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권성하
강세현이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난 방금 그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진짜 헤어졌대?”
“그렇다니까. 이번엔 세현이가 헤어지자 그랬대.”
“언제?”
“우리 개강 전에 볼링치고 술 먹었던 그 날.”
이 망할 자식이.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이상형 같은 걸 말하길래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그저 여자친구와 좋지 않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뭐야, 2주 전이잖아. 그러면서 여태까지 말도 안 했어? 성하 넌 알고 있었냐?”
“아니요.”
“웬일로 성하 네가 몰랐어? 너한테도 말 안 했어?”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게 되자 괜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소식을 전한 사람이 아무리 친한 형들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형들이 내게 소식을 먼저 물을 정도로 강세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었다.
2주 전이면 그동안 말할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주중에는 일하는 날을 제외하곤 거의 강세현의 집에서 공부하거나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주말마다 같이 술을 마셨다. 주말에도 뉴욕을 가지 않는 건 단지 개강 후 바빠서겠지 싶었는데, 헤어졌으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나 바본가?
“에이, 다시 붙을 줄 알고 말 안 한 거 아냐? 지금까지 맨날 그랬잖아. 세현이가 헤어지자 했다고 뭐 다르겠어? 어차피 지금껏 받아줬는데.”
“흠…….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절대 아닐 것이다.
강세현이 지금까지 여러 번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건 맞지만, 본인이 이별을 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강세현이라면 스스로가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무르지 않을 것이므로 이번에야말로 진짜 이별이었다.
금요일이라고 신난 형들이 기숙사 파티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문자를 보냈다.
나: [너 여자친구랑 헤어졌어?]
몇 초 후, 답장이 왔다.
강세현: [어]
짜증 날 정도로 짧고 간결한 답장이었다.
나: [왜 말 안했냐]
강세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럴 줄 알았다. 거의 5년을 사귄 사람과 헤어지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을 텐데 분명 강세현이라면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 [일단 이따 만나서 이야기하자]
강세현: [이번주엔 안온다며]
아. 맞다.
내가 생각해도 근래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아서 이번 주말에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강세현이 왜 주말까지 만나자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주말 약속을 취소한 게 미안해졌다. 그래도 내가 지금은 강세현의 하나밖에 없는 친군데.
나: [생각이 바꼈어]
나: [그러니까 술이나 준비해놔]
강세현: [뭘로]
나: [아무거나]
나: [안주는 가져갈게]
강세현: [알았어]
평소와 똑같은 메시지인데도 갑자기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분명 뚱한 얼굴로 액정을 두드리고 있을 게 뻔한데 자꾸만 머릿속에서 풀이 죽은 얼굴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강세현이 상상됐다.
그날 밤, 강세현의 집으로 가기 전 나름 여러 가지 고민을 했다.
누가 헤어지자고 했건 오랜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그 빈자리가 클 텐데 그런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해 줘야 할지 한참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차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함께 술을 마셔 주는 것밖에 없다는 깨닫고 적어도 말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뚜르르- 뚜르르- 툭.
- ……어.
“잤어?”
- 아니, 운동.
“이 밤에?”
- 어.
원래 강세현은 운동을 좋아한다. 그런데 별다를 것 없는 운동이라도 갑자기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신경이 쓰였다.
가령 너무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지 않는다든지,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다든지. 모든 게 헤어짐으로 연결됐다.
- 끝났어?
“어. 나 지금 출발.”
- 알았어.
“괜찮아?”
- 뭐가.
“아, 나 지금 가도 괜찮냐고. 너 안 피곤한가 싶어서.”
- 갑자기 왜 그런 걸 따져. 지금까지 잘만 와놓고.
“그렇긴 한데, 목소리가 피곤한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 피곤한 게 아니라 운동했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서 와.
가게에서 대략 35분. 강세현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건물 앞에 도착하자 원래라면 입구에서 막아서는 관리인이 알아서 문을 열어주었다. 예전엔 올 때마다 게스트 확인을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문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적어도 두세 번씩 와서 자고 가니 거의 이곳에 사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게 당연했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시동을 걸어놓고 차에서 내리자 멋진 유니폼을 입은 관리인이 다가왔다. 세 명의 주차 관리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마이클이었다. 원래 차분한 편인데 오늘따라 어딘지 모르게 허둥대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분위기가 좀 어수선하네요.]
[아, 조금 전에 작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소동? 취객이라도 찾아왔나? 이렇게 늦은 시간 떠올릴 수 있는 건 술에 취한 불청객 정도밖에 없었다.
[괜찮나요? 당신 표정이 아직도 안 좋아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미스 한 분이 출입을 막았더니 화가 나셔서……. 그래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마이클은 친절하게 입구 문을 열어 주었다. 이것만큼은 언제 와도 적응되지 않았다.
입구로 들어가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총 세 개의 엘리베이터 중 맨 왼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서둘러 버튼을 누르자 다행히 막 올라가려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 있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 미치겠네.
서서히 열린 문 안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상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사진으로 수십 번은 봤던 얼굴이었다.
강세현 핸드폰 배경화면에 있는 사진을 수차례 봤지만 역시 실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2년 전에 한 번 봤던 외모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여전히 예쁘고 매력적이었다.
띵-.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24층에 도착했다. 이제 어떡하지, 아주 잠깐 고민하는 사이 상대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또각또각, 높은 하이힐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당연히…… 강세현을 만나러 왔겠지? 연락하고 온 건가? 설마, 연락하고 왔겠지. 근데 강세현은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지? 여자친구 온다고 말하면 안 왔을 텐데.
강세현의 여자친구, 아니, 전 여자친구는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아주 천천히, 되도록 멀리 떨어져 걸었다. 앞서간 상대가 문 앞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삐- 삐-.
문이 열리는 경쾌한 알림음 대신 오류를 알리는 경고음이 들렸다.
“……하. 미친.”
동시에 상대의 화난 목소리도 들렸다.
누가 봐도 미리 연락하고 온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걸음을 멈추었을 때, 이번에는 딩동, 딩동, 시끄러운 벨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벌컥-.
“비밀번호 잊어버렸어? 지난번에-”
문을 연 강세현은 말을 하다 멈추었다. 반듯했던 이마가 완전히 구겨졌다. 그리고 뱉은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뭐야, 너였어?”
그 말을 들은 상대의 얼굴 역시 단번에 구겨졌다. 곧 엄청난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너-”
“늦은 시간이라는 걸 생각해서 목소리 낮춰.”
“뭐?”
“너 집안으로 들일 일 없으니까 복도에서 싸우다 신고당하기 싫으면 목소리 낮추라고.”
와. 진짜…… 싸가지 없다.
물론 강세현이 싫은 사람에게 얼마나 차가운지는 알고 있었지만,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에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거기다 상대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나도 놀랄 정도인데 직접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더 큰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세현은 너무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왔어?”
방금 그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오면 들어오지, 왜 그러고 있어.”
“……아. 어, 그래야지.”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여기 있는 건지 후회스러웠다. 5분이라도 더 빨리 출발하거나 늦게 출발할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칠 것 같았다.
“나 일단 담배 좀 피우고 올게.”
“그럼 같이 가.”
“어?”
“같이 가자고.”
“아냐. 혼자 갔다 와도 돼.”
“어차피 나도 피우려고 했어. 같이 내려가.”
싫다고, 미친놈아.
강세현은 뻔히 내가 자리를 피하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일부러 내가 이러는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결국, 직접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넌 좀 참았다 나중에 펴. 그리고 이야기 다 나누면 연락해.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까.”
“됐어. 네가 왜 가. 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해결해야 할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세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하……. 내가 어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