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7. 변화
강세현
드르륵- 드르륵-.
끈질긴 전화는 벌써 여러 번이나 무시했는데도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고 울렸다. 이대로 두면 최소 열 번은 더 올 거라는 걸 알기에 받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소파 위에 던져뒀다.
한 시간쯤 운동을 하고 돌아오자 무수히 많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여보♡: [전화 받아]
여보♡: [미안하다고 했잖아]
여보♡: [어차피 이대로 못헤어지는거 알지?]
질리지도 않나. 액정 중앙에 떠 있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굳이 앞에 온 메시지를 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매번 질타와 사과가 반복되는 다툼의 마지막은 늘 집안 문제로 귀결됐다.
뭘 한 것도 없는데 배터리가 반밖에 남지 않았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시원한 물줄기 아래 몸을 맡기자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날 좋아하기는 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생각하거나 고민할 시간도 필요 없었다.
‘어.’
그때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답을 해 줬지만, 상대는 늘 불만이었다. 말해 주길 바라면서 막상 말해 주면 그 말의 무게를 스스로 날려 버렸다.
‘네 말에는 진심이 없어.’
그 말을 받아칠 만한 현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매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나면 긴 말싸움의 승자는 그녀였다.
‘헤어져.’
그리고 내 대답은 늘,
‘그래.’
그것뿐이었다.
지금은 싸움뿐인 연애도 처음엔 괜찮았었다. 이렇게 엉망이 되기 전까지는.
처음엔 그녀도 집안으로 엮인 인연 중 하나였다. 내로라할 만큼 이름있는 집안의 아들과 딸. 집안끼리 알고 지낸 어른들의 권유로 처음엔 친구부터 시작했다.
사람을 경계하는 내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그녀의 성격 때문인지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고, 우연처럼 함께 유학길에 오르면서 그녀가 간혹 시카고에 놀러 오곤 했다.
‘너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그렇게 묻는 게 자존심 센 상대의 고백 방식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 관계를 친구라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는 나와 친구 이상의 관계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의 당돌함이 싫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누군가와 사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는데, 만약 그 상대가 그녀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했다.
나를 좋아하는 그녀가 좋았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원하는 것도,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전부 맞춰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점점 시간이 흐르자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불만이 되면서 관계는 조금씩 삐거덕대기 시작했다. 장거리 연애에 싫증이 난 그녀는 어떻게든 내가 뉴욕에 오길 바랐다.
그럼에도 내가 시카고에 있는 대학을 선택하자 그때부터 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내 선택이 본인에 대한 마음과 관계가 있다며 그때부터 내 마음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았다. 원하는 말을 들려 주고, 원하는 선물을 주어도 상대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헤어져.’
처음 그렇게 말한 날,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사람이 더는 원치 않는 관계를 다른 한쪽만으로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날 그녀가 헤어짐을 취소했을 때도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랫동안 이어온 관계를 아직 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녀는 습관처럼 작은 일로도 헤어짐을 말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됐다.
여태까지 잘 버텨오던 게 점점 버거워진 건 얼마 전부터였다. 헤어짐을 통보받은 그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또 오는 그녀의 전화를 처음으로 무시하자 그녀는 우리 둘만의 관계에 처음으로 집안을 입에 올렸다.
‘어차피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한테 어울리는 사람도 너밖에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상대가 좋았던 건 상대의 배경 때문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나를 좋아한 게 단지 나의 배경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서로의 집안 때문에 이 관계를 이어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무언가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무려 5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하찮은 것에 관심 두는 것은 감정 낭비라고 생각하는 내가 유일하게 끌고 간 관계였다. 어떻게든 유지하려 노력해 본, 하나밖에 없는 인연이었다. 그 노력을 허망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계가 오고 있었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나니 저녁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여전히 여유로웠다. 오랜만에 약속 장소가 다운타운이 아니라는 이유로 준비를 조금 서둘렀더니 어정쩡하게 시간이 비어있었지만, 일찍 집을 나섰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나았다.
예상대로 다운 타운을 빠져나올 때 빼고는 차가 막히지 않아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넓은 주차장에 들어서는데 익숙한 차 한 대가 입구 쪽에 서 있었다. 그 옆에 차를 대고 창문을 내렸다. 상대로 나를 따라 창을 내렸다.
“언제 왔어?”
“좀 전에. 한 오 분쯤 됐어.”
“형들은?”
“딱 맞춰서 도착할 것 같대.”
“또 늦겠네, 뭐.”
형들이 약속한 시각보다 늦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딱 맞춰 도착한다고 해도 항상 기본 15분은 지각이었다. 예전엔 항상 나 혼자 일찍 와서 기다렸지만, 이제는 둘이 함께했다. 나보다 더 시간을 잘 지키는 권성하는 늘 제시간보다 일찍 와서 기다렸다.
“그냥 먼저 들어가자.”
“너무 이른데, 10분만 있다 들어가. 그때 주문하면 형들 올 때쯤 음식 나올 것 같으니까.”
“그래.”
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상대도 나를 따라 내렸다. 이렇게 권성하를 마주하는 건 한 달 만이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권성하는 나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방학의 반도 지나지 않은 6월 말, 먼저 시카고로 돌아갔다. 그전까지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다가 이렇게 오래 떨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익숙한 옆모습이 조금 달라 보였다. 못 본 사이 어딘가 바뀌었나, 자세히 살펴보니 또렷한 턱선이 더 진해지고 얄팍한 목선이 더 가늘어져 있었다.
“살 빠졌어?”
“조금?”
조금이 아닌데.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볼록한 볼살이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전체적으로 마르기도 했지만, 그 때문인지 전보다 성숙한 느낌이었다.
“넌 좀 탔다.”
“너 있을 때도 까맸잖아.”
“그때보다 더 탔어.”
대화 도중에도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하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쓰였다. 권성하는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싸웠어?”
“뭘 물어.”
하여간 눈치는 귀신같지.
몇 년을 함께한 형들은 내 기분도 잘 모르는데 눈치 빠른 권성하는 그 이유까지 알아냈다.
“대체 매번 어떻게 아는 거야?”
“그냥 보면 알겠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아냐고.”
“그렇게 붙어있었는데 모를까 봐? 2년 정도 있었으면 그 정도는 알아.”
고작 2년 만에.
벌써 두 번의 해가 지나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있었다. 처음 만나 어색하게 담배를 피우던 그때의 기억도 많이 흐릿해졌다. 지금은 옆에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사람이었다.
“얼른 화해해. 어차피 받아줄 거면 며칠 동안 힘들어하지 말고.”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좋아서 웃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라는 표현이 너무 정확해서 할 말이 없어 웃음이 나온 것뿐이었다.
‘어차피 받아줄 거면.’
결국, 결론은 정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짜 덥다. 벌써 다음 주가 개강이네.”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 유난히 날이 더웠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났다.
“밥 먹고 뭐 한대?”
“글쎄. 볼링 치지 않을까.”
“또?”
“나도 잘 몰라. 그냥 그럴 것 같다는 것뿐이지.”
잘 모른다고 말해도 지금껏 권성하가 하는 예상은 대부분 맞았다. 한번 빠지면 질릴 때까지 그것만 하는 기현 형이 최근에 빠진 건 볼링이었다.
담배를 다 피운 우리는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최근 들어 자주 오는 중국집은 화려한 외관만큼이나 내부 또한 각종 장식으로 현란했다. 입맛 까다로운 제이슨 형이 이곳 깐풍기에 꽂히는 바람에 덩달아 자주 오게 된 곳이었다.
“몇 분이세요?”
“7명이요.”
안으로 들어서자 우릴 알아본 주인장이 나와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화교 출신인 주인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뭐로 준비해드릴까요?”
우리는 늘 먹던 음식들을 주문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다리던 주인공들이 소란스럽게 등장했다.
“헐! 아직 안 나왔네? 주문 안 했냐?”
“설마 주문 안 했겠냐.”
“시끄럽고, 애들한테 인사부터 해.”
형들은 멋쩍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차가 막혔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권성하와 나는 그 말을 듣고 그저 웃었다.
자리에 앉은 형들이 배고프다고 투덜대는데 마침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음식이 나왔다. 접시가 놓이자마자 음식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정신없이 식사하는 그 와중에도 절대 조용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기현 형의 입은 쉴새 없이 움직였다.
“와, 미친. 다음 주부터 개강이야. 진짜 미쳤다. 시간 순삭.”
“아- 진짜 끔찍하다.”
모델 일을 하면서 꾸준히 학기를 마친 정우 형을 제외하곤 다들 아직 재학중이었다. 중간에 전공을 바꾼 기현 형과 제이슨 형은 한 학기가 남았고, 의학 전공인 기재 형과 준성 형은 여전히 일 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권성하와 나는 어느새 3학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