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갑작스레 찾아와 인사도 없이 불만을 내뱉은 이는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순간, 찬 기운이 훅 밀려왔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아니라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한기였다.
“어? 세현아.”
“와, 강세현. 네가 웬일이야.”
형들은 나만큼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지. 이 새벽에 연락도 없이 너무 불쑥 찾아왔으니까.
그래도 최근엔 어느 정도 강세현에 대해 파악했다고 자신했었다. 여전히 알아가는 단계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좀 더 빨리 가까워졌고 지금은 대충 어떤 성격인지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강세현의 행동은 내가 생각했던 강세현의 성격과 너무 거리가 있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왔어?”
“뭐?”
아. 실수했다.
당황한 나머지 너무 생각한 그대로 말이 튀어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대의 이마가 와작 구겨졌다.
“아니, 놀라서 말이 좀 이상하게 나갔어.”
재빠르게 정정하자 이번엔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강세현은 나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왜.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안 되는 건 아닌데 갑작스러워서.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보냈잖아. 나도 그 방에 있는데.”
“아, 맞다. 그랬지.”
강세현은 미리 연락하지 그랬냐는 내 물음을 무시한 채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하얀 비닐봉지 안에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견과류와 육포가 들어 있었다.
“뭐야?”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못 샀어. 주변에 주유소밖에 없더라.”
자세히 보니 봉지 겉면에 내가 자주 가는 주유소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어? ……이게 뭐냐. 설마 집들이 선물이야?”
“허얼…… 내가 아는 강세현이 왜 이러지. 집들이 선물치곤 너무 소소한데.”
뒤늦게 내용물을 확인한 형들이 웃는 동안에도 무표정하게 있던 강세현은 나중에 지나가듯 툭 말했다.
“이건 선물 아니다.”
그럼 뭔데.
일단 건네받은 것들을 식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앉은 형들을 위해 안줏거리를 펼치려는데 멀뚱히 서 있는 강세현을 보고 나서 심각한 문제점을 깨달았다.
제이슨 형을 제외한 형들은 모두 네 명. 그리고 나까지 다섯이었을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강세현이 옴으로 여섯이 되고 나니 앉을 의자가 충분하지 않았다. 동그란 원형 식탁도 여섯이 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고민 끝에 우리는 휑하니 빈 거실 바닥에 앉았다. 카펫이 깔린 바닥이라 술을 쏟을까 봐 조심해야 하긴 했지만, 따로 방석을 깔지 않아도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진짜 소파를 사든 테이블을 사든, 거실을 좀 채워놓긴 해야겠구나.
멀리서 온 손님을 바닥에 앉혀놓고 나니 뒤늦게 그런 결심이 섰다.
“아. 세현아. 메시지 봤어?”
“어.”
“봤으면 답장 좀 하지 그랬냐.”
“올라오면서 봤어.”
강세현은 무음으로 해 놔서 운전하느라 뒤늦게 봤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 언제 들어가는데?”
“수요일.”
“어? 성하랑 똑같네.”
그 말을 들은 옅은 갈색 눈동자가 단번에 커졌다.
“잘됐네. 둘이 같이 가면 되겠다.”
아마 같이 못 갈 텐데.
아무리 패션에 무지한 나라도 강세현이 입은 패딩이 몇백만 원짜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정판 운동화를 수십 켤레 가지고 있고, 얇은 티셔츠 한 장도 몇백 불을 주고 사는 사람이 절대 이코노미석을 탈 리 없었다. 그러니까 같은 시각, 같은 비행기를 타더라도 강세현과 나는 절대 같이 갈 수 없었다.
강세현은 획 고개를 돌렸다. 내게로 향한 시선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본인과 같은 날 가는 건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반듯했던 미간이 좁혀졌다.
왜. 뭐, 나만 말 안 했나? 너나 나나 서로 안 궁금했던 거잖아.
무언의 대화를 나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강세현이 뒤를 따라 나왔다.
“어?”
그사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좁은 발코니에 서서 동시에 담뱃불을 붙였다. 겨우 2층밖에 되지 않는 높이에서 보이는 건 아파트 건물 벽에 붙은 몇 개의 가로등과 그 아래 줄을 지어 서 있는 차들뿐이었다. 건물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화단이나 잔디는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너 올 때도 눈 왔어?”
“어. 지금보다는 좀 덜 왔어. 몰랐어?”
“너랑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안 왔거든. 그 이후에 나온 적 없어서 몰랐어. 그러면 눈 내리는 거 알고 온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출발할 때도, 오고 있었냐고.”
“어. 너랑 통화할 때 눈발 날리고 있었어.”
그런데도 여기까지 올 생각을 하다니.
“너…….”
“뭐.”
“진짜 공부하기 싫었구나…….”
강세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어. 좀.’ 그런 대답과 함께.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거야? 아직 반밖에 못했다며.”
“화요일까지 여유 있다고 내일 하라던 사람이 누군데?”
“……그건 그렇지.”
새까맣게 물든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은 전혀 좋은 감정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제는 어떤 형태든 눈은 그저 끔찍하기만 했다.
폭설 때문에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세 시간 만에 도착한다든가, 장장 한 시간 가까이 차에 쌓인 눈을 치운다거나, 시속 20마일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벽에 처박힐 뻔하는 최악의 상황. 눈만 오면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사흘 연속으로 폭설이 내렸던 주는 학교도 일도 제시간을 맞추느라 정말 혼이 났었다.
시카고에 살면 딱 2년 만에 눈이 싫어진다던 기현 형의 말은 틀렸다. 2년은커녕 첫해부터 싫어졌다.
“수요일, 몇 시야?”
강세현은 예상했던 질문을 던졌다.
“오전 10시쯤? 아마 너랑 같은 비행기일걸.”
어차피 시카고에서 서울까지 운행되는 오전 비행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공항 갈 때는 어떻게 가?”
“그냥 택시 부르려고. 3주간 주차를 하는 것보다는 왕복 택시비가 오히려 더 싸더라.”
“그러면 나랑 같이 가. 내가 데리러 올게.”
“너는 차 가지고 가려고?”
“어.”
그래. 돈도 많은데 몇백 불 주차비가 뭐 대수겠어.
“여기까지 왔다가 가는 거 번거롭지 않겠냐?”
“어차피 가는 길인데 뭐.”
“그래도 괜히 미안해서.”
“또 신세 진다고?”
“어.”
원래 이렇게 남에게 쉽게 빚을 지는 타입이 아닌데 이상하게 강세현에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번 빚을 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손을 내미니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체 너한테 술을 몇 번 사야 하냐.”
강세현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빚은 항상 밥이 아닌 술로 갚으라는 말로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갚을 수 없는 빚은 계속 늘어만 갔고, 술을 살 수 있는 나이가 되려면 아직도 1년 반이나 남았는데 그때 돼서 정말 갚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냥 밥 살게.”
“왜.”
“그러는 넌 왜 술에 집착해, 아직 멀었는데. 이제 미안해서 너희 집 못 가겠다.”
“나중에 다 받을 거야. 잘 모아 둬.”
“그게 더 무섭다. 아니면 기름이라도 넣어 줄-”
“싫어.”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가 툭 내 말을 잘랐다.
그래. 알았다. 네 맘대로 하든지.
강세현은 고집이 세다. 여전히 알아가는 단계지만, 그 사실은 진즉에 알 수 있었다. 한번 정한 일은 절대 바꾸지 않았고, 아무리 설득해도 양보하지 않아 몇 번 물어보고 싫다는 소리가 나오면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럴 때는 그냥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이 맞추는 게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잠깐 사이에 눈이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점점 더 많아지는 눈송이들을 보며 제발 거짓말처럼 이 눈이 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망스럽게도 하늘은 그런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거실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형들을 피해 거실 커튼을 살며시 걷자 새하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높은 건물 지붕도, 넓은 도로도, 곳곳에 놓인 표지판까지도. 내 차와 기재 형 차 앞에 이중 주차를 해 놓은 강세현의 차도 겨우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미 질려버린, 지긋지긋한 시카고의 겨울이었다.
* * *
월요일 아침, 7시도 되지 않은 시각 습관처럼 눈이 일찍 뜨였다.
「6:47 A.M.」
억울한 마음에 일부러 눈을 감고 다시 자려 했지만 이미 말똥해져 버린 정신이 자꾸만 잠을 뒤척이게 했다. 결국, 쉬는 것조차 맘대로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학하면 충분히 잘 수 있다고 좋아했는데.
샤워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텅 빈 냉장고를 여는 대신 찬장에서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딱딱한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봤다. 거실 창을 통해 보이는 밖은 여전히 추워 보였다.
언제나와 같은 보통의 아침이었다.
오후에는 사람이 없는 점심시간에 세탁실에서 밀린 빨래를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전쯤에 사 놓은 즉석 죽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방학이라고 해서 대단히 달라진 일은 전혀 없었다. 그저 하루의 주말이 더 생겨난 느낌이었고,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는 것만으로 느긋한 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후 역시 언제나와 같은 보통의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막 두 시가 넘었을 때 강세현에게 문자가 왔다.
강세현: [집이야?]
나: [어.]
강세현: [한시간 뒤에도?]
나: [아마도? 왜?]
강세현: [선물보냈어]
선물? 무슨 선물?
곧바로 질문을 보내자 집들이 선물이라는 답장이 도착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딩동-.
[미스터 권? 딜리버리 왔습니다.]
선물을 ‘보냈다’는 말에 당일에 배달이 될 만한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꽃이라든가 음식이라든가 그런 것들. 하지만 노란 모자를 쓴 배달원 두 명이 들고 온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물건이 너무 없는데 일부러 그런 거야?’
‘음……. 원래 뭘 많이 두는 편은 아니긴 한데 내가 생각해도 거실은 좀 심한 것 같아. 소파는 하나 있었으면 하는데 계속 미루다가 못 샀어. 사야지 해 놓고 찾아볼 시간이 없어서.’
‘어떤 거로 사고 싶은데.’
‘그냥 밝은 색상으로 된 거. 근데 관리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가죽이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가죽은 너무 비싸. 인조 가죽으로 된 것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중고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엊그제 새벽, 스쳐 지나가듯 괜찮다고 했던 소파가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절대 인조 가죽이 아니었고 중고는 더더욱 아니었다.
더는 평범한 보통의 하루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