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끝나고 볼링, 콜?”
한창 말을 쏟아내던 기현 형이 볼링 이야기를 꺼내자 권성하와 눈이 마주쳤다.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제안에 웃음이 났다.
“그러든지.”
“좋아.”
“나도 콜.”
“난 빠진다. 소연이 만나러 가야 돼.”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먹고 바로 연락하기로 함.”
“알았다. 그럼 장기재 빼고 다지? 너네는?”
“우리도 가.”
잘 튀겨진 닭을 입에 넣자 강한 맵고 짠 맛이 혀를 자극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지만, 내게는 이곳 요리 중 유일하게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오늘도 역시 아니었다.
툭. 옆에 앉은 권성하가 빈 접시를 내밀었다.
“줘. 안 먹을 거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기현 형이 입을 열었다.
“이 형아는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난다.”
“네가 왜 눈물이나.”
“또, 또 시작이다. 서기현.”
“아마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은-”
“성하 소개해 줬다는 거? 알았어. 세현이도 고마워할 테니까 이제 그만해라, 좀.”
매번 반복되는 레퍼토리였다. 너희가 이렇게 친해질 줄 몰랐다. 이토록 오래 놀 줄 몰랐다. 너희를 소개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다. 기현 형은 매번 질리도록 같은 말을 했다.
물론 나도 처음엔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은 몰랐지만, 겨우 2년 가지고 오래됐다고 하는 건 좀 어이가 없었다.
“아, 세현아.”
대각선에서 나를 부른 건 정우 형이었다.
“너 이번 주에 뉴욕 가?”
“그건 왜?”
“토요일에 쇼 있어서 뒤풀이 있는데 안 갈 거거든. 끝나는 시간 맞춰서 따로 술 마시려고 하는데 너 시카고 있으면 너희 집에서 모일까 해서 묻는 거야. 아까 우리끼리는 오면서 이야기했어.”
“성하는?”
당연한 걸 물었을 뿐인데 정우 형은 아주 잠깐 주춤했다.
“성하는 일하잖아. 너 괜찮다고 하면 성하도 일 끝나고 그리로 오면 되니까.”
“쇼 끝나는 게 몇 신데.”
“대충…… 여덟, 아홉 시?”
“괜찮아, 그럼.”
“오. 다행이다. 이번 주는 뉴욕 안 가나 보네. 방학 마지막 주라 무조건 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형들이 나보다 더 여자친구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방학 마지막 주니까 무조건 와야 한다며 화를 내던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긴 여름방학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수십 번을 만났다. 거의 매일 봤으니 괜찮을 줄 알고 2주 일찍 미국에 들어왔는데 여자친구는 그것마저 불만이었다.
남은 2주 동안은 미뤄둔 운동이라든가 개강 준비를 하고 싶어 계속 시카고에 있을 거라고 하자 더 화가 났고, 결국 이번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성하야. 너도 들었지?”
“네. 끝나고 갈게요, 전.”
“그래. 꼭 와라. 너 안 오면 강세현이 집 안 빌려줄 수도 있어. 성하 넌 꼭 와야 해.”
“왜 또 그렇게 되는데.”
“왜긴. 예전에 성하 안 와서 너 재미없다고 두 시부터 잔 거 기억 안 나냐?”
“나.”
오랫동안 형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는데 딱 하루 그랬었다. 언제나처럼 우리 집에서 게임을 하거나 카드를 치며 술을 마셨던 날이었다.
평소처럼 형들이 하는 게임을 지켜보며 술을 마시는데 즐겁지가 않았다. 재미없다는 내 말에 형들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따라줬는데도 그랬었다.
“너 안 피곤하겠어?”
“뭐, 새삼.”
권성하는 한두 번도 아니라며 웃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무리하지 말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죽고 못 산다. 이 정도면 애인 아니냐?”
“맞지. 강세현 여친은 뉴욕 여보고, 성하는 시카고 여보. 얼른 폰에 저장된 거 바꿔. 우리 성하도 빚쟁이 말고 하트 달아줘라.”
형들이 우릴 보며 농담을 할 때도 권성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놀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근데 진지하게, 나 얼마 전에 그런 생각 했는데…… 만약에 성하한테 여자친구 생기면 어떡하냐?”
“뭘 어떡해.”
“아니, 혹시 세현이 울까 봐.”
“그만하지?”
“오, 드디어 화냈다.”
지금껏 어떤 말을 해도 가만히 있었던 권성하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좀처럼 하지 않는 농담도 했다.
“그런 거냐?”
“뭘.”
“나 여자친구 생기면 울 거냐고.”
“이제는 너까지 이래?”
“왜. 난 진지하게 묻는 건데.”
진지하게 묻는 거라고 보기엔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걱정마라. 성하 졸업 때까지는 공부만 한댔어. 물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만.”
“많은 이들이 슬퍼할 일이지. 이 형도 슬프다. 소개해 줄 사람이 줄을 섰는데.”
실제로 권성하를 좋아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았다. 괜찮은 외모에 큰 키, 거기다 성격까지 좋으니 하물며 남자한테도 인기가 좋은데 여자한테 없을 리 없었다.
“이게 다 강세현 때문이야.”
“또 왜 나야.”
“너 때문에 매번 우리끼리만 만나니까 성하가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잖아.”
“좀 전에 소개해 줄 사람이 줄을 섰다며. 이 모임이랑은 관계없는 거 아냐? 본인이 싫다잖아.”
“그래도 혹시 아냐? 우연히 마주치면 운명처럼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럼 다른 데 부르든지.”
가령 그럴 기회가 생긴다 해도 권성하는 누군가를 소개받거나 여자가 있는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전에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무얼 할 거냐는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나 일해.’
‘그날?’
‘어.’
‘이브 날은?’
‘그날도.’
‘원래 일 안 하는 날이지 않아?’
‘어. 근데 이번 방학 때 한국 안 나가니까 바쁜 날은 다 나가기로 했어.’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슨데, 문득 궁금함이 들었다.
‘넌 누구 안 만나?’
‘누굴 만나? 일한다니까.’
‘아니. 만나는 사람 없냐고.’
‘아……. 옆에서 제일 자주 보면서 뭘 물어. 없어, 그런 거.’
‘왜 안 만나는데.’
만나고자 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권성하는 내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돈 낭비잖아. 연애 같은 건.’
아마 그게 내가 권성하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선한 얼굴에서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이었다.
쓸데없는 농담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늦은 점심은 끝이 났다. 15분 떨어진 볼링장까지는 내 차를 두고 권성하의 차를 타고 갔다.
차에 타자마자 전화가 왔다. 조용한 차 안,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렸다.
“받아, 그냥.”
“됐어.”
“아까 가게에 있을 때도 계속 왔잖아. 여기서 통화하기 그러면 밖에서 하고 와. 아직 출발 안 했어.”
“받으면 길어질 거야. 나중에 통화해도 되니까 그냥 출발해.”
전화를 받는 대신 친구와 있다고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계속 오던 전화가 오진 않았지만 곧바로 문자가 왔다.
여보♡: [넌 이럴 때도 친구를 만나?]
여보♡: [대단하다 강세현]
“하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 세울까?”
차는 이제 막 주차장을 빠져나와 로컬로 들어섰다.
“아니. 됐다니까.”
“말은 됐다는데 얼굴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만, 이번엔 좀 오래 간다.”
“이제 사흘짼데 무슨 오래야.”
“사흘이면 오래지. 원래 하루면 화해했었잖아. 지금까지 중에 가장 긴데?”
화해라는 말은 무조건 싸움을 전제로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이 상황을 만든 당사자뿐 아니라 지켜보는 제삼자도 지금 이 상황을 헤어짐이 아닌 싸움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흘 전 나는 분명 헤어짐을 통보받았는데.
애초에 받아준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거였다. 어차피 받아줄 거면 빨리 받아주라는 말.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째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과연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게 옳은 건지 계속 의심이 들었다.
“강세현.”
권성하가 이렇게 나를 부를 때는 꼭 궁금한 걸 물을 때였다.
“너 지금껏 사귄 사람이 지금 여자친구뿐이랬지?”
“어. 왜.”
“그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지금 여자친구가 네 이상형에 가까워?”
“몰라.”
“왜 몰라?”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처음부터 옆에 있었고, 그게 당연했고, 계속 함께 있길 바랐다. 연인이 된 후에도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해 본 적 없으니 이상형 따위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그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어. 뭔데.”
“넌 왜 전부터 궁금한 걸 늘 나중에 물어볼까.”
권성하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런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몇 번의 진동이 더 울렸다. 아예 전원을 꺼버릴까 하다가 핸드폰을 꺼내는 것조차 싫어 말았다. 복잡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볼링은 무슨. 술이나 한잔 마시고 싶네.
“볼링 끝나고 따로 뭐 한다는 말 없었지?”
“어. 왜?”
“술 마시려고.”
내 말을 들은 권성하는 몇 초간 생각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오든가. 여기서 가깝잖아.”
“술은 있어?”
“가다가 사서 가지, 뭐. 맥주 몇 캔 남았을 텐데 어차피 더 사야 돼.”
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그사이 놀랄 만큼 모든 게 그대로였는데 단 몇 가지 변한 게 있다면 권성하와 나의 관계, 그리고 한국에서만 마실 수 있었던 술을 이제는 미국에서도 마실 수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