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성하야. 너도 형이랑 오랜만에 볼 텐데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자 엄마는 어려운 숙제를 던졌다. 절대 풀고 싶지 않은 숙제였다.
“왜 조용해? 설마 몇 달 만이라고 어색하니?”
어색하다기보다는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 기억에 분명 다시 보지 말자고 했던 이가 떡하니 눈앞에 앉아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
“얘는, 특별히 뭐 할 말이 있어야 하니? 그냥 안부도 묻고 그러는 거지.”
“성하는 아직도 제가 불편한가 봐요.”
“형이 왜 불편해. 그렇게 형 갖고 싶다고 해 놓고.”
“제가 친형이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죠, 뭐.”
불편했던 자리가 불쾌해지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머릿속엔 참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데. 오늘따라 가슴이 답답했다.
어젯밤 강세현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불편해도 참아야지.’
‘왜.’
‘왜냐니…… 여자친구랑 같이 있다며. 옆에 있는 사람을 봐서 참는 거지.’
‘그건 힘들걸.’
강세현은 매번 이런 기분일까.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데, 본인은 이렇게 견디기 힘든 건가.
“아, 기준아. 너는 여자친구 없니? 성하는 매번 물을 때마다 없다고 해서.”
“아쉽게도 전 인기 없어요.”
“정말? 아닐 것 같은데. 요즘 애들은 옷 잘 입고 잘 꾸미는 사람 좋아한다던데, 안 그러니?”
“글쎄요. 모르겠어요. 어쨌든 지금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어차피 나중에 만나면 되고.”
인기를 운운하며 대답을 회피하는 상대는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오히려 매번 함께 있는 파트너가 달라져서 내가 본 것만 여러 명이었다. 그뿐 아니라 좁은 한인 사회에서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훨씬 더 많았다.
“아닐 거야. 분명 인기 많을 것 같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흠……. 인기는 어차피 성공하면 다 알아서 따라올 거니까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라.”
“아휴, 또 그런 꽉 막힌 소리 하네. 자꾸 그러면 요즘 애들한테 인기 없어요, 당신.”
모두가 웃는데도 혼자 웃을 수 없었다. 어색한 건 나뿐이었다. 이 공간에서 어울리지 않는 건 나밖에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근데 성하 너는 여자친구랑 헤어졌나 봐?”
안 그래도 굳었던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분명 인상을 썼을 테니까.
“어머, 성하 너 여자친구 없다며.”
“없어.”
“그러면 헤어졌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나도 알고 싶은데.
영문 모를 이야기에 황당해 말 꺼낸 장본인을 빤히 쳐다봤다.
“너 계속 만났던 애 있잖아. 그 매번 옆에 있었던.”
“누군데? 성하 너, 솔직히 말해봐. 엄마가 그냥 궁금해서 그래.”
“걘 여자친구 아니야.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군데 새벽까지 막 같이 있고 그러나?”
그건 딱 한 번뿐이었는데.
뒤늦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 이야기가 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소라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매번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마주친 건 두 번밖에 없었고, 그중 한 번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돌아가는 소라를 배웅하다 마주친 것뿐이었다.
“하긴 잘 헤어졌어. 내 생각에 걘 너무 평범한 것 같았거든. 친구도 아무나 사귈 수는 없잖아?”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처음엔 오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소라와 내가 친구라는 걸 뻔히 알고 하는 말이었다. ‘평범’이라는 말과 ‘아무나’라는 말 뒤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화가 날 상황에서 짜증도 나지 않았다.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낮았으면, 애초부터 제대로 된 생각을 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실망이나 원망도 없었다. 단지 썩은 머리에서 나는 생각은 역시 그 정도구나, 하고 납득했을 뿐이었다.
평생 평범하게만 살고 싶다던 소라에게 이 얘길 하면 오히려 고마워할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에 관해 이야기를 한 상대가 누군지 알면 또 그 입으로 거친 욕이 튀어나오겠지만.
“어쨌든 나중에 생기면 그땐 꼭 말해 줄게, 엄마.”
“정말이지?”
“응.”
내가 어떤 반론이라도 할 줄 알았던 강기준은 놀란 듯했다. 그리고 내가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거북스러운 저녁 식사가 이어지는 건 단순히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갈 때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업에 관심이 많은 형은 새아버지와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럴 때마다 이유 모를 감정이 속을 들쑤셨다.
“아, 아버지. 저희 현세기업 쪽 외주 직접 받아요?”
“그렇지. 왜?”
“미국에서 같이 어울리는 애가 현세기업 쪽에 연줄이 있거든요. 그래서 얼마 전에 거기 아들을 만났는데 어차피 걔도 나중에 집안일 맡을 거니까 잘 알아 두려고요.”
“오, 그러냐. 그런 인맥은 중요하다. 잘 알아 둬야지.”
“네. 안 그래도 조금 이따가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기쁨을 억지로 숨긴 상대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 눈빛이 마치 대단한 걸 해낸 승리자가 된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내게 그 어떤 열등감도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매번 그런 식으로 볼 필요 없다고. 어차피 당신 아버지는 볼펜 한 자루도 내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이어진 저녁 식사는 디저트가 나오고 금방 끝날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 불편함을 넘어 지루해질 무렵,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런 순간에 오는 메시지가 반가웠다.
강세현: [뭐해]
매번 타이밍이 너무 좋은 거 아닌가.
강세현에게서 연락이 온 건 4일 만이었다. 여자친구도 함께 있고, 일도 한다길래 한동안은 계속 연락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나: [밥먹고 있어]
강세현: [그후엔]
나: [아마도 집? 모르겠는데]
강세현: [그럼 보자]
올 때는 따로 왔지만, 돌아가는 길은 엄마와 새아버지 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침 핑곗거리를 찾던 참이었다. 곧바로 알겠다고 보내자 금세 상대가 메시지를 읽었다.
강세현: [차가지고 오지마]
나: [왜?]
강세현: [빚 갚아야하니까]
* * *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말 저녁이 아닌데도 선술집 안은 꽤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은 하나였다.
강세현은 왁작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꼬고 한쪽 어깨를 떨군 채 턱을 괸 모습이 모델 못지않았다. 선이 잘 떨어지는 롱코트와 주름 없는 셔츠가 싸구려 판자 테이블과 영 어울리지 않아 위화감이 느껴졌다.
“빨리 왔네.”
내 목소리에 서서히 고개를 든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언제봐도 선명한 눈동자 앞에선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네가 늦은 거야.”
강세현은 오늘따라 어딘가 달라 보였다. 비행기를 탈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머리 모양과 옷차림인데 그때보다 더 한껏 꾸민 느낌이었다. 그게 아니면 이런 곳에서 만나는 게 처음이어서 낯설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었다.
“끝나자마자 온 거야. 그것도 늦을까 봐 택시 타고 왔는데.”
“그러면 처음부터 약속 장소를 가까운 데로 하지.”
“강남은 싫다며. 생각나는 게 여기밖에 없었어.”
강세현과 우리 집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연히 둘 다 가까운 강남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장소를 묻자 강남은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술집이 많은 곳을 알아보다 문득 생각난 곳으로 했을 뿐이었다.
조금 괜찮은 곳으로 할 걸 그랬나.
“일단 주문부터 하자.”
오며 가며 보긴 했어도 안으로 들어오는 건 처음이어서 당연히 메뉴판도 생소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 너 오기 전에 봤는데 잘 모르겠다.”
코팅된 종이 겉면이 세월의 흔적에 따라 헤져 너덜너덜했다. 그런 메뉴판을 휙휙 넘기는 강세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진짜 잘 모르겠네.”
“와 봤던 거 아니야?”
“예전에 이 근처 살 때 그냥 본 것뿐이야. 내가 술집에 올 일이 뭐 있다고. 나나 너나 술 마시는 것도 처음이잖아.”
웃기는 상황이었다. 갑작스레 만나자고 하곤 술을 사라니. 그동안 쌓였던 빚을 갚는 건 당연히 몇 년 뒤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다.
“난 처음 아닌데.”
“뭐?”
“처음 아니라고.”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너 마신 적 있어?”
“어. 한국에서는 마셔. 마실 수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 나이로는 스물한 살을 앞두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지도 벌써 거의 일 년이 되어 간다는 의미였다.
“넌 왜 지금껏 안 마셨어?”
“그냥 기회가 없었어.”
사실 기회는 많았다. 먼저 한국에 들어간 형 누나들이 틈만 나면 나오라 말했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는 주량도 모르는 상태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만큼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술에 취해 구구절절 나에 대해 털어놓을까 봐 그럴 수 없었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미국에 있는 소라뿐이었다.
내가 그렇다고 상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일까, 강세현이라면 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술은 어떻게 할래?”
“너 좋은 거로 해.”
“나는 누구랑 다르게 술 마시는 게 처음이라서.”
“그러니까 네가 마시고 싶은 거로 하라고.”
몇 개 없는 메뉴를 한참 동안 고민했다. 소주, 맥주, 막걸리, 사케, 그 안에서 또 여러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겠지만, 일단 어떤 술을 마시느냐가 문제였다.
“잘 모르겠는데. 넌 처음에 뭐 마셨어?”
“흠…….”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강세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없어. 위스키 마셨으니까.”
“…….”
아, 그래, 그랬겠지.
드라마에 나오는 와인이나 양주만 마시는 부자들은 그저 구시대적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혹시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반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위스키를 마셔야 할 강세현이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건 당연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