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6화 (16/96)

#16

4. 흥미

강세현

귀찮은 인간관계는 싫다.

억지로 누군가의 비위를 맞춘다거나 눈치를 보는 건 질색이었다.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고 하찮은 것에 관심을 두는 건 그야말로 감정낭비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걸 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엮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기업.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걸 맡기면 좋을지 고민할 만큼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큰 기업.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내게 어릴 적부터 허락된 인간관계는 오직 두 분류로 나뉘었다.

1. 집안으로 엮인 사람들

2. 집안 사업으로 엮인 사람들

거기에 내가 만든 관계는 없었다. 학원도, 학교도, 어딜 가나 우리 집안과 어떻게든 엮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쉬웠다. 상대에게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것만으로 호감을 얻을 수 있었고, 적당히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인연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유일하게 허락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는 있었다.

“오, 강세현이-”

“역시 일찍 왔네. 주문했어?”

“아직.”

밖이 더운지 모두 손부채질을 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기현 형은 거의 녹아내리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냥 먼저 시키지.”

“먹고 싶은 사람이 시켜야지.”

“이 새끼 아무거나 먹을걸. 그냥 맨날 먹던 거 시키자.”

“어, 어. 그래. 아무거나 괜찮.”

메뉴판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기현 형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직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아가고, 그러는 동안 열기가 좀 가셨는지 제정신으로 돌아와 신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 학교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현이 너는 어때? 친구는 좀 사귀었냐?”

자주 어울리는 우리 중 나만 다른 대학을 다녔다. 형들은 내가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닐까 봐 걱정했지만, 내게는 대학이라 해 봤자 학위를 딸 목적 외에는 다닐 이유가 없었기에 딱히 친구를 사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형들도 이런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답을 뻔히 알면서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상대가 알아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수업은 할 만하냐?”

“어. 교수도 괜찮고 수업도 들을 만해.”

“좋겠다, 존나 부러워. 이 중에 수강 신청 실패한 사람은 나밖에 없지.”

기현 형은 혼자만 이번 학기에 원하는 수업 중 반 이상을 실패했다.

“큭큭, 등신.”

“뭐 이 새끼야. 너도 작년에 망했잖아. 내가 너보단 나아.”

“아니거든?”

“시끄러워. 둘 다 거기서 거기면서.”

작은 일에도 핏대를 세우며 투덕거리는 사람들. 놀랍게도 나와는 정반대인 이 형들이, 내가 스스로 만들고 유지하는 유일한 관계였다.

서기현, 박준성, 장기재, 임정우.

만남은 단순했다. 유학 온 지 얼마 안 돼서 혼자 다니던 내게 형들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게 계기였다.

‘진짜 잘생긴 애가 왔다더니 너구나.’

한 번이라도 귀찮았다면 단번에 잘라냈을 텐데 신기하게도 이 중 누구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형이랍시고 무언가를 억지로 시키는 일도 없었고, 함께 있어도 자신들이 하는 일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들과 함께면 그저 나 자신 그대로 있을 수 있어 편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지금은 내게 유일한 관계로 남았다.

“나 그 망했다던 수업 있잖아.”

음식이 나왔는데도 이야기의 주제는 계속해서 대학에 관한 것이었다. 종일 시카고 피자가 먹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던 기현 형은 가장 큰 조각을 차지해놓고도 말을 하느라 먹질 못하고 있었다.

“무슨 수업, 너 망한 게 한두 개냐?”

“아씨, 그 기본 수업 있잖아. 절대 걸리면 안 된다던 교수 수업.”

“아- 그, 소문난 교수?”

“어, 어.”

“그거 왜?”

“거기서 한국 애 한 명 알게 됐는데, 꽤 성격 좋아.”

또 시작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여기저기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들려왔다.

“하여간 서기현 맨날 다 좋대.”

“학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몇 번 만났다고 좋다냐.”

“같이 담배만 피워 주면 다 좋지, 너는.”

기현 형은 이들 중에서도 가장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볍게 누군가를 만나고 쉽게 정을 주는 탓에 누굴 알게만 되어도 우리에게 소개하려 했다.

물론 우리 중에서 나는 맨 마지막이었다. 내가 자신과 정반대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기현 형은 언제나 다른 형들에게 먼저 소개하고 괜찮다는 걸 검증받고 나면 내게도 소개하곤 했는데, 지금껏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은 딱 한 명, 제이슨 형뿐이었다.

정우 형은 매번 서기현이 좀 모자라 보여도 사람은 잘 보는 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걸 잘 모르겠다.

“아니야. 진짜 애 괜찮아. 예의도 바르고 좀 어른스럽고.”

“올, 어른스러워? 네 눈엔 다 어른스럽겠지, 이 애새끼야.”

“아오, 시발 진짜라니까. 막…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닌데 뭐랄까 말하는 게 되게…”

“되게 뭐.”

“어… 되게… 바르다? 성격도 바르고 얼굴도 바르고, 다 바르다?”

“그게 뭐냐, 큭큭.”

모두가 웃었다. 나 또한 속으로 웃었다. 기현 형은 그걸 또 억울해했다.

“어쨌든 기숙사에 한번 오라고 했어. 뉴욕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다더라고.”

“아, 그럼 이번에 들어온 거야? 편입?”

“아니, 1학년.”

“오.”

“그러면 세현이랑 동갑이네.”

동갑이든 아니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조금도 관심 없었으니까. 어차피 누굴 데려오든 또 한 번의 만남으로 끝이겠지, 숨어있는 내 성질을 건드려 엉망이 되는 일만 없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모르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박준성: [나오늘 성하봄]

장기재: [난 어제]

장기재: [한번 안오냐고했더니 불러달라던데]

장기재: [서기현 뭐하냐]

서기현: [오라고했는데 목요일날시간안된대]

서기현: [걔 집멀어서 부르기ㅈㄴ미안하뮤ㅠ]

임정우: [다른 날 불러 주말에]

특별히 중요한 화제에 거론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같이 있는 시간 동안 서너 번은 꼭 이름이 들려왔다. 고작 몇 주 사이에 다른 형들까지 전부 친해져 거의 매일 점심도 함께 먹는 듯했다.

0이었던 관심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형들이 모두 동의해 만났던 사람들은 많았고, 그 관심은 만나는 순간 사라졌다.

누군가에 대한 기대는 결국 실망으로만 바뀐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 *

“야, 세현아.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에 모이는 거.”

거의 2주에 한 번씩은 주말에 우리 집에서 모였다. 간혹 밖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내가 사는 곳으로 가는 게 일상이었다.

이번 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방금까지 게임을 하던 기현 형이 대뜸 말을 꺼냈다.

“누구 한 명 더 부르면 안 되냐?”

아무래도 모이는 곳이 우리 집이다 보니 누굴 데려올 때마다 내 동의를 구했는데, 지난번 사건이 있고 난 뒤로는 한동안 묻지 않았었다. 형들이 데려온 어떤 미친놈 하나가 술에 취해 난리를 피웠던 그 일은 형들도 상당히 곤란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후로 가장 눈치를 보던 기현 형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묻는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도대체 누굴 데려오려고.

“누구?”

“성하.”

또다. 그 이름.

“오, 성하는 괜찮을 거야. 세현아.”

“어, 걔는 절대 사고 칠 애는 아니야.”

“진짜 괜찮은 애니까 우리 한번 믿어봐라.”

아직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성하라는 두 글자가 나오자마자 옆에 있던 다른 형들까지 합세해 나를 설득했다.

“근데 성하 이번 주에 된대?”

“몰라. 물어봐야 돼.”

심지어 본인이 아직 온다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묘하게 들떠 보였다.

대체 왜.

지금까지 형들이 이렇게까지 호감을 보인 상대는 없었다. 제이슨 형을 처음 소개해줄 때도 영어밖에 못하지만 진짜 재밌는 애가 있다고 말하긴 했어도 꼭 만나봐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나만큼은 아니지만, 은근히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정우 형까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서기현이 이번엔 제대로 봤어. 너 동갑 친구 없잖아. 친구 하면 좋겠더라.”

친구라니.

너무 생소한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친구는 무슨.

* * *

“세현아, 인사해. 얘가 우리가 말한 성하. 권성하. 너랑 동갑인 거 알지?”

드디어 나만 모르는 친구를 소개받는 날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던 상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란 표정을 감추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기현 형이 말했던 대로 ‘바른 얼굴’이 있다면 이런 얼굴이겠지.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래서 기억하고 있었다. 몇 달 전 아주 잠깐 본 사람이지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놀랍게도 권성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만나면 사라질 거라고 예상했던 관심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처음으로 상대에게 흥미가 생겼다.

이렇게 바른 얼굴을 한 너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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