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러면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이야기해.”
“그러니까 너 들어오라고 했잖아.”
“나만 들어가면 되겠냐, 지금? 같이 들어오시라고 해. 벌써 12시야. 여기 복도 엄청 울려서 작게 말해도 다 들려. 이웃에 민폐 끼치지 말고 제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한숨을 내쉰 강세현은 그제야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제발이라고 말한 게 먹힌 모양이다.
강세현이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쓱 쳐다보곤 휙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나도 들어는 가야 할 것 같아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냉랭했다. 나는 곧장 게스트룸으로 들어갔다.
“쟤야? 네 잘난 친구가?”
문을 닫기도 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그리고 더 살벌한 말이 따라왔다.
“미리 말하지만 말 가려서 하는 게 좋을걸. 전처럼은 못 참아 줄 테니까.”
두 사람이 거실에 있는 동안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엿들을 만큼 양심이 없진 않았다. 그런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간중간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내가 왜 그랬는지 궁금하진 않았어?”
“헤어지자고 하는데 다른 이유가 뭐가 있는데.”
“그게 내가 네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었어. 내가 진짜 헤어지고 싶어서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사실 너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헤어지자는 말에 한 번이라도 싫다고 한 적 있어?”
“그래서 네가 잘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내 탓을 하고 싶은 거야.”
“…….”
“어떤 이유를 대도 결과는 똑같아. 어차피 앞으로도 그런 말 못 해 줄 거니까.”
처음 강세현을 만난 날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그는 무뚝뚝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건너편 연인에게 달콤한 말을 해 줬었다.
그때의 강세현과 지금 강세현이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그만큼 강세현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냉정했다.
무슨 기분일까.
문득 상대의 심정이 궁금했다. 그렇게 다정하기만 했던 연인이 한순간에 차갑게 변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하고.
아마도 상처받겠지. 좌절감이나 후회가 들 수도 있고. 그래도 가장 큰 건 아무래도 원망이지 않을까.
“이럴 거면 왜 지금까지 받아 준 거야?”
“그럼 받아 주지 말걸 그랬나.”
“너 진짜-”
“그래서 이제 안 받아 주려고. 귀찮아서.”
매몰찬 놈.
하지만 강세현의 기분도 이해가 갔다. 매번 싸울 때마다 지쳐가는 걸 옆에서 다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강세현이 지금껏 상대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남자인데도 상대가 부러울 정도였으니까.
“나쁜 새끼.”
“그렇게 말해서 기분 풀리는 거면 얼마든지 해.”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를 보는 방으로 들어가는 건데. 거실과 가까운 게스트룸은 생각보다 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생각해보니 웃긴 상황이었다. 이 새벽에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잘못이라곤 해도 어쨌든 지금 가장 바보 같은 건 싸우는 연인을 피해 방에 숨어있는 나였다.
이래서 그냥 가겠다고 한 건데.
몇 번의 큰소리와 고함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어색하게 침대에 앉아 인터넷 기삿거리를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똑똑-.
“어.”
조심스레 열린 문틈으로 강세현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나와.”
“끝났어?”
“어, 곧 갈 거야. 그러니까 나와.”
“……아니, 간다고? 이 시간에?”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뉴욕에서 온 거 아냐?”
“맞아.”
“그런데 이 시간에 어딜 가.”
“야, 강세현-”
때마침 나타난 상대가 불쑥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와 마주하고 있던 강세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정말 그냥 가라는 거야? 이 새벽에 어떻게 하라고.”
“일부러 새벽에 왔으면서 뭘 어떡해.”
툭, 던진 말에 상대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사귈 때나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알아주지 그랬어.”
아, 방금 건 좀.
강세현이 당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데. 하마터면 내가 나서서 그렇게 말할뻔했다.
강세현은 상대의 말을 무시한 채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사 온 건 어쨌어. 안주 사 온다며.”
“여기.”
“부엌에 갖다 놓지. 그러게 왜 여기 있었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냐.
“잠시만, 잠시 따로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잠깐이면 돼.”
방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몸을 잡아당기자 긴 다리가 쉽게 움직였다. 방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강세현.”
“……왜.”
한 박자 늦은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이 시간에 그냥 보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뉴욕으로 돌아갈 것도 아니잖아. 일단 잠은 자야지.”
“그래서 가라고 했잖아. 바로 옆이 호텔이고 택시 타면 5분도 안 걸리는데 뭐가 문제야.”
“아니, 거리를 따지자는 게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호텔 층 하나도 빌릴 수도 있는 애야, 쟤.”
“지금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그럼 뭔데. ”
“그래도 혼자 이 시간에 택시 태워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택시라고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여기서 재우라는 거야?”
조금 전 일부러 새벽에 왔을 거라던 강세현의 말이 떠올랐다. 강세현은 정말 싫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강세현의 전 여자친구와 이 집에 같이 있는 건 나도, 강세현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네가 데려다 줘.”
“내가 왜.”
“네 말대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잖아. 두 사람이 어떻게 헤어진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만났으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냐. 어?”
“…….”
“날 봐서라도 그렇게 좀 해 주라. 부탁할게. 그래야 내가 맘 편하게 술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강세현은 대답 없이 돌아섰다. 그렇다는 건 결국 내 부탁이 또 한 번 통했다는 걸 의미했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거실로 나갔다. 사 온 안주를 부엌 선반 위에 올려다 놓으려고 지나가는데 현관에 서 있던 강세현이 나를 불렀다.
“성하야.”
조금 전과 같은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다정한 말투였다.
“금방 올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졸리면 좀 자고.”
강세현의 뒤에 서 있는 이가 나를 노려봤다. 나는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중간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대답을 안 해?”
“어? 어. 그래. 잘 갔다 와라.”
따가운 시선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따라왔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실제로 쫓아낸 건 내가 아닌데 마치 그런 것 같고,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방해한 사람도 나인 것 같았다. 흡사…… 강세현의 새로운 연인이 된 기분이었다.
* * *
괜한 걱정이었다.
강세현의 집으로 가기 전에 했던 여러 가지 고민은 애초에 할 필요 없었다. 오랜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생길 빈자리 따위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우는 역할이 전부 내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거의 매일 오가며 보던 얼굴을 배는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왔어?”
금요일 밤 11시 38분. 정신없이 바빴던 일을 끝내고 아파트에 도착하자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이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강세현은 티브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영화를 검색하고 있었다.
“씻고 나와. 나초랑 맥주 사 왔어. 네가 좋아하는 감독 이번 영화 재밌대.”
금요일엔 우리 집, 토요일엔 강세현의 오피스텔, 그리고 주중엔 수시로 왔다 갔다. 딱히 무얼 하자고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지내게 된 게 벌써 3주째였다.
이 정도면 진짜 새 애인 아냐?
욕실로 들어가는 입구 세면대에서부터 내 것이 아닌 물건들이 보였다. 그리고 욕실 내에는 내가 사놓지 않은 새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서랍 안에도 샴푸, 바디워시, 이런 것들이 내가 쓰던 브랜드 그대로 뜯지 않은 게 두세 개나 들어있었다. 강세현은 내가 자신의 빈 시간을 채워주는 데에 대한 보상처럼 올 때마다 뭘 자꾸 사 왔다.
그나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 집들이 선물로 소파를 보냈을 때도 놀랐지만, 얼마 전엔 티브이를 보냈다. 지금 거실에 있는 티브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가자 강세현은 딱 맞는 타이밍에 맥주를 꺼내왔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노란 치즈와 살사 소스가 올려진 나초가 준비되어 있었다.
샤워 후 마주하는 시원한 맥주와 그에 어울리는 안주. 거기다 좋아하는 영화까지. 한마디로 완벽했다.
“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맥주를 내미는 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자 잘생긴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왜 설레고 난리.
인간적으로 저 정도 외모에 이 정도 정성이면 안 설레는 게 이상한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이해시켰다.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서운해할 사람은 강세현이 아니라 나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