을 향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싫어. 너 없을 때 할 거야. 그게 더 재밌으니까.”

“하.”

“그동안 너 때문에 있었던 해프닝이 몇 개냐. 성하야, 좀만 기다려. 쟤 없을 때 말해줄게. 강세현이 얼마나 성격이 나쁜지.”

준성 형이 대놓고 비웃었지만, 상대의 도발에도 강세현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그 잘난 얼굴로 내게 핫도그를 내밀었다.

“자.”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체 강세현의 어디가 까칠하고 어떻게 성격이 나쁜 건지.

형들의 말대로라면 결국 내 세 번째 짐작은 맞는 것 같았다. 강세현은 나를 특별 대우하고 있는 듯했다. 원래는 그렇지 않은 강세현이 내겐 잘한다는 건데 만약 그렇다면 내 어디가 마음에 들었을까. 처음 본 내 어디가, 어떻게.

한입 베어 문 핫도그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허기진 뱃속에 뭔들 맛없으랴 싶지만 아침에 씨리얼 바, 점심에는 닭가슴살 샌드위치. 지나치게 담백하기만 했던 속에 기름진 게 들어오니 엄청난 칼로리를 충분히 용서하고도 남을만한 맛이었다.

평소보다 더 빨리 먹었지만 내가 맨 마지막이었다. 강세현은 고작 네 입 만에 핫도그를 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뒤늦게 기재 형과 제이슨 형이 합류했다.

“왜 너희밖에 없어?”

“정우 자고 기현이는 통화 중. 아까 들어갔는데 안 나오네.”

“누구랑 통화 중이길래 방까지 가서 전활 받아?”

“몰라. 심각해 보이던데.”

“올- 걔가 심각한 통화도 하고 그러냐?”

“형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누군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걔가 아는 형이 한두 명이냐. 예전에 알던 사람인가 보지.”

형들은 기현 형이 원래는 랩을 하겠다고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다가 12학년 중간쯤 되어서야 대학에 가겠다고 갑자기 공부를 시작하면서 쓸데없는 인연을 다 정리했다고 했다. 보통은 1년 넘게 학원에 다니며 만드는 SAT1) 성적을 3개월도 안 돼서 해냈다고 하니 기현 형이 머리가 좋다고 했던 강세현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여전히 기현 형이 대학 올라와서 훨씬 얌전해졌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내 눈에는 기현 형의 존재감이 어딜 가나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 왔냐?”

양반은 못 되려는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기현 형이 방에서 나왔다. 무슨 통화를 이리 오래 하냐는 준성 형의 잔소리에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아, 자꾸 술 마시러 오라고 해서.”

“3층이었어?”

“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 해결했다며 형은 남아 있는 핫도그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나왔다는 초대박 게임팩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치느라 손에 든 핫도그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결국 내려놓고 대신 게임기를 손에 들었다.

“이거 봐. 대박이지.”

“생각보다 괜찮네. 이 회사가 만든 건 다 별로였는데.”

전혀 흥미가 있을 것 같지 않던 강세현은 예상과 달리 매우 잘 아는 것처럼 옆에서 몇 마디를 거들었다.

“왜.”

너무 뚫어져라 쳐다봤나. 신기하게 쳐다보는 걸 금방 본인에게 들켰다.

“그냥. 게임은 또 좋아하나 해서.”

“어.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좋아해.”

어쩐지 강세현다운 대답이었다.

혼자 할 수 있는 거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게 좋은 걸까, 아니면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게 좋을 걸까? 강세현이라면 그냥 혼자서 조용히 하는 게 좋다는 의미일 것 같은데, 그건 공간에서의 자유로움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차단되는 걸 의미하는 걸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온라인 게임은 또 싫다는 건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 또한 강세현을 특별 취급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보통 누군가를 알게 되어도 상대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가족보다 더 잘 안다고 할 만큼 친한 소라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만났었다. 그리고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어도 상대가 무얼 좋아하는지 내가 먼저 궁금해 본 적은 없었다. 같이 있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면 모를까.

그런데 강세현이라는 새로운 인물 하나가 자꾸 숨어있는 내 호기심을 건드렸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어떤 뜻밖의 부분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했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이게 했다. 가령 그렇게 미안해할 거면서 가게에 왔던 날 왜 그렇게 늦게 예약을 잡은 건지, 어째서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이모티콘을 쓰는지, 그리고 대체 무슨 이유로 나만 특별 취급하는지, 그런 것들.

처음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캐릭터라서 그런가, 하고 의심해봤지만 최근 알게 된 기현 형이나 제일 가까운 윤소라를 생각하면 그 사람들만큼 특이한 캐릭터는 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해낸 이유가 ‘의외라서’였다. 생각했던 것과 보이는 것, 들었던 것이 서로 너무 달라서. 그게 아니면 첫 만남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 마셨어?”

이런 복잡한 내 속도 모르고 강세현은 다 마신 콜라 캔을 수거하고 다녔다. 나도 참 한 깔끔하지만 너만큼은 아니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1) 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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