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39화 (39/96)

#39

강세현이 이상하다. 많이 이상하다.

소라가 돌아가고 난 후, 더 이상해졌다.

“이제 넌 학교 옮길 때도 안 됐냐?”

월요일 오후 5시 45분. 강의를 끝내고 나가자 강세현은 떡하니 우리 학교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후드가 달린 재킷을 입고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모습이 영락없이 이 학교 학생 같았다. 나와 같은 강의를 듣고 나온 기현 형은 그런 그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너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는 거 맞냐?”

“어. 맞아.”

“우리 학교 말고 너네 학교.”

“맞다니까.”

“세현이 너 솔직히 말해봐. 성하 스케줄 맞춰서 강의표 짜는 거지? 아니고선 이렇게 딱 맞출 수 있다는 게 신기한데…… 너 이러다 학교 잘리는 거 아니냐?”

“그래도 내가 형보다 성적 좋을걸.”

“아씨…… 나 상처받았어.”

“웃기지 마.”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새 날이 더 추워져 바람이 많이 차가웠다. 올해는 좀 늦게 추위가 오는 것 같아 방심하고 얇게 입었더니 몸에 한기가 들었다.

거의 꽁초만 남은 강세현 옆에서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나를 본 강세현도 피우던 담배를 끄고 새 담배를 꺼냈다.

“후우…….”

속을 채우는 메케한 담배 연기가 더 반가워지는 건 겨울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걸 의미했다. 올해는 또 얼마나 추우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 너머에서 인사를 했다.

[안녕.]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같은 강의를 듣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불 좀 빌려줄래?]

상대는 내가 들고 있는 담배를 가리켰다. 나는 주머니에 방금 넣었던 라이터를 다시 꺼냈다.

[여기.]

그리고 건네려는데 상대가 손대신 고개를 가까이했다. 담배에 직접 불을 붙여달라는 뜻이었다. 친하지 않은 사이에 이런 식으로 불을 붙여주는 건 어색해서 조금 멍하게 있다가 손을 내밀었다. 짤막한 금빛 머리카락이 불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불을 붙여주었다.

[고마워. 다음 강의 때 보자.]

나를 향한 눈인사가 조금 과했다. 누가 봐도 호감을 표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상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상대는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쟨 뭐야.”

왜 그 소리가 안 나오나 했다. 옆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긴. 성하한테 말 한번 붙여보고 싶은 놈이지. 하여간 우리 성하는 어딜 가나 인기인이야. 국적 불문, 나이 불문, 이제는 남녀불문.”

형은 방금 떠난 남자애를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내 등을 툭 치며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

“별로 신경 안 써요.”

“진짜? 기분 안 나쁘냐?”

“뭐, 그닥. 몇 번 있었어요. 뉴욕에서는.”

몇 번이 아니라 흔히 있던 일이었다. 타임스퀘어 근처에서 일할 때는 많게는 하루에 세 명이나 번호를 주고 간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간접적인 호감 표현은 놀랍지 않았다. 그보다 나는 내 옆에 누가 봐도 더 잘생긴 강세현이 있는데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여기저기 다 먹히는 얼굴인 것도 피곤하네.”

“감사하죠.”

“……크. 넌 정말, 정말 착한 놈이야.”

기현 형은 매번 지나치게 과장해 표현하지만, 오늘따라 더 심했다. 오전에 했던 프레젠테이션 결과 때문에 종일 들떠있어서 그런 듯했다.

“다 피웠으면 이제 가자. ……뭐 해.”

강세현은 방금 그 남자애가 간 방향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났다기보다는 좀 놀란 표정이었다.

“왜 네가 심각해. 별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나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이거 봐. 이상한 거 맞지?

소라가 가고 난 후 요 몇 주 동안 강세현은 종종 나를 이런 식으로 쳐다봤다.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혹은 담배를 피우다가, 심지어 영화를 보다가도 문득 고갤 들면 날 이렇게 보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혹시 무슨 일 있는 건지 물어보면 늘 아니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네 도서관에 있을 거지?”

“네.”

“그래. 그럼 난 연구동 들러서 교수님 좀 보고 갈게. 거기서 보자.”

기현 형과 헤어지고 난 후 우리는 곧장 중앙 건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가기 전 커피를 사기 위해서였다.

“날이 춥다.”

“이제 겨울이니까.”

“그러게. 벌써 11월이네. 좋으면서도 싫다.”

“싫은 건 뭔지 알겠는데 좋은 건 뭔데.”

“마지막 주가 땡스기빙1)이잖아.”

“어차피 그때도 일은 하면서 뭘.”

사실 휴식이 필요한 것도 맞지만, 그보다 연휴가 다가올 때의 분위기가 좋았다. 분주한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보이고, 곳곳에 걸린 푯말이나 플래카드에도 왠지 모를 애정이 넘쳐났다.

그런 거로 치면 난 겨울을 좋아했다. 11월에는 땡스기빙, 12월에는 크리스마스, 그리고 1월에는 신년이 있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같은 경우 빠르게는 11월 초부터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어 12월에 들어서면 곳곳이 장식으로 반짝거렸다.

“올해는 트리를 사 볼까.”

내 중얼거림을 들은 강세현은 티가 나도록 놀랐다.

“갑자기 왜.”

“그냥.”

소파, 거실 테이블에 이어 티브이까지 갖춘 거실은 이제야 정말 사람 사는 곳 같았다. 언제까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정을 붙이지 않으려 했던 집에 점점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벽에 거는 시계를 하나 살까, 작은 스탠드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혼자 있을 땐 몰랐는데 최근 들어 강세현과 함께 있으면서 더 그런 욕심이 생겼다.

“사 줄까?”

“됐어. 내가 살 거니까 참아주라. 이번에는 무슨 핑계로 사 주려고 그러냐. 소파는 집들이 선물, 거실 테이블은 이사 1주년 선물, 티브이는 2년 재계약 선물. 이번엔 뭔데?”

“……생각해 볼게.”

“거기서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 왜 나와. 애초에 이사 1주년을 챙기는 것도, 아파트 재계약을 기념하는 것도 어이가 없구만.”

나는 심각한데 강세현은 웃었다. 오늘따라 잠을 설쳐서 안색이 영 좋지 않은데도 웃는 모습이 그 누구보다 상큼했다. 오늘도 좀 얄밉고, 오늘도 좀 재수 없었다.

블랙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커피가 나올 동안 그 앞에 서서 기다렸다.

“그럼 같이 사러 가. 언제 갈 건데.”

“블랙프라이데이2)에.”

조금 전 웃던 강세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직 멀었잖아.”

“크리스마스는 더 멀었어. 거의 두 달 남았는데 뭐.”

“그래도 그땐 사람 너무 많아. 다른 날 가.”

“그날이 제일 싸.”

“크리스마스 용품은 어차피 지금도 세일 해.”

“간 김에 시계랑 스탠드도 좀 보려고 그러지.”

“……그냥 내가 사 줄게.”

“네가 그걸 왜 사 줘. 싫으면 가지 마.”

“그럼 누구랑 가게.”

그러니까 그걸 왜 내가 너한테 말해 줘야 하냐고.

캠퍼스 중간에 서서 사 주니 마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여기서 누구랑 가는 거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 나오는 게 이상했다. 트리 하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나는 누구랑 좀 가면 안 되냐?”

“어. 안 돼.”

“왜?”

“…….”

“다른 사람은 왜 안 되는데.”

“그냥 싫어.”

그러니까 그게 왜 싫은데.

딱 오해하기 좋은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안 된다. 다른 사람이랑 가는 건 싫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지금 강세현이 싫은 이유가 트리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트리를 사든, 스탠드를 사든, 하물며 연필 한 자루를 사도 강세현은 지금처럼 싫다고 말했을 것이다.

너 그거 이상한 독점욕이야, 인마.

한마디 해 주려다 말았다.

원래 안 그러던 놈이 이러니까 더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단지 심심해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여자친구에게 신경 쓰던 만큼 비는 시간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강세현은 원래 혼자서도 잘 지내던 녀석이었다.

진짜, 어딘가 이상했다.

“야, 강세현.”

“어.”

“너 헤어진 지 두 달쯤 됐잖아.”

“그래?”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 같은 무심한 말투였다.

“혹시 그 후로 또 연락 안 왔냐?”

“안 왔어.”

“연락 와도 다시 만날 생각은 없고?”

“없어.”

강세현은 매우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긴 다시 만날 거였으면 헤어질 때 그렇게 매몰차게 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그게 왜 궁금한데.”

“……음. 신경 쓰여서?”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왜. 왜. 왜.

오히려 왜냐고 묻고 싶은 건 나였다. 대체 넌 왜 그러냐고.

하지만 이게 다 네가 너무 심심한 것 같아서, 나한테 과하게 매달리는 것 같아 그런다고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네가 헤어지자곤 했지만, 오래 만났으니까 헤어지고 나서 좀 허전할 거 아냐.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던데, 연락 안 오면 이제 다른 사람 만나도 되지 않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다른 사람?”

“어. 당장은 아니더라도 관심 가는 사람 생기면.”

“흠.”

강세현은 의외로 내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사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직원에게 커피를 받아든 강세현은 한잔을 내게 건넸다.

“요즘 관심 가는 사람 없어.”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빼고.”

다음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이건 더 이상한데.

1) 미국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2) 땡스기빙 다음 날인 금요일로, 1년 중 가장 큰 폭의 세일시즌이 시작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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