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8화 (18/96)

#18

드르륵-. 드르륵-.

이어폰을 끼고 공부하던 중 핸드폰이 연속으로 진동했다.

“전화 오는 것 같은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전화가 아니라 문자였다. 뒤늦게 액정을 확인하자 많은 메시지가 한꺼번에 와 있었다.

[어디야?]

[집이라면서 왜 전화가 안돼?]

[다음주에 가는거 왜 안되는지 설명해]

[그다음주에는 누나온다며]

[그럼 언제 볼수있는데]

[둘째주 돼야 해?]

“하아….”

시험이 그다음 주에 끝난다니까.

이번 달은 유난히 바쁜 달이었다. 일단 시험 일정이 끼어있어 주말에도 시간을 비우기 힘들었고, 시험이 끝나는 주말에는 첫째 누나가 콘퍼런스 때문에 시카고에 방문하기로 약속되어있었다. 이미 충분히 설명했는데 더 어떤 설명을 해 달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친구는 사랑스러웠다. 나와는 달리 밝고 잘 웃는 편이라서 같이 있으면 꽤 즐거웠다. 하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극도로 불안해하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대학에 온 후에는 더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달래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 정도가 나날이 심해지다 보니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거의 격주로 뉴욕과 시카고를 왔다 갔다 했고, 간혹 내가 주말에 다른 약속을 잡기라도 하면 그날은 온종일 전화와 문자로 원망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또 여자친구냐’ ‘이번엔 무슨 일이냐’ 이런 질문을 쏟아내던 형들도 이제는 너무 잦은 다툼으로 신경 쓰지 않았다.

피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 하지 않는 감정 낭비를 매번 감당하는 이유는 그래도 그녀가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당연하게 옆에 있었고, 내 메마른 감정을 알고도 옆에 있고자 한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전화 아냐? 안 받아도 돼?”

“나중에.”

아무래도 시작하면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조금 있다가 전화하겠다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난 뒤 메시지를 다시 읽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너 일하는 식당, 주말에도 열 한시까지야?”

“주중, 주말 오픈 타임이랑 클로징 타임은 똑같아. 중간에 3시부터 5시까지 브레이크타임 있고.”

“쉬는 날은?”

“없어. 크리스마스랑 1월 1일도 열어.”

워낙 잘되는 식당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언제 오게?”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상대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맛있는 걸 먹자는 큰누나를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시험 끝나고.”

“아, 다음… 아니, 다다음 주구나. 토요일에 오게?”

“어.”

권성하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보다는 점심때 사람이 적으려나?”

“아무래도 그렇긴 한데 런치는 나가는 기본 메뉴가 좀 달라서 간단히 먹을 게 아니면 저녁이 더 나을 거야. 분위기도 훨씬 좋으니까.”

“흠…. 알겠어.”

“점심때 오려고?”

“몰라. 시간은 상의해 봐야 해. 어쨌거나 그때처럼 늦게 가는 민폐는 안 부릴 테니까 걱정 마.”

“늦게 와도 돼.”

“내가 안 돼.”

그렇게 말하자 얇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좀.”

“좀, 뭐.”

“의외라고.”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분명 나를 향한 것이었다.

* * *

“강세현.”

고작 이름 하나를 부르는데도 느껴지는 곧고 단단한 목소리. 강단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13시간이 넘는 비행에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목이 넓게 파인 하얀색 상의 위에 까만 투 버튼 블레이저와 부츠컷, 트라우저 세트를 완벽하게 빼입은 그녀는 높은 구두를 신고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시원시원하게 걸어왔다.

“그러고 왔어?”

“응. 왜?”

주름 하나 없는 훌륭한 정장 차림이었다. 공항에서는 모든 게 완벽한 것처럼 보였지만, 문제는 11월에 들어선 시카고 날씨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추울 텐데.”

“얇은 코트 캐리어에 넣어놨어. 짐이 별로 없어서 그냥 같이 넣어서 부쳤지. 호텔가서 꺼내지 뭐.”

“그러면 여기 있어. 차 앞으로 가져올 테니까.”

결국, 주차장에 있는 차를 꺼내 입국장 앞에서 누나를 태웠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뒤늦게 운전대를 잡자 핸들을 돌리기도 전에 조수석에서 뾰족한 말이 날아왔다.

“차가 별로다. 좀 더 괜찮은 거로 하지.”

“지금도 충분해. 이것보다 얼마나 더 좋아야 하는데.”

“너무 흔하잖아. 바꿔 줄까?”

“됐어.”

“아니면 하나 더 사.”

절대 흔하지 않은 차를 흔하다고 말하는 누나는 내가 겨우 화제를 돌릴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콘퍼런스는 내일이야?”

“응. 오전에.”

“내일 오후에 돌아간다며.”

“바로 가야지. 월요일 오전에 또 중요한 행사 있어.”

“바쁘네.”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졸업까지 얼마나 남았지?”

“올해 입학했는데 뭘 얼마나 남아.”

“3년 남았네, 그럼.”

4년이 아닌 이유는 누나와 형들 모두 4년제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1학년 때부터 쭉 4.0을 유지한 것도 대단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가업을 도우려고 그런 식으로 대학 생활을 날려버리는 건 어지간히 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친구는 좀 사귀었니?”

“아니. 그런 거 없는 거 알잖아.”

“그런데 왜 방학 때도 자꾸 안 들어오려고 해? 엄마가 서운해해.”

“결국 들어가잖아.”

“너무 짧게 있다 가니까 그렇지. 내가 너 일부러 졸업 늦추려는 거 모르는 거 아니야. 모르는 척해 주는 거지.”

역시 만만찮은 상대 앞에서는 아닌 척해도 소용없었다.

“이상한 사람들 만나서 사고 칠까 봐 걱정은 안 해. 워낙 알아서 잘하니까. 근데 엄마가 얼마나 기다리는지 알지? 너무 미루지 마라. 아직도 아빠가 그때 너 유학 허락한 거 원망해.”

화제를 잘못 선택한 듯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얼른 졸업하고 자리 잡아서 이 누나도 좀 도와줘. 미국 지사는 완전히 네가 맡아주면 좋잖아. 지유랑 준우 때문에 이제 이렇게 출장 오는 것도 힘들다.”

큰누나와 나의 나이 차이는 무려 16살이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정략 결혼하신 부모님은 큰누나, 큰형, 작은형, 작은누나를 차례로 가졌고 계획에도 없던 내가 생긴 건 어머니가 마흔을 넘겼을 때였다.

그때 바로 위 작은 누나는 열 살이었다. 그래서 누나와 형이 일찍 결혼한 것도 아닌데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내게는 조카가 많았다.

“그래도 너는 막내라고 많이 봐주고 있는 거야. 알지?”

알고 있다.

유독 엄한 집안에서 그나마 유학이라는 핑계로 최소한의 자유가 허락된 건 나뿐이었다. 유학을 오지 않았다면, 나 또한 누나나 형들처럼 24시간 숨 막히는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밥 먹는 법, 말하는 법, 심지어 걷는 법까지 지적받고 교육받아야 했으니까.

성질 더러운 내가 참는 법을 배우고 그나마 예의 바른 척 행동할 수 있는 건 그 덕일 수도 있다.

‘뭐라고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인사를 쉽게 하는 성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권성하의 그 말이 맞았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습관처럼 나오는 거지 실제로 상대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진 않았다. 어느 순간 어떤 것이 내 진심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에 반해 권성하는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말이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그가 궁금한 건, 어쩌면 내겐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다운타운으로 가는 출구로 빠지자 차가 거의 멈춰 섰다. 호텔로 향하는 복잡한 구간을 지나는 데만 꼬박 30분을 소요했다.

누나는 그때까지도 회사라든가 집안 이야기를 했다. 특히, 내후년쯤 시작할 자동차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며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들어오라고 다시 당부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호텔까지는 기사를 부르겠다고 할 때 그러라고 할걸.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누나, 점심은 어쩔 거야? 내리기 전에 기내식 먹었을 거 아냐.”

“음…. 그래서 별로 배는 안 고파. 잠깐 쉬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 저녁에 다시 데리러 올게. 그때까지 좀 쉬고 있어.”

“다시 이쪽으로 오려면 번거롭지 않아? 그냥 내가 너 있는 데로 갈게. 호텔에서 바로 택시 부르면 돼.”

“어차피 여기서 얼마 안 걸려. 걸어도 갈 수 있는 거리야.”

호텔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는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아무리 막혀도 5분 이내에 충분히 도착할 만큼 가까웠다.

“진짜 가깝구나.”

“어. 그래서 굳이 호텔 안 잡아도 된다고 했잖아.”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우리 집에 머물러도 괜찮다고 했으나 누나는 기어코 호텔을 잡았다.

“편하게 있는 네 공간인데 내가 거기 가서 방해하면 되겠어? 호텔에 있는 게 너나 나나 서로 편해. 고작 하루라도 괜히 신세 지는 것 같아서 싫어.”

왜 이렇게 신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뜬금없이 생각나는 얼굴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알겠어. 그럼 내리자.”

뉴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호텔에 도착해 층고가 높은 로비에서 체크인을 했다. 괜찮다는 누나의 말에도 꿋꿋이 높은 층에 있는 스위트룸까지 직접 캐리어를 들어다 주었다.

창이 넓은 방에서는 밀레니엄 공원과 네이비 피어가 한눈에 보였다. 한쪽은 푸른 잔디밭이, 다른 한쪽은 깊은 호수가 보이는 꽤 괜찮은 호텔이었다.

“7시에 예약해뒀으니까 6시까지 올게.”

“한 시간이나 일찍?”

“가는 데 좀 걸리는 곳이라서.”

“알겠어.”

“쉬어.”

문을 닫아주고 가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세현아.”

다시 뒤를 돌자 누나는 평소와 다르게 망설이더니 몇 초 후에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절대 싫어서 우리 집에 가지 않는 건 아니라고. 가족인데 내가 불편하다는 뜻도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조금 전 내게 했던 말이 계속 맘에 걸렸던 모양이다.

남들 앞에서는 강하기만 한 강수현 본부장님은 나와 조카들에게만 유독 약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늘어놔도 내가 절대 큰누나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였다.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주머니 속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조금 후면 보게 될 사람이 보낸 메시지였다.

권성하: [7시 예약 확인했어. 그 시간엔 사람 많을 텐데 괜찮아?]

나: [상관없어]

사장님을 통해 따로 한 예약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첫 예약 때 워낙 까다롭게 굴어서 그런지 괜찮다고 말해도 그 시간이 제일 사람이 많은 시간이라는 걱정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권성하: [대신 최대한 테이블 비워놓을게]

나: [그게 가능해?]

권성하: [당일 방문 손님 최대한 다른 테이블로 빼놓으면 돼]

나: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곧바로 오던 답장은 몇 분이 지나서야 왔다. 망설인 흔적이 보이는 메시지였다.

권성하: [안 되지만 아마 괜찮을 거야]

이게 무슨 말이야.

띵-.

그사이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정면에 비치는 거울 속 내가 웃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다지 기쁜 일도 없는데 왜 웃음이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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