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40화 (40/96)

#40

강세현

내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강세현.”

아니고선 고작 이름 한번 불린 것 가지고 이런 기분이 들 리 없다. 심장 한편이 툭, 떨어지고 갑자기 맥박이 상승하는 느낌.

“이거 봐. 이렇게 작은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어때? 그냥 선반에 올려놓으면 되고.”

권성하는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고작 40센티짜리 트리 옆에 서서 나를 불렀다. 많고 많은 것 중 가장 작은 나무였다.

“너무 작아. 이왕 사는 거면 더 큰 거로 해.”

“사는 데 의의를 두는 거지, 꼭 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너무 작아. 적어도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는 거로 하자.”

“그러면 이 건? 이 정도면 되겠지?”

오늘은 무려 40분이나 운전을 해 쇼핑을 하러 왔다. 기어코 블랙프라이데이에 쇼핑을 할 거라는 권성하를 말리고 말려 합의를 본 게 근교에 있는 아울렛에 오는 것이었다.

어차피 크리스마스에 미국에 있을지 한국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트리는 왜 사고 싶은 걸까. 이럴 때 보면 또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막만 한 얼굴이 요리조리 바쁘게 움직였다. 하얀색과 녹색 중 어떤 게 나은지 한참 고민하는 듯하더니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세현이 네가 골라봐.”

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이렇게 된 건 얼마 전부터였다.

‘다음번에 만나는 사람은 너랑 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전 여자친구가 갑자기 찾아온 날, 그녀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술 마실 때 권성하는 그렇게 말했다.

‘……욕이야?’

‘아닌데? 그게 왜 욕이야.’

‘그럼 무슨 뜻인데.’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차가웠는지 봤을 테니 나만큼 정 없고 무뚝뚝한 사람을 만나라는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다정하고 착한 사람 만나라고.’

‘내가 다정하고 착해?’

‘어.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아, 물론 애인 한정이지만.’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아니면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보고 싶다면 귀찮은 내색 없이 매주 만나러 가고, 떨어져 있을 땐 바람은커녕 그런 자리 나가지도 않잖아. 너만큼 성실한 놈이 어딨냐. 누구든 너만큼 최선을 다할 순 없었을걸. 내가 봤을 때 넌 할 만큼 했어. 나였으면 원망보단 감사했을 거다. 그 전에 너같이 아까운 놈이랑 헤어지지도 않았을 테지만.’

살면서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말을 다 들었다.

다정하고 착하다는 말. 다른 사람이었다면 입에 발린 칭찬이란 생각에 도리어 기분 나빴을 텐데 그 말을 한 사람이 권성하라면 달랐다. 설사 그것이 한순간의 위로여도 괜찮았다.

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다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남들처럼 사랑에 빠져 시작한 게 아니더라도 그 사람 외에 단 한 번도 다른 이에게 눈을 돌려본 적 없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듣고 싶었나?

그제야 내게도 쉽지만은 않았던 이별이 그런 식으로 마무리되길 바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 다정하고 착하다는 것을.

다음에 만날 사람은 너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때부터였다. 별거 아닌 문자도 더 반갑게 느껴졌고 매일 보던 얼굴을 마주하는데 괜히 설렜다. 이전과는 뭔가 달랐다. 의식하고 나니 말, 행동, 그리고 생각까지 신경 쓰였다.

권성하는 이럴 때 무슨 말을 할까. 권성하는 지금 어디 있을까. 권성하라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릿속이 온통 권성하였다.

“아무거나 해.”

“너 아까부터 너무 대충 보는 거 아냐?”

“내가 열심히 봐서 뭐해. 어차피 너희 집에 둘 거니까 네가 골라.”

그렇게 말하자 상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일주일에 반은 너도 보게 될걸?”

삐딱하게 헛웃음을 짓는 것까지 묘하게 매력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권성하의 얼굴은 계속 보고 싶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진짜 내가 홀린 건가.

대체 뭐지?

혹시 내가 외로워서 그런 걸까, 의심해 봤지만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권성하인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 감정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정의할 수 없었다.

* * *

기말고사가 2주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주부터는 시끄러웠던 채팅창이 조용해지고, 술 대신 공부로 밤을 새울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험 공부에 앞서 제대로 놀자는 기현 형의 제안으로 우리 집에서 경기를 보기로 했다. 요즘 기현 형이 꽂혀있는 건 미식축구였다.

“야! 지난번에 설명해 줬잖아.”

“그건 지난번이었잖아. 그걸 지금껏 기억하겠냐?”

“아오씨, 미치겠네.”

“미치긴 왜 미쳐. 다시 알려 주면 되지. 몇 번 들어도 헷갈리는 걸 어쩌라고.”

형들은 소파 곳곳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었다. 이미 경기가 시작된 지 8분이나 지났는데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권성하뿐이었다.

다들 경기를 보는 동안 잠시 노트북을 쓰려고 거실 한쪽에 놓인 네모 테이블에 앉았다. 기현 형이 한참 포커에 꽂혀있을 때는 인기가 좋았던 커다란 이 테이블은 지난번 언젠가 또 다른 카드 게임에 꽂혀 잠시 쓰이더니 요 몇 달 동안 아무도 앉지 않았다.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열었다. 월요일 오전에 있을 프레젠테이션 최종 수정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바로 아래, 작은 누나가 보낸 사업 계획서가 와있었다. 메일 본문에는 짤막한 인사말과 한 줄짜리 안부가 적혀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 조심해.」

얼핏 보면 협박 문구 같기도 했다.

“하.”

졸업까지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잘하라는 말이었다.

기업 이미지를 아주 중요시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지금까지 미디어에 정보가 공개된 건 큰 계열사의 사장까지였다. 그 외에 집안과 관계된 사람들의 개인 정보는 철저히 비공개되어 이름을 제외하곤 노출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나를 가장 걱정했다. 혹 사고라도 치면 한국에서는 어떻게든 기사화되는 걸 막을 수 있지만, 해외에서 터지면 막기가 어려우므로 최대한 조용히 있다 오라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형들에게도 우리 집안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이건 대체 왜 매번 보내는 건지. 분기마다 숙제처럼 날아오는 사업 계획서는 마치 곧 너도 일부분이 될 거라고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서둘러 졸업을 하고 돌아가 역할을 맡아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 보내는 거기도 했고.

괜히 지금 열었나.

하필이면 모두가 즐거운 시간에 이걸 봐서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뭘 보길래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냐. 안 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새하얀 얼굴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넌 가끔 그러더라.”

“뭘.”

“티 나게 거짓말하는 거.”

“알면 좀 모른 척하지.”

“그래서 알고도 더 묻진 않잖아.”

그렇지. 그래서 좋고.

권성하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권성하는 완벽하다.

사람 자체가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게만 완벽한 사람이었다. 요 몇 주간 계속해서 생각해 내린 결론이 그거였다. 마치 나에게 잘 보이려고 입력값을 딱 맞춰놓은 것처럼 모든 말과 행동이 내 취향이었다.

모든 게 잘 통하고 술도 한잔 같이할 수 있는 사람. 다정하고 착한 사람. 권성하야말로 다시 태어나도 못 만난다던 나의 이상형이었다.

아, 이러니까 내가 홀릴 수밖에. 끌리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솔직히 괜찮아질 줄 알았다. 이유를 몰랐을 때는 내가 이상한 줄만 알았는데, 이유를 알고 나서는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누구나 완벽하게 맞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건 당연하니까.

그런데 그걸 인지하고 난 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당연한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가장 중요한 사실이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권성하는 이성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권성하가 좋다. 그러므로 나는 이성이 아닌 사람을 좋아한다. 과연 이게 정상인가?

“어쨌든 빨리 와. 네 술 내가 따라놨어.”

당연하게도 경기에는 집중할 수 없었다. 요즘은 누굴 만나도 이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권성하와 가까이 있을 때마다 경고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모두가 술을 상당히 많이 마셨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모두가 잠들고 남은 사람은 권성하와 나, 둘 뿐이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담배를 피우러 갔다. 매서운 바람이 고층 빌딩 사이를 휙 지나갔다.

“춥다.”

긴 숨을 내쉴 때마다 뽀얀 입김이 피어났다. 살짝 술에 취한 권성하는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양 볼이 발개져 있었다.

“여기 올 때마다 너 처음 만난 날 생각나. 갑자기 따라 나오길래 당황했었거든. 잘 모르는데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걱정도 했고.”

“그렇게 안 보였는데.”

“그래? 그럼 다행이네. 사실 당황한 건 잠깐이었고, 막상 너랑 마주 보고 나니까 그런 생각도 안 들더라.”

“그럼 무슨 생각 했는데.”

“아. 진짜 남자도 설렐 만큼 잘생겼구나.”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쳐진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갑자기 사고가 정지했다.

“권성하.”

이름을 부르자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따라왔다. 그게 뭐라고 가슴이 술렁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충동을 참았다. 그러자 가슴이 답답했다. 답답하다 못해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 당장 손끝이라도 닿지 않으면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하, 젠장.

“내가 드디어 미친놈이 된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권성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담담하게 말했다.

“아닐걸. 넌 원래 그랬어.”

@MINT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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