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나, 준성 형, 그리고 제이슨 형이 한 편을 먹고 3대 3으로 나눠서 한 볼링 내기에서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우리 팀이 승리했다. 제일 잘하는 기현 형이 오늘따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두 게임까지가 적당했던 것 같은데 세 번은 해야 한다고 우기던 기현 형은 나와 정우 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 기어코 세 번째 게임을 시작했다. 세 번째 역시 우리 팀의 승리였다. 첫 번째 진 팀이 게임비를, 두 번째 진 팀이 술을, 세 번째 진 팀이 피자를 사기로 했으니 결국 상대 팀이 모든 걸 내야 했다.
계속 다시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기현 형을 말리고 나왔을 때는,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다른 약속이 있는 준성 형을 제외하곤 전부 권성하의 아파트로 가기로 했다.
“술은 나랑 세현이랑 사서 갈게. 너희는 먼저 가서 피자 시켜. 아니면 가다가 픽업해서 가든지.”
“알았어……. 성하야, 피자는 그냥 형이 살게.”
“그래. 넌 원래 술값까지 다 내야 돼, 인마.”
“알아, 안다고…….”
공을 두 번이나 레인 옆으로 빠트린 기현 형은 한껏 풀이 죽어있었다. 누가 봐도 오늘 패배의 원인은 형이었다.
“아. 너 차는?”
“정우 형 차 타고 먼저 마트 갔다가 찾으러 갈 거야.”
“이렇게 오래 세워둬도 되나.”
“이미 늦었으니까 괜찮겠지. 이따 보자.”
멀지 않은 대형 마트에 들러서 장을 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술과 음료, 그리고 몇 가지 스낵 종류만 사서 빠르게 계산을 하고 나왔다. 권성하의 걱정과는 달리 내 예상대로 차는 그 자리에 있었다.
“가서 보자.”
나를 내려다 준 형의 차가 먼저 출발하고, 뒤이어 따라가려고 차에 타자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피커에서 커다란 벨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이 상황에 하트라니. 저걸 진즉에 바꿨어야 했는데. 커다란 화면에 뜬 글자를 보자 짜증이 났다.
시동을 건 채 그 자리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말해.”
- 이제야 전활 받아?
“내가 친구랑 있다고 나중에 연락한다 그러지 않았나.”
- ……하. 너 진짜. 뭐, 친구? 이 상황에서 친구를 만난다고? 너는 나랑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지?
상대가 불같이 화를 낼수록 상대를 향한 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차효민.”
상대는 성이 딸린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연인이 된 이후 한 번도 부른 적 없던 세글자를 입에 담자 쉴 틈 없이 쏘아대던 이가 조용해졌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 말대로 우리 헤어졌어.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걸 내가 꼭 받아줘야 해?”
- …….
“헤어지자고 한 건 너야.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건 나고. 그런데 왜 내가 네 허락을 맡고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 …….
“나한텐 너랑 통화해야 할 의무 없어. 전화를 받아 준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한참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마디는 ‘강세현’이었고, 이어진 말은 ‘너 말 다 했어?’였다. 울먹임이 여기까지 들리는데도 상대는 끝까지 숨기며 자존심을 내세웠다.
-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고 몇 번 했는지 알아? 그렇게 사과까지 했는데도 무시한 거 너잖아.
“그러니까 내가 그 사과를 왜 받아줘야 하냐고.”
- 그건, 당연히-
“당연하다는 말, 하지 마. 너한텐 당연했던 일이 나한텐 한 번도 당연했던 적 없으니까.”
상대는 한 번 더 침묵했다. 그리고 몇 초 후 그 어느 때보다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 너 정말 화났구나.
순간 잠시 생각이 멈췄다.
화? 지금 이 상황을 화났다고 표현하는 게 맞나.
이제야 내가 진심으로 화났다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은 아예 장난이라고 생각한 걸까.
여태껏 싸움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이제 정말 끝내고 싶어서 헤어짐을 앞두고 있는데, 상대는 이제야 이걸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병신 짓을 한 거야.
“잘 들어. 난 한 번만 말할 거니까.”
- ……뭘?
긴 인연이었다. 하지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정을 자르는 건 한순간이었다. 수십 번 들었던 말을 내가 직접 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 * *
“왜 이렇게 늦었냐?”
장장 한 시간에 가까운 통화를 끝내고 권성하의 아파트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익숙한 실내에는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돌아가고 있었다.
“와서 앉아. 네 잔 꺼내놨어.”
권성하의 아파트는 자주 오진 않지만 올 때마다 이상하게 편했다. 다소 좁은 느낌은 있지만, 그래서 더 아늑했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거실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은 가득 차 있지만, 처음에는 텅 비어있어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았었다. 한쪽 벽에 자리한 민트그레이 소파와 작은 원목 테이블은 내가 선물한 것이었다.
부엌 옆쪽으로 걸음을 옮겨 둥그런 식탁에 앉았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이 식탁이었다.
권성하는 내가 앉자마자 빈 잔을 가리켰다.
“뭐 마실래? 맥주?”
“아무거나 줘.”
새하얀 손이 갈색 병을 집어 들었다. 곧이어 잔이 채워지자마자 바로 들이켰다. 차가운 맥주로도 갈증이 다 가시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닥을 보인 잔을 내려놓자 이번에도 역시 권성하가 잔을 채웠다. 평소라면 좀 천천히 마시라는 친절한 말이 따라올 텐데 오늘은 없었다.
“세현이 너, 한국 갔다 온 얘기 좀 해 봐.”
한 손에 맥주를 병째 든 채 피자를 먹던 제이슨 형이 불쑥 말을 꺼냈다.
“얘? 어차피 아버지 사업 도와드리고 왔겠지. 맨날 똑같은 말만 해서 들을 것도 없어. 그래서 아무도 안 묻는 거 모르냐?”
“이번엔 다를지도 모르잖아.”
“안 다를걸? 세현이 너 말해 봐, 이번엔 가서 뭐 했냐?”
“일. 그게 다야.”
“그래. 그게 다겠지. 들었지? 재미없는 거.”
평소와 다름없는 술자리였다. 편안하고 즐거운. 이미 수십 번 헤어져 봤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조금 전 있었던 일이 내 일상에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영화에서 나오는 연인들처럼 평범하게 사랑에 빠져 뜨거운 사랑을 하고 아픈 헤어짐을 맞이하는 그런 과정 중 단 하나도 제대로 해 본 게 없었다. 시작부터 사랑에 빠지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을 하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상대는 그랬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겐 헤어짐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담담해서, 우스울 정도였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운전을 해야 하는 정우 형을 제외하고는 술을 꽤 마셨다. 평소보다 빠르게 술잔이 비어가고, 한 병, 두 병, 빈 병이 늘어날 때마다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시원한 에어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미뤄뒀던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일어났다. 베란다로 나가자 밖은 열대야였다. 밤에도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영 담배가 썼다. 인상을 쓰고 있는데 뒤늦게 권성하가 나왔다.
“아까 네가 물어봤잖아.”
“뭘?”
“이상형.”
“어. 왜?”
“생각해 봤는데.”
권성하의 눈이 커졌다.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갑자기 뜬금없잖아. 네가 그런 지나가는 말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고.”
“그런가.”
“내가 아직도 너한테 놀랄 일이 남았다는 게 놀랍네.”
권성하는 한숨이 섞인 웃음과 함께 의미 모를 말을 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걸 말해 봐.”
“다른 건 없고. 그냥 잘 맞았으면 좋겠어.”
“뭐…… 취미 같은 거?”
“글쎄. 그냥 다.”
“그냥 다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데. 음악, 영화, 음식, 그런 거 다 맞으려면 다시 태어나도 못 만날걸. 대단한 건 아니지만 쉽진 않지.”
사실 그중 하나만이라도 통하면 괜찮았다. 지금까지 전부 상대를 맞춰왔다면, 이제 단 하나라도 공감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지금껏 내가 했던 게 과연 연애였나, 그런 의심이 생겼다.
“그러면 그냥 술 한잔 같이 마실 수 있으면 돼.”
권성하는 이번에도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선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것도 쉽지 않은데.”
“그건 왜.”
“너랑 같이 마시는 거 쉬운 일 아니다. 술도 적당히 잘 마셔야지.”
그 말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러는 넌? 얼마나 쉬운 조건인지 들어보자.”
“나? 음…….”
“너도 바로 대답 못 하네.”
“내 조건도 쉽진 않아서.”
“나한테 뭐라 그러더니. 그래서, 뭔데?”
권성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부자.”
“뭐?”
“부자라고, 내 이상형. 돈 많은 사람이 좋아.”
“하.”
연애 같은 건 돈 낭비라고 했으니 이상형이 부자라면 상당히 일관성 있는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권성하의 입에서 이런 현실적인 말이 나오는 건 어색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여자에게 다정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돈 많은 사람이 좋다니.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해 놓고 막상 사랑에 빠지면 이 세상 누구보다 열정적이지 않을까, 하는.
대체 네가 사랑하게 될 사람은 누굴까.
“그런 점은 정말 의외야.”
내 말을 들은 권성하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너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