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성하
“통화 다 했냐? 얼른 와. 집주인이 어딜 갔나 했다.”
거짓말. 내가 없거나 말거나 찾지도 않았을 거면서.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공기를 만나서 그런지 경직했던 근육이 풀리며 몸이 움찔거렸다.
어느 때보다 천천히 담배를 피웠건만, 그동안 한 번도 발코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 기현 형은 내가 가져온 왕새우 튀김을 입에 넣고 있었다. 그사이 벌써 한 잔씩 비운 건지 테이블 위에는 이미 바닥을 보인 맥주병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어우. 잠깐 문 열었다고 찬 바람 장난 아니네.”
“추워요? 히터 더 세게 틀까요?”
“아니, 아니. 지금은 괜찮아. 밖에 많이 춥지? 오늘 새벽이 제일 춥다더라.”
“네. 공기가 진짜 차요.”
“그나마 여긴 바람 많이 안 불어서 나은 거야. 기숙사 있으면 담배 피우러 나가기도 무섭다. 앞으로 매일 최저 기온 갱신할 텐데 어쩌냐.”
나름 추위에 자신 있는 편이어서 뉴욕에 있을 때도 그럭저럭 잘 버텼었는데 처음 마주한 시카고의 겨울은 상상 이상이었다. 단지 살갗이 시리다는 느낌을 넘어 냉기가 심장을 누르는 느낌이었다.
“눈은 안 오냐?”
“지금은 안 와요.”
“차라리 오는 게 덜 추운데.”
“시발, 와도 춥고 안 와도 추워. 그냥 다 춥지, 뭐.”
“그나마 이제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으니 다행이다.”
확실히 요즘은 아침이 게을러졌다. 날이 추워질수록 따뜻한 침대에서 나가기가 힘들어 몇 분씩 뭉그적거리는 바람에 5분, 10분씩 출발 시간이 미뤄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눈이라도 오는 날에는 끔찍함이 몇 배가 되어 더 서둘러야 하는 걸 알면서 집을 벗어나기가 싫었다.
그러니 석 달이나 되는 긴 여름 방학보다 한 달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겨울 방학이 더 소중했고, 마침내 찾아온 겨울 방학이 어느 때보다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러했다. 최근 더 혹독하게 몸 관리를 하던 정우 형도 오늘만큼은 방학을 축하해야 한다며 몇 주 만에 술을 마셨다.
“집 좋다. 주말인데도 되게 조용하네.”
“그러니까. 이렇게 조용한데 우리 떠들어도 되냐?”
“미리 말해 둬서 괜찮아요.”
“오. 좋은 이웃이네.”
옆집에는 커플이 살고 있었다. 이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면서 벌써 2년째 동거 중인 매튜와 엘레나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종종 세탁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만큼 그들과 나는 상당히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내가 친구를 부르는 건 처음이지만 매튜와 엘레나는 종종 주말에 친구들을 불렀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시작된 파티는 새벽 서너 시가 될 때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들은 친구를 부르기 전 항상 내게 미리 양해를 구했고 나는 그때마다 흔쾌히 괜찮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이번 주에 내가 처음으로 친구가 온다고 말하자 오히려 자신들이 빚진 걸 갚을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세탁기도 없는데 옷 같은 건 어떻게 해?”
“복도 중간에 세탁실 따로 있어요. 세탁기랑 건조기랑 코인 넣어서 이용하면 돼요. 보통 아파트는 다 이런 식으로 되어있어요.”
“아- 따로 살 필요 없구나. 그런 건 우리 기숙사랑 비슷하네. 이왕이면 소파도 하나 넣어주지.”
“얘 혼자 있는 건데, 뭐. 방 침대가 있는데 뭐하러 소파를 써.”
“하긴.”
역시 좀 썰렁한가.
이사 온 지 넉 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거실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빈백이라도 가져다 두려 했으나 매번 피곤함을 핑계로 미루다 보니 아직도 공간이 휑하기만 했다.
엄마 오기 전에 사야 하긴 할 텐데.
“성하 너는 방학 때 뭐해? 한국 들어가?”
“네.”
“언제 가는데?”
“다음 주 수요일이요.”
이번엔 학업을 핑계로 가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한 달 전, 새아버지로부터 티켓을 받았다.
‘네 엄마가 보고 싶다는데 당연히 들어와야지. 비행기 표는 한 비서가 곧 보낼 거다.’
내 동의도 없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러고 보니 세현이도 이번에 들어가지 않아?”
“어. 원래 겨울 방학은 짧다고 안 들어가는데 이번 여름에 엄청 짧게 갔다 왔다고 가야 한댔어.”
“걘 언제 간대?”
“음……. 시험 끝나면 바로 간다 그랬는데 정확히 언젠지 모르겠다. 지금 물어봐야지.”
기현 형은 기름이 묻은 손을 닦고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갔다가 언제 오냐? 1월 중순?”
“아니요. 초에요. 3주 후에 와요.”
“왜? 꽉 채우고 오지. 방학도 짧은데.”
“일 때문에요.”
“아, 맞다.”
다른 것보다 이제야 익숙해진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짧게 다녀와도 최소 2주는 있어야 돌아올 수 있는데 한낱 파트타임 직원에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휴가를 줄 곳은 없었다.
그런데 그만둘 생각으로 사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자 놀랍게도 허락이 떨어졌다. 어차피 겨울 동안은 바빠서 서빙 직원을 한 명 더 고용할 생각이었다며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 인원으로 운영할 수 있을 거라고, 돌아오는 날짜만 정확히 알려달라고 당부하셨다.
“성하 너도 마실래?”
거품이 가득한 맥주잔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니요.”
“응. 그냥 한번 물어봤어.”
“그걸 그냥 왜 물어봐, 인마. 얘 미성년잔데.”
“아씨, 한국에선 성인이잖아.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그래도 여긴 미국이거든? 너나 많이 마셔라. 착한 애 건들지 말고.”
“와. 이 새끼는 나만 나쁜 사람 취급이네. 그냥 우리끼리만 재밌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 한번 물어본 거야. 한 번만 물어보려고 했어, 어차피.”
“성하야, 너 재미없냐?”
“아뇨, 재밌어요.”
티브이나 게임기가 없어 따로 할 만한 거라곤 카드 게임밖에 없었으나 그마저도 이미 벌어진 술판에 밀려 식탁에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거로 대신했다. 나 때문에 모인 시각이 늦어서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세현이 답장 왔어?”
“아니. 읽지도 않았네, 이놈.”
“일부러 안 보는 거 아냐? 귀찮아서 차단했을지도.”
“아냐. 공부하나 보지.”
“성하, 너는 세현이 한국 가는 날짜 들은 거 없어?”
“전혀요.”
한국 나간다는 것도 몰랐는데. 그러고 보면 최근엔 형들보다 내가 더 자주 봤음에도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만날 때마다 사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도 방학 때 무얼 할 거냐는 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강세현도 유학생이구나. 유학생들 대부분이 그렇듯 한국에 나갈 거라고 당연히 예상해야 했는데.
“기재야. 아까 들고 온 보드카 어쨌어?”
맥주 두 병을 비운 정우 형은 배가 너무 부르다며 조금 전 가져온 보드카를 찾았다. 항상 몸 관리를 하는 형은 조금이라도 덜 마시고 취해야 한다며 맥주 한두 잔을 마신 뒤엔 독한 술을 찾았다. 내가 보기엔 술을 마시는 것부터가 문제인 것 같은데.
“그거 오자마자 성하 줬어.”
“아, 들고 올게요. 잠시만요.”
주방 선반 위에 놓아둔 보드카를 가져다주고 주스와 얼음을 꺼내기 위해 다시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크랜베리 주스를 꺼내고 찬장을 열자 미리 준비해 놓은 유리잔 다섯 개가 한 줄로 서 있었다.
형들을 초대해 놓고 종이컵을 내밀기가 미안스러워 어제 일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24시간 대형 마트에서 산 컵이었다.
역시 조금 더 괜찮은 걸 살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잔을 하나씩 꺼내고 있는데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멈췄다.
“어? 방금…….”
“왜 그래요?”
서둘러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냐?”
“아씨, 소리는 무슨 소리. 시발, 졸라 무섭게 왜 그러냐.”
“아냐. 들렸는데. 나만 들었어?”
“나도 들었어. 뭐지?”
“쉿. 잠깐, 다 조용히 해 봐.”
똑똑-.
“아.”
모두가 동시에 침묵하자 고요함 속 노크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은 현관문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냐.”
“옆집인가 봐요.”
“헐. 우리 너무 시끄럽게 했나 봐. 최대한 목소리 줄인다고 줄였는데.”
“이게 다 서기현 너 때문임.”
“미친. 방금까지 졸라 호들갑 떨던 게 누군데.”
그렇게 시끄럽게 한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친구를 불렀다고 말했을 때 분명 웃으며 허락했던 이들이었다. 거기다 그다지 음악을 크게 틀지도, 큰 소리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와서 컴플레인을 하러 왔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서둘러 현관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내 질문에 상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묻자 남자 목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작아 정확한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매튜인가?
문을 열기 전, 도어락 렌즈를 통해 상대를 확인했다.
상대는 동그란 패치가 박힌 두꺼운 패딩을 대충 걸친 채 야구 모자를 쓰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렌즈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눈동자와 또렷한 이목구비.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이였다.
달칵.
“왜 이렇게 늦게 열어.”
유창한 영어 대신 들린 건 낮게 깔린 한국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