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30화 (30/96)

#30

“어차피 너도 여기 있는 건 다 안 마셔봤으니까 처음이라고 치고 같이 생각해보자. ……역시 처음은 소주 아닐까?”

“독할 텐데.”

“위스키는 안 독해서 마셨냐?”

좀처럼 소리 내어 웃지 않는 강세현이 웬일로 크게 웃었다. 괜히 나까지 기분 좋아지는 웃음이었다.

“막걸리는 숙취가 심하댔고, 맥주는 뭔가 술 같지 않은데……. 사케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 역시 이것밖에 없다.”

“그걸로 해, 그럼.”

결국, 처음은 소주로 결정했다.

“안주는 배 좀 채울만한 거로 하자.”

“저녁 먹었다며.”

“어……. 근데 거의 못 먹었어.”

“왜?”

“사정이 좀 있어서.”

상대는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강세현은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캐묻지 않았다.

“너는 저녁 먹었어?”

“어. 식당에서 메시지 보낸 거야. 그러니까 너 먹고 싶은 거로 시켜.”

솔직히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고기든, 회든, 샐러드든. 전복만 아니면 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차돌박이와 새우가 들어가는 메뉴 두 가지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신분증을 확인한 후 주문을 받은 직원은 가기 전 내 앞을 힐끗 쳐다보고 떠났다.

“근데 왜 만나자고 한 거야?”

“부르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워서. 식당에서 보낸 거면 저녁 먹던 도중에 보낸 거잖아. 거기다 술 마시자고 그래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지.”

커다란 손이 플라스틱 물잔을 집어 들었다. 꽤 목이 말랐는지 상당히 빠르게 바닥을 보였다. 강세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말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

“그냥 오늘은 모르는 사람들이랑 있기 싫어서.”

“……아. 그 며칠 전에 만났던 사람들?”

“어.”

며칠 전에 만난 사람들인데도 안 친하다는 표현 대신 아예 모른다는 표현을 썼다. 그것만으로 강세현이 얼마나 그 사람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게 새삼 다시 놀라웠다.

이런 게 기쁘기까지 하다니. 이젠 참 별 게 다 기쁘구나.

“그러면 오늘 여자친구랑 보는 거였어?”

“좀 전까지 같이 있었어. 원래 저녁만 먹기로 했는데 약속 없으면 자기랑 같이 가자고 해서.”

“아, 그럼 뭐.”

“오늘은 같이 있으라는 소리 안 하네. 언제는 불편해도 참으라더니.”

“앞으로 그런 말은 함부로 안 하기로 했어.”

“갑자기?”

“어. 오늘부터 그러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직원이 와서 녹색 병과 소주잔 두 개를 놓아주고 갔다. 기본 안주로는 삶은 콩과 순두부가 나왔다. 삶은 콩 하나를 손에 들고 유심히 보던 강세현은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곤 이내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어색해하는 모습이 오히려 생소했다. 2불 50센트짜리 핫도그를 먹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한판에 10불짜리 피자도 스스럼없이 먹던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전화 좀 받고 올게.”

“어, 그래.”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강세현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두르는 모습이 왠지 여자친구는 아닌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돌아선 강세현의 입에서는 존댓말이 나왔다.

덩그러니 혼자 남자 눈에 들어온 건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녹색 병이었다. 술병을 보자 언젠가 전해 들었었던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 말을 듣고 나도 언젠가 아버지가 따라주는 술을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다. 잠시나마 바랐던 말도 안 되는 희망 사항이었다. 아마 그 사람과 나는 평생 단둘이 식탁에 앉는 일조차 없을 테니까.

하나가 떠오르자 잊었던 다른 헛된 바람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내게 아버지가 있었다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축하해 주셨을까. 함께 술잔을 기울여 주셨을까.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아들로 생각했다면 아마도 위스키를 따라 주지 않았을까. 술은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감정이 들쑥날쑥했다.

이래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취하려고 마시는 술은 즐거워야 할 텐데 혹시라도 취해버리면 슬퍼질까 봐.

“뭐 하고 있어.”

어느새 돌아온 강세현은 인상을 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주병 목을 잡고 뚜껑을 만지작거리는 내 손끝을 보고 있었다.

“그새를 못 참고 마시려고?”

“아니야.”

“그렇게 마시고 싶으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안 마셨지.”

“아니라고, 그런 거. 그냥 생각난 게 좀 있어서 그래.”

아니라는 말에도 끝까지 의심스러운 눈빛이 따라왔다.

“통화는 다 했어?”

“어. 이제 마시자.”

커다란 손이 내가 들고 있던 소주병을 가져갔다. 자연스레 뚜껑을 딴 강세현은 불쑥 내 앞으로 병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잔을 들어 술을 받은 뒤엔 상대방의 술잔도 채웠다.

강세현과 나는 누가 뭐랄 것 없이 잔을 부딪쳤다. 특별한 건배사 같은 건 당연하게도 없었다.

이렇게 강세현과 사이좋게 술잔을 나눠도 되는 건가.

마시기 전 아주 잠깐이지만 고민했다. 여전히 아는 사이와 친구의 경계선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도저히 내가 강세현의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해야 했었다는 걸 알기에 곧바로 술잔을 털어 넣었다. 바닥을 보인 잔을 내려놓자 뒤늦게 알싸한 향이 진동하며 혀끝이 씁쓸해졌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쓰였다.

“……이런 맛으로 먹는 거겠지?”

“아마도. 난 분명 독할 거라고 했다.”

“…….”

내 이마는 도무지 펴지질 않는데 상대는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별로면 다른 거 마시던지.”

“됐어. 그냥 마시지 뭐. 먹다 보면 나아지겠지.”

입 안의 씁쓸함을 없애기 위해 물을 마시는 동안 안주가 나왔다. 사진과 별반 다르지 않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술을 앞에 두고 일단 배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그사이 빈 술잔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이야깃거리를 찾다 조금 전 갑자기 생각난 질문을 던졌다.

“일은 어때?”

“뭐, 그냥 그래.”

“음, 아버지 회사 일이랬지?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냐? 억지로는 말 안 해도 돼.”

그렇게 묻자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동그래졌다.

“그게 이제 와서 궁금해? 참 빨리도 묻는다.”

“집안일이라고 대충 대답하길래 말하기 싫은가보다, 했지. 더 물으면 괜히 캐묻는 것 같아서 싫었을 뿐이야.”

지금껏 봐 온 이들 중 강세현만큼이나 좋은 곳에서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는 사람들은 다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중견기업이나 꽤 내놓으라 할 만한 집안의 자제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 대부분이 자신을 소개할 때 그런 점을 먼저 이야기했다. 자신의 배경을 공개하면 일단 상대의 우위에 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세현은 달랐다. 본인이 말하지 않았고, 그러면 나 또한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형들이 말 안 해?”

“뭘? 너희 집 뭐 하는지?”

“어. 대충 알고 있는데.”

“몰라. 묻지도 않았고.”

지난번 강세현과 그의 누나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때 누나와 형들도 모두 아버지 사업을 돕는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다른 형제의 출장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집안 사업이 상당히 규모가 크다는 거였다.

그 정도만 알고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궁금해진다면 직접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남을 통해 듣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형들은 내가 묻지도 않은 걸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나 또한 오늘 전까지는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근데 갑자기 왜 그게 궁금해? 내가 일한다고 해서?”

“아니. 얼마나 대단한 집안 자제면 처음이 위스키인가 싶어서.”

“뭐야. 놀리는 거였어?”

“놀리려고 한 건 맞는데 그거랑 별개로 궁금하기도 했어. 내가 묻지 않으면 절대 말 안 할 거잖아, 너.”

허탈한 듯 헛웃음을 지은 강세현은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잔을 내밀었다. 다시 마신 술은 여전히 쓰기만 했다.

“그러는 넌.”

“나?”

“너는 어떤데.”

“뭐가.”

“넌 물어도 말 안 해 줄 것 같아서. 네 얘기 절대 안 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답을 할 생각도 없었다.

“뭐가 궁금한데?”

“그냥 다.”

‘그냥 다’라니.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천하의 강세현이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니 영광이기도 하면서도 누가 나에 대해 자세히 묻는 건 또 싫었다.

새로 시작하는 연인 사이에나 할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은 강세현은 다시 잔을 채웠다. 벌써 석 잔째였다.

“그러면 그 전에 너부터 대답해봐. 방금 그냥 넘어갔잖아.”

“우리 집?”

“어. 내가 들으면 알만한 기업이야?”

“……그냥 이것저것 여러 가지 사업해. 국내 해외 할 거 없이.”

잠깐의 망설임 후 고개를 끄덕인 강세현은 다 말해 줄 것처럼 굴더니 결국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사람은 나였고,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사람한테 이런 데는 좀 그렇다. 더 좋은 거로 갚아야 하는데.”

“됐어.”

농담처럼 던진 말에 강세현은 정색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되려 머쓱해졌다.

“그래. 그럼 나에 대해 궁금한 거 말해 봐. 이렇게 대놓고 뭘 묻고 대답하는 건 처음이라 좀 어색하지만, 특별히 봐줄게.”

다행히 금세 분위기가 괜찮아졌다.

“가족관계.”

“혈액형부터 물어볼 줄 알았더니. 그런 게 궁금했냐?”

“빨리.”

“엄마. 아빠. 형. 그리고 나.”

“형? 의외네. 넌 왠지 첫째일 것 같았거든.”

“왜?”

“그냥 느낌이 그래. 조심스럽잖아. 뭐든.”

강세현은 다른 사람을 꽤 정확히 알고 있었다.

@MINT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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