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강세현이 토라졌다.
그래, 토라졌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화가 난 건 아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주 약간 비뚤어졌다.
강세현: [어디야]
나: [아트뮤지엄]
강세현: [그런거 싫어하잖아]
나: [소라가 좋아해서]
강세현: [아예 사귀지 그럴거면]
이렇게 된 건 소라가 오고 난 후부터였다.
처음에는 그저 내 관심이 지나치게 소라에게로 쏠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솔직히 강세현 성격에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했다.
늘 무뚝뚝한 강세현에게도 이런 어린 애 같은 부분이 있구나, 놀랍기도 하고 좀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형들을 만나고 나서야 그런 이유가 아닌 걸 깨달았다.
형들은 만나자마자 소라와 내 사이를 의심하고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세현은 그때부터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내가 소라를 그저 친구라고 하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듯했으나 마지막에 따로 온 정우 형이 또 우리를 커플로 엮자 다시 짜증이 났다.
전에 농담으로 내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우는 거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더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울지 않고 짜증을 낸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어쨌든 싫어한다는 건 틀림없었다.
강세현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어쩌면 나도 서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대체 이게 20대 건장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강세현의 심기가 불편하다. 그리고 난 그걸 또 달래겠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 [소라 미술 전공이라서 예전부터 여긴 꼭 오고싶어했어 나도 억지로 끌려온거야]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강세현: [언제 끝나는데]
아. 풀렸다.
다행히 이런 게 오래 가진 않았다. 내 한마디면 또 금세 다시 쿨한 강세현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진짜 쿨한 성격이었으면 이런 거로 짜증 나진 않았겠지만.
대체 왜 싫은 거지. 본인이 연애에 질렸으니 나도 하지 말라 이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 부러워할 것 하나 없는 강세현이 내게 여자친구가 생기는 걸 반대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고선 특별히 소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데 소라에게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절대 그 이유는 아니었다.
강세현: [점심 같이 먹어]
강세현: [시카고 피자 사준다고 해]
만약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소라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직접 밥을 사 준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마 두 번째 만남조차 없었겠지.
소라는 강세현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소라 역시 강세현을 실제로 만나본 후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까칠하다더니 안 그렇던데? 매너 좋고 예의 바르더라. 좀 무뚝뚝하긴 해도 그건 이미 너한테 들은 거고. 솔직히 잘생기고 돈 많다는 소리 듣고 좀 재수 없을 줄 알았는데 괜찮았어.”
그렇기야 하지. 그래서 나도 놀랐으니까.
형들과 자주 가는 피자집은 다운타운 안에 있었다. 길가에 주차를 해 놓고 안으로 들어가자 고소한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들어가자마자 못 보던 얼굴이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마지막으로 온 게 두 달 전이었는데 그사이 새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온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안에 일행이 있을 텐데….]
[아! 저쪽에 계세요.]
예상대로 먼저 도착한 강세현이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늘 먹던 거로 주문을 하고 20분쯤 지났을까, 직원이 속이 꽉 찬 딥디쉬 피자를 내어왔다. 자그마한 사이즈를 보고 이걸로 되겠냐고 웃던 소라도 한 조각을 먹어 보곤 포만감에 혀를 내둘렀다.
“나 화장실 좀.”
식사가 나오고 나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차피 소라 성격이라면 강세현과 둘만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자리로 다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한참 이야기 중이었다. 소라는 멀리서도 신나 보였다.
“응. 그때 꽤 많았지.”
“그래?”
“아마 한 번씩은 다 노려봤을걸.”
무슨 얘기지?
두 사람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내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성공한 사람은?”
“있어, 한 명.”
“……한 명?”
“응.”
“사귄 건 아니고?”
“사귀진 않았어. 아주 잠깐 만나는 것 같더니 말더라. 근데 그 후로도 졸업할 때까지 계속 봤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계속 연락은 할걸?”
“흠…….”
아주 잠깐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건 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야기가 이런 주제로 넘어온 건지 궁금했다.
“연락 안 해.”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마치 짠 것처럼 내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만난 거 아니라니까 왜 여기까지 와서 헛소문을 퍼트려. 밥 한번 먹은 걸 가지고.”
“에이, 절대 여지 안 주는 네가 따로 밥 한번 같이 먹었으면 만난 거지, 뭐.”
“사람 많은 곳에서 물어보는 바람에 거절을 못 했던 것뿐이야. 민망할까 봐. 근데 잠깐 만나긴 뭘 만나.”
내 정색에도 소라는 장난스레 웃었다. 오히려 이럴 때 진지한 건 강세현이었다.
“그렇게 물어보면 아무나 만나 주는 건가.”
“왜 또 그게 그렇게 되냐.”
“그러면 만약에 사람 많은 곳에서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냐고? 아니, 안 사귀어. 근데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나온 거야? 소라 네가 시작했어?”
“아니. 세현이가 먼저 물어봤어. 고등학교 때 성하 너 어땠냐고. 그래서 인기 많았다고 얘기해주고 있었지.”
그렇게 말한 소라는 피자 위에 핫소스를 마구 뿌려댔다. 강세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뚱해 보였다.
“너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전부터 궁금했던 거야.”
“그럼 그때 그냥 묻지 그랬냐. 나한테는 왜 궁금한 걸 늘 나중에 묻냐고 해 놓고, 너는 왜 그러는데.”
“야, 지금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러냐. 너한테 물으면 제대로 대답 안 해 줬을 거 아냐. 세현이도 그걸 알고 나한테 물은 거야. 또 뭐 궁금한 거 없어? 성하 울었던 얘기 해 줄까?”
그 후로도 소라는 재밌다는 듯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슬픈 영화를 보고 영화관에서 펑펑 울었던 일이라던가, 단골 쌀국수집에서 고수 많이 먹기 내기를 했던 일, 그밖에도 사람들이 나에게 지어 준 별명 따위의 소소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나쁜 소문 하나 없다고 성하를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
“뭔데.”
“그린벨트.”
“……하.”
“대박이지? 한국 사람 몇 없으니까 이런저런 안 좋은 소문 퍼지는 거 순식간인데 워낙 바르게만 살아서 퍼트릴 소문이 없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순수한 권성하를 지켜줘야 한다고 붙인 별명.”
분명 칭찬인데도 이상한 별명 때문에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런 나와는 달리 강세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솔직히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소문은 대부분 아는 사람이 퍼트리잖아. 그냥 작은 일도 사람들 입을 통해 와전되는 경우가 많고. 근데 성하는 쉽게 누굴 만나질 않아서……. 너도 알겠지만 얘 되게 쉬워 보이지만 은근 까다로워.”
“칭찬 다음엔 욕이냐.”
하지만 소라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싫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상대가 강세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세현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랑은 어떻게 친해졌네.”
“그렇지. 뭐, 어쩌다 보니.”
“근데 왜 사귀진 않았어?”
“서로 너무 이상형이 아니라서.”
소라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는 사람마다 물어봐서 수십 번은 했던 대답이었다.
“우린 절대 서로를 이성으로 좋아할 수는 없을걸. 일단 난 나쁜 남자를 좋아하거든. 알고 있는데도 참 안 고쳐져. 그래서 맨날 고생하지.”
사실이었다. 소라가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그렇게 아니라고 해도 매번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똑같은 후회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성하가 날 좋아하는 건 불가능해.”
“왜.”
“난 부자가 아니거든.”
강세현은 헛웃음을 한번 치곤 날 향해 물었다.
“농담 아니었어?”
“어. 아닌데. 그런 거로 농담을 왜 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일단 여유 없는 나와 연애를 하려면 상대가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진짜 돈만 많으면 돼?”
“어.”
“많다는 기준이 얼만큼인데.”
“음…….”
내게 이상형이라는 건 연애를 하기 위한 기준이기도 했지만, 하지 않기 위한 기준이기도 해서 그 수준이 평범한 부자보단 높아야 할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머릿속에 떠오른 숫자를 말했다.
“……50억 정도?”
옆에서 듣고 있던 소라가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부자치곤 좀 적은 거 아냐? 50억이면.”
“집안 돈 말고 지금 자기 앞으로 된 재산 50억.”
“헐. 미친. 너 몇 살 많은 사람 만나려고 그러냐. 아주 연애할 생각 없다고 써 붙이지 그래.”
어차피 당장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 만든 조건이니 어찌 보면 성공이었다. 지금 내게 연애는 사치 중의 사치였다.
굳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내겐 사랑이라는 환상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온종일 생각하고, 그 사람 때문에 애달고, 또 기뻤다가 슬펐다가. 한 사람 때문에 널뛰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되는 걸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감정조차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그게 잘된 일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있던 강세현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뭐야, 그것밖에 안 돼?”
나는 웃었고, 소라는 인상을 썼다.
“역시 재수는 좀 없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