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22화 (22/96)

#22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내가 자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상대는 별 것 아닌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두 시간 전부터 단체 채팅방에 나를 놀리는 듯한 메시지를 보내 놓고 내가 무시하자 이제는 대놓고 따로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서기현: [이거봐]

서기현: [(사진)]

서기현: [대박이지]

서기현: [(이모티콘)(이모티콘)(이모티콘)]

자정이 넘은 시각. 형이 보낸 메시지 창에는 어디서 난지 모를 음식 사진이 커다랗게 떠 있었다. 새하얀 접시에 담긴 파스타는 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또 뭐야.

또 무슨 메시지를 보냈나 싶어 다시 액정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화면에 덩그러니 세 글자가 떠 있었다. 당연히 기현 형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었다.

[권성하]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잘 놀고 있어?”

- …….

“여보세요?”

- …….

“왜 말이 없어.”

- 와….

곧바로 들려올 줄 알았던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몇 번을 더 부르자 예상했던 목소리 대신 대뜸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형이야?”

- 그래. 나다. 이 치사한 놈아.

“왜.”

- 왜긴 뭘 왜야? 내 메시지는 다 무시하더니 성하 전화는 단번에 받고. 뭐냐, 너. 잘 놀고 있어? 목소리에서 아주 꿀 떨어진다. 아주 성하랑 사귀지 그러냐.

“진짜 무슨 일인데.”

- 무슨 일 없어. 그냥 공부는 잘하고 있나 확인하려고 연락한 건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뻔히 혼자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남의 핸드폰으로 전화할 정도의 열정이라면 진짜 나와 사귀고 싶은 사람은 기현 형일 것 같았다.

“나 빼놓고 논다고 좋아하더니. 잘 놀지 왜 그게 궁금해.”

- 또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않냐? 하여간 놀리기도 어렵다, 강세현.

형과 별 중요한 내용 없는 통화를 이어갔다. 서너 마디 주고받고 나니 형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옆에서 다른 형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세현이 뭐 한대?

- 공부하겠지. 얘네는 다음 주까지 시험이라잖아.

- 너는 시험이라고 밥도 안 먹고 똥도 안 싸고 종일 공부만 하냐? 다른 거 할 수도 있지.

이럴 거면 왜 전화한 거지.

수화기 너머로 투덕대는 소리가 전부 전해져왔다. 전화를 걸어 놓고 자기네들끼리 실랑이하는 걸 한창 듣고 있다가 담배를 들고 일어섰다. 실랑이가 끝난 후엔 거의 한 명씩 돌아가며 같은 질문을 하는 통에 똑같은 대답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는데 정작 핸드폰 주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야, 서기현. 세현이 공부하게 이제 끊어.

- 알았어. 그럼 열심히 해라. 나중에 문자 할게. 어… 어? 아! 잠시만 기다려 봐.

알겠다는 대답도 하기 전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곧이어 담담한 말투가 들려왔다.

- 난데.

권성하였다.

“어.”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나니 문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통화한 적이 있던가?

우리의 연락 수단은 늘 메시지였다. 전화를 걸어야 할 만큼 길고 중요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고, 약속을 정할 때도 모든 연락을 메시지로 주고받았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통해 전해져오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낯설었다.

- 거기 내 프린트물 하나 있지 않아? 제일 위에 IDS640이라고 적혀있는데.

“어. 두고 갔더라.”

- 아. 다행이다.

“중요한 거야? 어차피 시험 다 끝났잖아. 이 강의 다시 들을 일도 없고.”

- 누가 다음 학기에 듣는다고 좀 보여달래서. 필기한 거 달라고 하더라고.

많은 프린트물 중에 하나 빼먹는다고 누가 욕을 할 것도 아닌데. 하여간 알아주지도 않을 일 하면서 쓸데없이 성실하지.

몇 달 사이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권성하와 내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 망한 다큐멘터리를 주제로 대화가 가능할 만큼 좋아하는 필름이나 영화가 같았고, 그 밖에도 음악, 책, 심지어는 음식 취향까지 비슷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겉으론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성격 면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는데, 특히나 남에게 잘 휩쓸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일을 하는 점이 나와 비슷했다. 사람들이 많은 것보다는 조용한 걸 좋아했고, 놀랍게도 나만큼이나 지저분한 걸 참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함께 있어도 늘 편안했다.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따로 말을 걸 필요도, 미리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혼자 있을 때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다른 점은 있었다.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남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건 똑같은데 나는 노력하지 않고 권성하는 노력한다는 점.

“지난번 그 강의?”

- 아니. 그건 다른 강의. 근데 같은 사람이야.

얼마 전, 다른 사람을 통해 막 알게 된 사람에게 강의 노트를 부탁받았다는 말을 듣고도 어이가 없었는데.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부탁하면서 고작 몇 불짜리 카페테리아 런치 한 번 사줬다는 건 더 충격적이었다.

남이 주는 호의는 무조건 갚으려 하면서 정작 남이 신세지는 건 왜 호의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할까.

책상 한쪽에 가지런히 올려둔 프린트물을 휴지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 거기 잘 놔둬. 나중에 가면 찾아갈게.

“없는데.”

- ……어?

“없다고.”

- ……좀 전에 있다며.

“없어졌어.”

- ……그게 갑자기 왜 없어져?

“모르고 버렸나 보지.”

- 농담하지 말고. 안 버린 거 알아. 너 확인 안 하고는 절대 안 버리잖아.

거짓말이긴 했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한 말인데 졸지에 시답잖은 농담을 한 셈이 되었다.

“그 강의 듣는 사람 너밖에 없대?”

- 그렇진 않을걸. 그렇긴 해도 다 챙겨 줄 수 있음 좋지 뭐. 어려운 일 아니잖아.

권성하는 흔히들 말하는 호구는 절대 아니었다. 겉보기에도 절대 어리숙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남들에게 이용당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단지 모두가 말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남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도울 줄 아는. 본인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지만, 딱히 시간이나 금전적 손해를 보지 않는 부탁은 거절하지 않았다.

“대충 하지 뭘 그렇게까지 해.”

- 너는 꼭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아마 넌 더 할걸? 안 하면 안 했지, 대충은 못할 거다.

“그래서 난 안 하잖아.”

수화기 너머로 좀처럼 듣기 힘든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너는, 공부는 잘돼? 제일 어려운 강의라며. 오늘 미리 다 끝낸다더니 다 해가?

“아니. 이제 반 끝냈어.”

- 그러면 내일 돼야 다 끝나겠다.

“어.”

- 벌써 한 시인데 몇 시까지 하게? 화요일까지 여유 있으니까 집중 안 되면 그냥 내일 해.

“조금만 더 해 보고 그래야지. 졸리지는 않아서.”

이상하게 잠이 오는 것도 아닌데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집중하는 것만큼은 잘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해가 지고 나서부터 그럭저럭 잘 유지되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계속 누군가가 방해 메시지를 보내는 통에 더했다.

“형한테 방해 좀 그만하라 그래.”

- 노력은 해 보겠다만 소용없을 거라고 본다.

할 말만 하고 끊을 줄 알았던 권성하는 너무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예상보다 길어진 통화가 썩 나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주위가 조용해. 형들은?”

- 술 마셔.

“파스타랑?”

- 아니. 가게에서 안주 포장해 왔거든. 사시미랑 튀김 몇 가지. 파스타는 기현 형 때문에 한 거야. 배고프다고 하는데 회 못 먹는다고 그래서.

“네가 한 거야?”

- 어. 근데 그래놓고 튀김 먹어 보더니 그것만 먹고 있어. 해 달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우리 가게 튀김 맛있거든.

“알아.”

뽀얀 담배 연기와 함께 지나간 기억이 피어났다. 손가락 사이에 숨어 있는 담배가 짤막해져 있었다.

“술은 안 마셔도 같이 어울려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래야지. 이것만 다 피우고 들어갈 거야.

“지금은 어딘데.”

- 발코니.

어쩐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다 했더니 혼자 밖에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이야길 듣고 보니 말하는 중간중간 멈추는 호흡을 알 수 있었다.

“사람도 많은데 왜 혼자 피워.”

- 잠깐은 조용한 게 좋아. 어차피 - 발코니- 도 좁고. 그러니까 잠깐만 더 상대해 줘. 이상하게 - 여기서- 혼자 담배 피우면 좀 외롭더라고.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권성하의 아파트.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는 좁은 발코니에 혼자 서 있는 권성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고 한 개비를 새로 물었다. 잠깐 나온다고 그냥 후드티 하나만 더 걸친 채 밖으로 나왔는데 곧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한 개비만으로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 오늘 진짜 춥다.

“아직 이 정도면 괜찮은데.”

- 넌 계속 시카고에 있었으니까 괜찮은 거야.

“뉴욕도 춥잖아.”

- 흠……. 뉴욕 추위랑은 또 달라.

“똑같은데.”

- 아니야. 달라. 설명할 순 없지만…… 아무튼 달라.

본인보다 최근에 뉴욕에 다녀온 사람이 나라는 걸 잊은 건지 똑같다는 내 말에도 권성하는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했다.

추위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야.

- 이제 들어가야겠다.

“다 피웠어?”

- 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미안.

“됐어.”

- 이제 하던 거 해라. 적당히 쉬면서 하고.

“그래.”

권성하는 몇 마디 인사 후 전화를 끊었다. 상대가 먼저 끊을 때까지 습관처럼 붙잡고 있던 수화기 너머로 반복되는 통화 종료음이 들렸다.

“후우…….”

아직 반밖에 타지 않은 장초를 태웠다. 담배 연기인지 입김인지 모를 하얀 연기가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밀려온 냉기가 얼굴을 비비자 살갗이 아렸다. 잊고 있던 추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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