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20화 (20/96)

#20

와.

나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놓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이 정도면 길 가다가 봐도 알겠는데.

집안이 다 미남미녀구나.

“성하야.”

실례인 줄도 모르고 빤히 쳐다보다가 갑작스러운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사장님은 재빨리 주방 쪽을 가리키셨다.

“주방에 가면 내가 준비해놓으라던 거 있어. 그거 가져와.”

“네.”

“어서 오십시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대로시네요.”

“사장님도요.”

사장님의 환영 인사를 들으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서기 전 강세현과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눈인사를 할 여유도 없이 자리를 떠나야 했다.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이니 당연히 주방은 난리 통이었다. 사방이 전부 공개되어 있어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쇼는 철판 대에서 이뤄지지만, 뻥 뚫려있는 오픈 키친도 나름 가게의 인기 비결 중 하나였다.

“3번 가져갈 거 준비됐나요?”

음식이 다 되었다며 주방 카운터 위 콜벨을 누르시던 이모님은 안쪽에서 넓은 스테인리스 접시를 꺼내오셨다.

“시간 맞춰서 해 놨어. 자, 가져가.”

지난번과는 다르게 2인분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게에서 나가는 스테이크 고기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 쳐다보자 사장님이 따로 준비하신 거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셨다.

“아까 야채도 따로 골라두셨어. 대체 누구길래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하신대?”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단지 한국에서부터 단골이었다는 것만으로 보통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그냥 웃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 사이 여자분은 반듯하게 앉아 메뉴판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강세현은 바로 앞에 있는 메뉴판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성하야. 이쪽 주문부터.”

사장님께 음식을 건네드리고 곧바로 주문을 받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본 얼굴 역시 강세현과 너무 닮아있었다. 특히나 눈매와 입가가 완전 똑같아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음, 일단 술은 이걸로 부탁해요. 병 말고 글라스로.”

“와인 마시게?”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강세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사케 마시고 싶은데 내일 일정 때문에 독한 술은 피하려고.”

“조금만 마시면 되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와인이야.”

“그런가….”

“여기까지 왔는데 누나 좋아하는 거로 해. 어차피 내일 10시까지만 가면 된다며.”

역시 누나였구나.

이렇게 닮았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충 그럴 거라 예상했다. 내가 아는 강세현의 가족은 모두 한국에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잠깐 일이 있어 시카고에 온 듯했다.

외동일 것만 같은 강세현에게 누나라니. 정말 의외였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 이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꽤 괜찮은 고구마 사케가 있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시중에 잘 팔질 않아서 제가 어렵게 구했습니다.”

“고구마는 좀 더 독하지 않아요?”

“도수 자체는 크게 차이 안 나요. 오히려 다음 날 더 깨끗하고 숙취도 없을 겁니다.”

“어휴, 정말.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안 마실 수가 없는데요?”

결국, 강세현의 누나는 사장님께서 추천하시는 사케를 주문하고 그 사케와 어울리는 사시미 세트와 전채 요리 하나를 추가로 시켰다.

“아, 그리고…. 세현이 너 뭐 다른 거 안 시켜도 돼?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요리 말고.”

“흠….”

강세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못 했는데.

지금 와서 따로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이상해서 나도 그냥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대에게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응?

“그때 먹었던 거.”

나는 강세현이 맨 처음 방문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뭘 먹었더라. 튀김이랑… 우동이랑… 스시 시켰던 것 같은데. 주문한 종류는 어렴풋이 생각났으나 정확히 무얼 시켰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 그날 일반 연어와 훈제 연어, 그리고 참치 종류 몇 가지 섞어 시키셨습니다. 마키1) 종류 하나 서비스로 나갔고요.”

다행히 그날 직접 주문을 받으신 사장님께서는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며 강세현의 답을 기다렸는데, 완전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때 말고.”

그때가 아니라고?

내가 강세현을 가게에서 처음 본 건 그날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도 몇 번 이곳에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그날이 아니라면 다른 날 방문했을 때 먹은 음식을 말하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강세현은 누가 봐도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설마 강세현이 만나지도 않았던 과거에 먹은 음식을 내게 묻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른 걸 생각하다가 문득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아.”

나는 메뉴판 아래에 있는 일식 메뉴에서 몇 가지 롤을 가리켰다.

“이거 두 가지가 위에 있었던 거고, 아스파라거스 들어간 건 이거. 그때 셰프님이 만들어주신 건 메뉴에 없어서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아마 말씀드리면 해 주실 거야.”

“그래. 그럼 이렇게.”

“…전부다?”

“어.”

“일단 두 가지 정도 골라보고 모자라면 더 시키는 게 어때.”

“흠…. 그러면 셰프 추천 메뉴랑 다른 하나는 이걸로.”

그때 먹었던 롤이 전부 마음에 들었는지 강세현은 끝까지 망설이다가 두 가지를 선택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사장님과 누나분은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모른 척하고 받아적은 주문표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주류를 꺼내러 가다가 문득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차갑게 마실 건지 뜨겁게 마실 건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날이 쌀쌀해지면 간혹 사케를 데워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때문에 주문을 받았을 때 미리 물어봤었어야 했다. 갑자기 생각나 다시 테이블로 걸음을 돌렸는데, 시끌시끌한 소음 사이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친구?”

“아니.”

“그럼?”

“그냥 좀 아는 사이.”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무덤덤한 말투. 정말 별 것 아닌 것처럼 툭, 뱉은 말이었다.

조금 아는 사이.

강세현과 내가 알게 된 지는 고작 한 달, 아니, 아직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만난 횟수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고, 서로 취미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이니 조금 아는 사이가 맞았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 섰다.

조금, 아주 조금. 정말 정말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일식 셰프님께 주문을 전달하고 테이블로 돌아가니 도착하지 않았던 나머지 한 팀이 와 있었다.

순서대로 주문을 받고 주류를 서빙하느라 아주 잠깐 움직인 것 외에는 그다지 할 게 없었다. 철판요리는 바로 눈앞에서 완성되어 사장님께서 직접 접시에 담아 주었고, 나머지 요리는 일식 쪽 담당자가 알아서 음식을 가져다 주었으므로 내가 따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동안 자연스레 다른 테이블 쪽으로 눈이 갔다. 진호 형이 있는 4번 테이블에는 토요일마다 오시는 단골손님 두 명과 워크인으로 온 손님 세 명이 앉아 있었다. 그래도 딴 테이블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었다. 다른 곳은 8인용과 10인용 철판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괜한 걱정에 계속 그쪽을 쳐다보다가 진호 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지 않아도 뚱한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어디선가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진호 형은 주방을 왔다 갔다 할 때도 몇 번이나 마주쳤다. 그때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연하게도 이야기를 나눌 새가 없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 반응 하지 않자 그다음에는 지나갈 때마다 일부러 부딪히기도 했다.

미치겠네.

사장님 테이블을 맡은 후 형이 나를 조금 의식할 때 잘 풀었어야 했다. 그때 그냥 별일 아닌 것처럼 넘길 게 아니라 밥이라도 한 번 먹자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그저 조금 분해서 생긴 감정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텐데. 후회가 됐다.

[여기, 샐러드 좀 더 주실래요?]

손님의 요청으로 샐러드바에 들렀다가 또다시 진호 형을 만났다. ‘씨발.’ 형은 나를 보자마자 욕을 중얼거렸다.

홀 한쪽에 있어 손님이 지나가는 곳은 아니었으나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걱정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상대가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씨발, 누군 좋겠다. 일 참 쉽게 해서.”

나는 말을 아꼈다. 지금은 별로 이야기할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장님이 예뻐하니까 네가 진짜 일 잘하는 줄 알지? 꼴랑 두 팀 받고 팁 많이 챙긴다고 대단한 일 한 줄 아나 본데 착각도 정도껏 해라.”

착각한 적 없는데. 시들시들해진 부분을 골라내고 싱싱한 양상추와 방울토마토를 몇 개 집어 들었다. 얼른 가지고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너 지금 나 무시하냐?”

“아니요.”

“근데 왜 말을 안 해, 너 때문에 맡기 싫은 테이블까지 맡아서 개고생해 주니까 내가 존나 우스워?”

“그런 거 아니에요, 형.”

“다 네 편 들어주니까 진짜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끝나고 이야기해요. 진짜로요.”

상대의 언성이 높아지자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있기보다는 자리를 피하는 게 방법이라 생각해 드레싱을 챙겨 들고 뒤를 돌았는데 하필이면 가장 원치 않았던 상황이 벌어졌다.

“무슨 일이야?”

강세현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한 손에는 담뱃갑이 들려있었다.

“어… 담배 피우려면 저쪽인데.”

“그건 나도 아는데 무슨 일이냐고.”

이럴 땐 좀 모르는 척해 주면 안 되는 거냐.

딱 봐도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강세현은 끝까지 가라는 내 눈짓을 모른 척했다.

“꼴랑 두 팀 받는다는 거 우리 이야기야?”

“…….”

제발 그냥 가자.

나는 말 없이 강세현의 팔을 툭툭 쳤다. 지금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냥 조금 아는 사이에 이런 모습까지 보인 게 죽을 만큼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세현은 내가 가리킨 방향과 정확히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뒷모습을 보니 뭔가 주섬주섬 꺼내는 것 같더니 불쑥 진호 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받으세요.”

“……네?”

벙찐 얼굴로 지폐를 받아든 진호 형은 강세현과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이게 뭐냐는 형의 물음에 강세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일 쉽게 한다며.”

그게 무슨 말이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세현은 내 쪽으로 고개를 한 번 돌렸다가 다시 진호 형과 눈을 맞췄다.

“이러면 당신이 더 쉽게 하는 거잖아. 테이블 받지도 않고 팁만 받으면. 보니까 더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 같은데, 이러면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거 맞죠?”

한 가지를 또 추가했다.

여섯 번째. 강세현은 그냥 미친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모습들이 건방져 보일지 모르지만, 강세현이 이런 일을 벌일 때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가끔 좀 눈감아 줬으면 하는 상황에서 나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용기있다고 느낄 정도니까. 나는, 싫지 않았다.

진호 형의 얼굴이 붉어지고, 몇 초 후 형은 자리로 돌아갔다. 당연히 돈은 받지 않았다. 강세현은 내 황당한 표정을 보고도 모른 척,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진호 형은 일을 그만두었다. 조금은 내 탓도 있는 것 같아 나는 미안해했지만, 매니저님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잘 됐다고 말했다. 사장님이 너무 좋으셔서 여태껏 너무 많이 봐줬다며.

1) 김말이

@MINT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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