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3화 (13/96)

#13

쾅-!

“야, 서기현-”

한창 떠들던 와중에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으로 인해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낯이 익은 인물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쿵, 벽을 한 번 내리쳤다.

지난번 기숙사에 왔을 때 복도에서 잠깐 봤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분명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이상한 사람이었다.

“금방 온다더니 시발, 내가 이렇게 와야겠냐? 어?”

갑자기 찾아와 다짜고짜 기현 형에게 짜증을 내는 이는 아마도 조금 전까지 기현 형이 통화했던 상대인 것 같았다. 상대는 몸을 비틀거릴 정도로 완전히 만취 상태는 아니었으나 꽤 취한 것처럼 보였다. 양쪽 볼에 벌겋게 술이 오르고 목 전체까지 얼룩덜룩 붉은 반점이 피어 있었다.

술 마시러 오라 그랬다더니. 꼭 우리와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기현 형이 나중에 가겠다고 자꾸 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술버릇이 최악이었다.

좋은 분위기를 방해받았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우선 그것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어쨌든 이곳은 학교 기숙사였고, 반드시 이런 상황을 염려해 만든 규칙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소리치다가 누가 신고하면 괜히 이 방에 있는 형들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핫도그만 다 먹고 가려고 했어요, 형. 진짜예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상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식탁 위에 펼쳐져 있는 종이봉투를 우악스럽게 찢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핫도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씨발, 이딴 게 맛있냐?”

그러면서 왜 먹는 건데.

정우 형이 나중에 먹겠다고 했던 하나 남은 핫도그는 금세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심지어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주면 보는 우리도 편할 텐데 상대는 거실 한쪽을 마구 돌아다니며 먹었다.

매너 없는 주정뱅이의 행동도 화가 났지만, 그보다 볶은 양파나 소스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볼 때마다 짜증이 났다. 당장이라도 가서 바닥을 닦고 싶었다.

물론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은 한 사람 더 있었다. 옆에 앉은 강세현은 이미 한참 전에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것 같았다.

“하아….”

결국, 보다 못한 강세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일어난 후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갔으면 좋았으련만, 강세현이 걸음을 떼기도 전에 큰 덩치가 이번에는 소파 앞을 가로막았다. 역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너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라고 하는 건 이전에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다음에 나올 강세현의 행동에 대해 예측했다.

1번. 반갑게 인사한다.

2번. 똑같이 오랜만이라고 말한다.

3번. 짧게 네라고 대답한다.

솔직히 1번은 말이 안 되고 아마도 3번이 가장 유력할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놀랍게도 강세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싸늘한 눈동자는 분명 상대를 향해있는데, 상대의 말을 정확히 듣고도 그저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정답은 ‘무시한다.’였다.

“아, 형. 나 다 먹었으니까 가요.”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기현 형이 재빨리 남아 있던 소시지를 입에 욱여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술기운으로 벌게진 얼굴이 계속해서 한곳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기현 형이 한 번 더 말해도 꼼짝하지 않고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서기현 저 새끼가 조온나게 바쁜 척하니까 대신 네가 와라. 선배가 바쁘면 후배가 해야지.”

선배라는 말은 정말 생소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거의 쓸 일도, 들을 일도 없는 단어였다. 대학에 오기 전에도, 대학에 오고 난 후에도 대부분의 호칭이 형, 누나였지 선배인 적은 없었다. 한국 사람이라도 미국에 살면서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그게 당연했다.

그러니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도 미국에서 선배 후배를 논한다는 건 좀 바보스러우면서도 한심했다.

그렇다고 윗사람 아랫사람을 따지는 꽉 막힌 사람 앞에서 대놓고 싫은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멀쩡할 때도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은 상대가 술까지 취했으니 이럴 때는 그냥 좋게 넘어가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처럼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상황 자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게 강세현이었다.

“나이가 안 돼서 술 못 마시는데.”

아까부터 '참을 인' 자를 그리는 것 같더니 참고 참아서 뱉은 말이 그거야? 황당한 말을 뱉은 강세현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꺼지라고 내뱉을 것 같았다.

“하. 요것 봐라. 그럼 너는? 너도 안 되냐? 너도 1학년이지?”

통성명은커녕 인사도 나눈 적 없는 상대가 불쑥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튄 불똥에 어찌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옆에서 툭, 대답이 튀어나왔다.

“얘도 안 되는데.”

강세현이 나 대신 답하자 상대의 이마가 더 심하게 구겨졌다. 예상대로 거친 말이 쏟아졌다.

“애새끼들이 싸가지가 없어. 여기저기 hey hey 거리니까 존나 다 친구인 줄 알지. 선배 무서운지 모르고. 한국이었으면 너네 다 대가리 깼다, 씨발.”

“깨 보든가.”

“뭐 이 새끼야?”

강세현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급격히 험악해지자 중간에 끼어있던 형들이 중재에 나섰다.

“형, 얘 원래 이래요. 그냥 무시하고 가요. 상대할 필요 없으니까.”

“그래요. 형진이 형은요? 형 벌써 뻗었어요? 그러면 형도 그만 마셔요. 아, 아니다. 그냥 나랑 가요. 내가 같이 마셔 줄게요. 좀 올라가자고요!”

결국, 기재 형과 기현 형의 엄청난 만류 끝에 불청객은 조금 움직일 낌새를 보였지만 잘 따라 나가는 척하던 그는 중간에 멈춰서서 다시 뒤를 돌았다.

“아씨, 좀 놔 봐. 저 새끼가 뭐라고 하는지 끝까지 한 번 들어보자. 선배가 술 사 준다 하면 좋다고 따라와야지. 누가 너네한테 술 사 오랬냐? 사준다고 해도 지랄이야, 씨발.”

“안 사 줘도 되는데.”

“이게 시발 아직도-!”

“술 사 주면 선배 되는 모양이지?”

강세현은 갑자기 지갑에서 백 불짜리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설마, 하는 순간 그것을 상대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제 내가 선배네.”

“하, 이런 미친-!”

“형! 형 이러다 진짜 가드 와요. 일단 지금 술 취한 사람 형이잖아요.”

“그래요, 형이 참아요. 쟤 원래 저렇다니까 뭘 상대해요. 알고 있었잖아요.”

말리는 손길이 더 다급해졌다. 제이슨 형까지 가세해 힘 좋은 남자 세 명이 상대를 붙잡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주먹이 오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나는 이 와중에 강세현이 상대의 얼굴에 돈을 던지거나 바닥에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어, 정우야. 쟤 좀 데리고 잠깐 들어가, 빨리.”

“누구.”

“강세현 저 새끼 좀, 아씨.”

잠에서 덜 깬 채 인상을 쓰고 나오던 정우 형은 금세 상황파악을 하곤 강세현을 방으로 데려갔다. 강세현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형 손에 이끌려가는 동안에도 화가 난 상대의 살벌한 욕설이 거실을 울렸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멍하니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가 쿡, 옆구리를 찔렀다. 그새 옆으로 바짝 다가온 준성 형은 혼자만 웃고 있었다.

“아까 물었잖아.”

“네?”

“강세현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하는지.”

“아….”

“봐라. 쟤 원래는 저래. 제 맘에 드는 사람한테는 잘하는데 마음에 안 들면 윗사람이고 뭐고 신경 안 써.”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을 대할 때의 온도 차가 크다는 게 이런 거구나.

보통 사람에게는 찬물과 따뜻한 물 정도의 온도 차가 강세현에겐 꽁꽁 언 얼음과 팔팔 끓는 주전자 속 수증기 같았다.

“그래서 세현이 오면 방에 아무도 못 오게 하는데 하필이면 저 형이 술 먹고 찾아왔네. 예전에도 저래서 우리가 말리느라 힘들었거든.”

“예전에도 이런 일 있었어요?”

“세현이가 그렇다고 처음 만난 사람한테 대뜸 욕할 정도로 버릇없는 놈은 아니거든. 일단 우리가 괜찮다고 데려가면 처음엔 그럭저럭 어울리는 척은 해. 문제는 마음에 안 들고 나서지. 예전에 저 형 술버릇 모를 때 우리가 성격 좋다면서 데려간 적 있는데 그때도 거의 주먹 날리기 직전까지 갔었어.”

“아….”

“우리가 뭣도 모르고 세현이 집에 데려갔다가 거기서 술 취해서 진상 짓 하는 바람에 강세현이 제대로 빡 돌았지. 그때도 싫다는 애한테 선배가 주는 술 받으라고 난리였거든.”

그놈의 선배. 한번 그러고도 또 술 안 마시는 강세현에게 도전장을 내민 상대가 어떤 의미로는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강세현 저 독한 놈, 새벽 3시에 택시 불러서 기어이 쫓아냈어. 코앞인데도 택시비 백 불은 나왔을 거다.”

기본요금이 비싼 데다 새벽에 따로 불렀으니 당연히 그 정도 나왔겠지. 그래봤자 강세현에게는 겨우 푼돈이었을 테니까 아무 상관없었겠지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정우 형의 방에서 다시 나온 강세현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낮게 혀를 찼다.

“핫도그값 내고 가라고 할걸. 젠장.”

술값이라며 몇백 불을 건넬 때는 언제고 고작 2불 50센트를 못 받았다고? 그저 웃음이 났다.

그래, 나도 이제는 알겠다.

다섯 번째, 강세현은 성격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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