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따뜻하고 넓다. 조용하고 아늑하다.
자리를 비울 때 눈치를 볼 필요도, 도난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언제든 원할 때마다 포트에 있는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배가 고프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유명 베이커리의 샌드위치와 치즈케이크를 꺼내먹어도 된다.
도넛 가게보다는 나은 곳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나은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보았던 강세현의 집은 놀기에 최적이었지 절대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사실 오기 전에는 조금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다시 찾은 강세현의 집은 그야말로 공부하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강세현은 도착하자마자 나를 방 하나로 안내했다. 그때는 보지 못한 공간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조명의 조도도 훨씬 높았고 노란불 대신 하얀 형광등 불빛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여긴 뭐야?”
“서재.”
아닌데.
그냥 단순히 서재라고 하기에는 중앙에 있는 테이블이 지나치게 넓었다. 책상이라기보단 족히 6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는 회의 테이블이었다.
상대는 의심스러운 내 표정을 읽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공부방이라고 치자.”
그래, 그게 차라리 말이 된다.
넓은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새 사라진 강세현은 조금 후 커피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고 왔다.
참 친절도 하지. 서비스까지 만점인 공부방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공부방 주인이 더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했다.
“하다가 졸리면 옆방에서 자.”
그 어떤 프러포즈도 이보다 더 달콤하진 않을 거다. 너랑 나랑 몇 번 봤다고,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싫다는 소리 안 하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지난번 처음 강세현의 집에 왔을 때는 형들이 술에 취해 먼저 잠들고 난 뒤 곧바로 집으로 갔었다. 어차피 남는 침구가 있으니 자고 가라는 제안을 받긴 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 집에 덜컥 신세를 질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고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까진 아니어도 아직 신세를 질 만큼 친하지 않은 사람 집에서 자는 것도 어떻게 보면 매우 염치없는 일이었다.
오늘따라 뻔뻔한 짓 여러 번 한다, 권성하.
“나중에 갚을게.”
“뭘.”
“오늘 신세 진 거.”
“어떻게 갚을 건데.”
의아스레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퍽 진지했다.
“글쎄. 밥이라도 사든가 할게.”
대신 비싼 건 못 사 준다고 못을 박자 상대가 웃었다.
“됐어.”
“안 돼. 갚아야 맘이 편해.”
“그렇게 신세 진다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자고 가는 것 때문에 그런 거면 형들은 맨날 신세 졌게?”
“커피랑 크루아상도 사다 주고, 공부방에다가 잘 방까지 내줬는데 이 정도면 하룻밤에 너무 많은 신세를 진 거야. 도움받고 폐까지 끼친 거지.”
“그럼 나중에 핫도그 사.”
“…그건 좀.”
“왜.”
아무리 싸구려 커피였다지만 빵값과 합치면 당연히 그 금액을 넘어섰다.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 원두값만 해도 몇 배는 될 것 같은데 만약 강세현이 핫도그를 열 개 먹어도 다 갚아낼 수 없었다.
“그럼 술 사.”
의외의 대답이었다.
“술 안 마시잖아.”
너도 그렇지만 나도. 게다가 나이가 되지 않으니 술을 사는 것도, 술집에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시게 되면 그때 사.”
“그때가 언젠데. 아직 2년 남은 거 아냐?”
“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속으로 웃고 나니 그 말이 2년 후에도 인연을 이어간다는 전제하에 한 말이라는 걸 깨닫고 갑자기 잊고 있던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남들한테 까칠한 강세현이 왜 나한테 잘해 주는 걸까.
이유가 뭔데.
이런 내 속을 까맣게 모르는 강세현은 잘난 미소를 한 번 더 보여주고 책을 펼쳤다. 나도 그를 따라 집중하는 척했지만 몇 분이 지나도록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아무래도 난 나를 한참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두세 시간은커녕 한 시간이 조금 넘어가자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졌다.
담배도 피워봤고, 커피도 마셔봤고, 세수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이제 겨우 3시를 넘었는데 백기를 들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아, 미치겠다.”
“그냥 가서 자.”
너무 멀쩡해 보이는 강세현을 보자 왠지 모를 패배감이 느껴졌다. 나는 미칠 것 같은데 너는 왜 괜찮은 거니. 이유도 없는 억울함이 밀려왔다.
“너 내일, 아니, 오늘은 일도 가는 거 아냐?”
“맞아.”
어디 오늘뿐일까. 금요일도, 토요일도 가야 한다고 대답하자 강세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공부는 언제 하고 언제 자게.”
“그러게. 내일부터는 일하면서 밤새는 건 무리라서 토요일까지는 못할 것 같아. 그때 지나고 일요일에는 오전에 좀 자고 오후부터 시작해서 늦게까지 해야지 뭐.”
“얼른 가서 자라.”
나는 무언가 더 말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까지 딸린 깔끔한 게스트룸을 보고 감탄할 새도 없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야말로 눈을 감았을 뿐인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채였다. 잠결에 언제 벗었는지 모르는 모자와 후드티가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짧은 수면으로 잠이 깨지 않아 알람을 끄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묵직한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더 늦기 전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 옷을 입고 거실로 나갔지만, 집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영화를 봤던 방 바로 옆에 침실로 보이는 곳이 있었으나 꽉 닫혀있는 문을 보고 도로 발걸음을 돌렸다. 인사를 못 하고 나가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언제 잠든 지 모르는 사람을 억지로 깨울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가자 아직 10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 * *
“성하야, 오늘 테이블 예약 열두 팀 있다.”
“열두 팀이요?”
“그래. 좀 많지?”
좀 많은 게 아니라 너무 많은데.
보통 예약이 많아봤자 열 팀 정도인데, 아무리 토요일이라지만 열두 팀이나 되는 건 처음 봤다. 서둘러 예약 명단을 확인하자 심지어 2인 예약은 고작 여섯 팀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3인 이상이었다. 방문 손님 없이도 시간대마다 테이블이 거의 풀인 셈이었다.
“사장님 예약이 원래 좀 많긴 한데 오늘은 특별히 심하네. 날이 갑자기 쌀쌀해져서 그런가 봐.”
“추울 때 손님이 더 많아요?”
“눈이 많이 오지만 않으면 대체로 그렇지. 철판요리 쪽은 여름보다 겨울에 손님이 더 많아.”
원래 수습 기간보다 빨리 적응해서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한 달이 지난 후부터 토요일은 무조건 내가 사장님 테이블을 맡게 됐다. 기존에 사장님 테이블을 자주 담당했던 진호 형은 사장님이 직접 지명하신 담당자가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표가 날 만큼 서운해했다.
지금처럼 예약 많은 걸 알면 절대 안 서운할 텐데.
요즘은 진호 형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눈치가 보여 지난번에 슬쩍 매니저님께 다시 바꿔 달라고 말씀드려봤지만, 내 의견은 그 자리에서 무시당했다.
‘사장님이 네가 빠릿빠릿해서 좋대.’
사장님 말이 곧 법이니 그 말을 듣고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어제 말했던 거, 다음 주 목요일에 빼 줄게. 시험 잘 쳐라.”
“아, 감사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쁜 소식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금요일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하루 전날 일하는 건 정말 부담스러웠는데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그런데 매니저님이 가시자 뒤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목요일에 바쁜데.”
잔뜩 인상을 쓴 진호 형이었다.
“죄송합니다.”
형이 딱히 나를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인사도 잘 해 주고 먼저 말을 걸어올 때도 많지만 토요일만 되면 조금 심통을 부릴 뿐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사과할 것까진 없고…. 뭐… 시험도 중요하니까….”
내가 진지한 얼굴로 사과하자 예상대로 형은 머쓱하게 돌아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직원 누나가 고생 많다며 내 등을 토닥였다.
“기분 나빠도 네가 이해해. 여기서 제일 오래됐는데 갑자기 들어온 네가 사장님 테이블 맡으니까 나름 자존심 상해서 저래.”
“아니에요. 기분 안 나빠요.”
“그럼 다행이고. 진호 쟤도 네가 결정한 게 아닌 거 아니까 널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으니 왔다 갔다 하는 걸 거야.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져. 단순한 애니까 네가 좀 살갑게 해 줘라.”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안 그래도 피곤한 체력과는 별개로 또 다른 피로가 쌓였다. 하지만 유난히 더 바쁜 날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고 힘들 새도 없이 마감이 다가왔다.
“성하야.”
“네.”
“오늘 거.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모든 걸 다 끝내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손도 까닥하기 힘들었다. 들어가자마자 아무것도 없는 거실 카펫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잘 버텼다, 권성하.
깜빡 잊고 지갑에 넣지 못한 지폐가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렸다.
160불. 지금껏 받은 하루 팁 중에 가장 많은 금액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기쁘지 않았다. 지금은 돈보다는 꿀 같은 휴식이 필요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제일 많은 건 아니구나. 강세현이 왔던 날이 제일 많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닥에 던져 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드르륵-.
밤늦게 연락할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느릿하게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강세현: [내일 와]
다짜고짜 오라니. 어딜.
겨우 답장을 보내자 10초 만에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세현: [공부방]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픈데, 이 와중에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