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19화 (19/96)

#19

5. 사이

권성하

시험은 잘 끝났다.

전 주에는 이틀 연속으로 강세현의 집에서 공부하다가 잠이 들었고, 시간을 아낀 덕분에 월요일과 화요일 시험은 문제없이 치를 수 있었다. 화요일 시험이 끝난 후 일 때문에 미뤄둔 잠은 수요일에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행히 목요일에는 미리 일을 빼두었으므로 집에서 밤새워 금요일 시험을 준비했다. 수요일에 밀린 잠을 잔 덕분에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집중이 잘 안 됐다. 그새 너무 좋은 환경에 익숙해진 탓일까, 오랜만에 앉은 딱딱한 책상 의자와 스탠드 조명이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시험은 잘 끝났다. 금요일에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주말에는 오후에 일하러 가기 전까지 계속 잠을 잤다.

정신없는 2주가 지나가고 이번 주에 받은 시험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금요일 시험 성적이 아주 조금 아쉽긴 했지만, 부족한 점수는 과제로도 충분히 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난 뒤, 한동안 조용하던 단체 채팅방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끄러운 점심시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캠퍼스에서 형들을 다시 보는 대신 강세현을 볼 일은 없었다. 화요일에 마지막 시험이 있다던 강세현은 이번 주에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고, 혹시나 방해가 될까 봐 나 또한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서로 따로 볼일이 없으면 연락하지 않는 게 당연한 건데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허전함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예약자 명단에 올라와 있는 익숙한 이름을 확인하고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될 메시지를 보낸 거지만, 보내고 나자 불편했던 마음이 괜찮아졌다.

나: [7시 예약 확인했어. 그 시간엔 사람 많을 텐데 괜찮아?]

강세현: [상관없어]

나: [대신 최대한 테이블 비워놓을게]

강세현: [그게 가능해?]

나: [당일 방문 손님 최대한 다른 테이블로 빼놓으면 돼]

다행히 4번 테이블에 잡힌 예약이 하나밖에 없어서 예약 없이 오는 손님은 무조건 4번 테이블로 뺄 생각이었다. 물론 그쪽 셰프님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세현: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안 되는 건 맞지. 그래도 설마 사장님이 직접 받은 손님인데 뭐라 그러겠어.

원래는 안 되지만 괜찮을 거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조금 후, 답장이 도착했다.

강세현: [잘려도 내 탓 아니다]

* * *

“성하야. 오늘 7시에 워크인1) 받지 마.”

안 되는 일을 해서 잘리게 될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뭐라고 하긴커녕 사장님께서는 오후 예약을 확인하시자마자 본인 테이블에 다른 손님을 받지 말아 달라고 말씀하셨다. 설마 직접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

“이미 들어온 예약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그냥 둬야지 뭐. 한 팀밖에 없잖아, 맞지?”

“네.”

“아, 미리 알았으면 안 받았을 텐데. 몇 명짜리야?”

“두 명이요.”

“그나마 다행이네.”

사장님께서 미리 리셉션 쪽에 말해서 7시 예약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번 주에 받은 예약은 강세현의 예약 한 건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들어와 있던 예약은 취소할 수 없어 그대로 가져가기로 했다. 다행히 2인 예약 한 팀뿐이어서 7시에 3번 테이블은 총 4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 번 더 예약을 확인하신 사장님께서는 따로 매니저님을 부르셨다.

“경식아. 리셉션에도 일러둬. 내 테이블 이 시간에 워크인 없다고.”

“네. 알겠습니다.”

“이쪽 예약 손님 오면 좀 신경 쓰라고도 말해주고.”

“서빙은 성하가 해요?”

“성하 너 다른 테이블 몇 번이지? 2번인가?”

“4번이요.”

불쑥 내게 질문이 날아와 그렇게 답하자 사장님은 매니저님께 다른 지시를 내리셨다.

“그러면 딴 사람더러 7시에만 그쪽 좀 도우라고 해. 성하는 내 테이블 신경 써야 하니까.”

오는 손님들을 똑같이 대하라고 늘 강조하시던 사장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니 정말로 강세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사장님과 어떤 관계길래. 자꾸만 쓸데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성하 너도 4번은 딴 사람한테 맡기고 웬만하면 이쪽에 붙어있어.”

“네.”

“여- 그리고 다 잠깐 이리로 모여봐.”

사장님의 부름에 브레이크타임을 15분 남겨두고 모두가 모였다.

“오늘 7시에 내가 예약 손님 제외하고 못 받으니까 다른 손님은 안 바쁜 테이블 쪽으로 보낸다. 다들 그렇게 알아. 나머지는 매니저가 설명할 거니까 그 시간에 성하도 누가 좀 도와주고.”

내가 일부러 다른 테이블에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이 사장님께서 직접 셰프와 서빙 스태프에게 바빠도 이해를 부탁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머지 설명을 매니저님께 맡긴 후 서둘러 주방 쪽으로 가셨다. 오늘따라 유독 분주해 보이셨다.

“음…. 지영이 네가 오늘 1, 2번이지?”

“네. 참고로 저 예약 8개 있어요.”

“어우, 그럼 넌 안 되겠다. 성현이 너는?”

“저도 거의 풀이예요.”

4번 테이블과 가까운 테이블은 모조리 예약이 차 있어 손을 빌려줄 수 없었다. 그러자 차례로 테이블을 확인하던 매니저님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늘 누가 테이블 하나지? 샐러드바 누구야?”

철판 테이블이 총 9개이므로 4명은 각자 두 개씩 테이블을 담당하고 한 명은 테이블 하나만 담당하는 대신 샐러드바에 있는 재료를 충전하는 일을 동시에 맡았다.

샐러드바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중간에 두 번 정도만 주방에서 재료를 옮겨놓기만 하면 돼서 실제로는 거의 할 게 없었다. 그래서 누구나 탐내는 이 역할은 공평하게 돌아가며 한 번씩 맡았다.

“저요.”

아…. 큰일 났다.

하필 제일 아니길 바랐던 진호 형이 손을 들자 속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보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7시에 4번 테이블 같이 맡아줘. 한 시간 동안만이니까 해줄 수 있지?”

“네. 그럼요.”

“그래. 부탁한다.”

진호 형은 도착했을 때부터 상태가 별로였다. 원래 4시까지 와서 디너 영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30분 가까이 지각하고선 오자마자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어제 오후에 쉬는 날이었는 데다가 오늘 테이블 하나라고 마음 놓고 마신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숙취로 상태가 엉망인데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떠맡았으니 절대 그냥 좋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아, 씨발.”

역시나 형은 매니저님이 가시자마자 짜증을 내며 험한 말을 뱉었다. 방금까지 서로서로 도와야 한다며 웃던 얼굴은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거친 욕이 들려오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할 분위기도 아니어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평소에 화기애애하게 지내던 다른 직원들도 상황을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얼어붙은 분위기 안에서 눈치만 보다가 용기를 냈다.

“저, 형-”

어렵게 운을 띄웠으나 상대가 동시에 말을 하는 바람에 뒷말을 다 할 수가 없었다.

“재수 없는 새끼.”

대놓고 나를 향한 말이었다.

“…….”

“…….”

다시 한번 정적이 찾아왔다.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어색한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를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싫었지만, 저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계속 내게 불만을 품어왔던 상대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더 예민해져 있었고,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일까지 해야 하니 억울한 기분에 막말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내 생각이었고, 누군가는 지금 이 상황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을 수도 있었다.

“야. 김진호. 그만 좀 해. 너 때문에 지금 애들 눈치 보는 거 안 보여? 좋게 넘어가자 그냥.”

매번 중간에서 중재 역할을 하던 직원 누나가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진호 형보다 1년 늦게 들어온 누나는 진호 형과 동갑이라서 둘은 꽤 친한 사이였다.

“하. 지금 분위기 이렇게 만든 게 내 탓이야? 이런 좆같은 상황을 만든 게 누군데.”

“그만하라고 했지. 말 함부로 하지 마 너. 지금까지 성하가 너 도와준 게 얼만데, 딴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시발, 네가 뭔데 끼어들어서 난리야. 내가 너한테 지랄했어?”

이미 짜증이 날대로 난 진호 형은 누나에게까지 심한 말을 퍼부었다. 누나의 표정이 일순 살벌하게 변했다. 뭔가 엄청난 말이 나올 것 같았으나 억지로 삼키는 게 눈에 보였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연히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고, 계속 이렇게 모여있으면 더 심각해질 것 같아 몰래 누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마저 싸우게 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성하야- 잠깐만 나 좀 보자.”

매니저님이 리셉션 쪽에서 걸어 나오자 모두가 짠 것처럼 흩어졌다. 씩씩대던 진호 형과 누나도 곧바로 표정을 감추고 서로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일하기 직전에 누나가 나를 따로 불러 신경 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일하는 내내 계속 마음이 불편했고, 중간중간 형이 있는 곳을 자꾸만 쳐다보게 됐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미안함이었다. 오늘 일 때문에 친한 누나와의 사이까지 멀어지게 생겼으니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벌인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의 존재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

남들이 알면 바보라고 욕할지 몰라도 나는 나쁜 뜻으로 행동하지 않았어도 나로 인해 누군가 기분이 상했다면 그건 그냥 내가 잘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편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사장님, 예약 손님 오셨어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에 리셉션 담당 뒤로 익숙한 인영이 걸어들어왔다. 강세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분이 서 계셨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가족인 줄 알 수 있을 만큼 똑 닮아있었다.

1) 예약되지 않은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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