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과한 친절은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씻고 나왔는데, 거실로 나가자마자 데자뷔처럼 커피 향이 났다.
내가 새벽 3시에 방에 들어갈 때까지도 혼자 책을 보던 강세현은 이미 외출 준비를 완전히 끝낸 상태였다.
“커피 내려놨으니까 마시고 가.”
막 나가려던 참인지 차 열쇠를 든 채 현관에 서 있었다.
“강세현.”
“왜.”
현관문을 열던 강세현은 내 부름에 다시 뒤를 돌았다.
“너,”
“……?”
“너,”
“……나, 뭐.”
“……너 이상해.”
강세현은 웃었다. 아침부터 쓸데없이 눈이 부셨다.
“꼭 몰랐던 것처럼 얘기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집에서 신세 진다고 이렇게까지 잘해 줄 필요 없다고.”
“난 너처럼 신세 진다고 생각 안 해. 그래서 잘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럼 왜 이러는데.”
“그냥 잘해 주고 싶어서.”
그냥 잘해 주고 싶다니. 이번에도 충분히 오해할 만한 말이었다. 보통 친구에게는 하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게다가 평범한 사람들은 잘해 주고 싶다고 저렇게 비싼 커피 머신을 막 사 오지 않는다.
물어볼까. 날 좋아한다고 말하진 않겠지. 그래, 그건 너무 말이 안 되지.
‘왜냐고 안 물어?’
차라리 그때 물어볼걸. 왜 갑자기 껴안은 건지,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지금이라도 묻고 싶었으나 막상 뭐라고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혹시 날 좋아하냐고? 그랬다가 이 모든 게 나의 터무니 없는 착각이라면?
머릿속이 복잡해 생각이 계속 왔다 갔다 했다. 물어보고 싶다가도 묻지 않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결국, 이 이상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은 묻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면 괜찮아지겠지.
이번에 한국에 나가지 않기로 한 건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3주간 떨어져 있으면 아무래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빠듯해서 담배도 피우지 못하고 옷을 입었다. 새벽까지 공부했던 것들을 챙기려고 식탁으로 가자 널브러져 있던 책과 자료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한 건 아니니 누가 했을지는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건 예전이랑 같았다. 강세현은 이전에도 다정했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강세현 여자친구는 얼마나 좋을까. 이 정도면 남자라도 반하겠네. 그런 생각.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준비를 끝내고 에너지바를 챙겨 현관으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가려고 했으나 죄책감이 자꾸만 발을 붙잡았다. 끝내 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가자 딱 봐도 꽤 비싸 보이는 커피 머신 옆에 텀블러 하나가 놓여있었다.
텀블러에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시간 없다고 그냥 가지 말고.」
이러니까 내가….
이러니까 남자라도 안 반하겠냐고.
***
오후 수업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자 오늘도 강세현은 월요일에 봤던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가 보면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월요일에도, 오늘도, 여기서 만나기로 한 기억은 없었다.
이 정도면 정말 거리를 두고 싶어도 둘 방법이 없는 거다.
“오늘도 네 여보가 모시러 왔네.”
툭, 농담을 던진 기현 형은 먼저 강세현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한 번 더 흔들고선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일부러 다가가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강세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뒤늦게 고갤 돌린 강세현은 나를 보곤 활짝 웃었다.
한 발짝 멀리서 강세현을 보자 더 정확히 보였다. 타인과 나를 대하는 게 너무 다르다는 걸.
괜히 혼자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어물쩍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두어 걸음쯤 옮겼을 때 누군가 가까이에서 말을 걸었다.
[저기.]
어깨 너머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햇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금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다음에는 예쁜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며칠 전 불을 빌렸던 외국인이었다.
[지난번엔 고마웠어.]
[별거 아니었는데 뭐.]
월요일에도 느꼈지만 정말 얼굴 작다. 조막만 얼굴 때문에 커다란 눈이 더 돋보였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상대가 눈웃음을 쳤다.
[이름이 뭐야? 학기 끝나가는데 이제야 물어보네.]
[성하. 그냥 이안이라고 불러.]
[흠, 성하는 한국 이름?]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말을 걸어준 상대에겐 미안하지만, 자꾸만 등 뒤에 있는 강세현이 신경 쓰여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내 맘을 모르는 상대는 자신을 브라이언이라고 소개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혹시, 강의 노트 정리한 거 교환하지 않을래?]
시험 전 강의 노트를 주고받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서로 놓친 부분을 확인할 수 있고, 예상 기출문제를 유추할 수 있어 많게는 서너 명이 서로 노트를 공유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상대가 아니면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데, 상대와 나는 오며 가며 얼굴을 본 적은 있더라도 실제로 말을 나눠본 건 엊그제 불을 빌려줄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니 무척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아……. 난 아직 안 끝났는데.]
할 수 있는 핑계가 그것뿐이었다. 상대가 먼저 내민 제안을 쉽게 거절하려니 미안하고, 좋은 제안인데도 목적이 뻔히 보이니 받아들이기도 참 어려웠다.
[나도 아직 안 끝났어. 중간 챕터부터 다시 정리할 거라서. 어차피 다음 주까지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해도 되는데 어때?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서 그래.]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면 나 말고도 누구든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콕 집어서 나를 택한 이유가 분명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호감이 결코 내 착각은 아님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너무 쿨하게 말해서 오히려 망설이는 내가 이상해졌다.
아, 정말 모르겠다.
[언제까지 주면 돼?]
그렇게 대답하자 하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만 주면 돼.]
[메일로 보내면 될까?]
[응.]
[알았어. 그때까지 보낼 테니 메일 알려줘.]
핸드폰 메모장에 새로운 메일 주소를 기록하고 나도 상대에게 메일 주소를 넘겼다. 그런데 새하얀 손이 대뜸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번호 좀 알려줄래? 내가 그 전에 잊지 않도록 리마인드 메시지 보낼게.]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자료를 이번 주말까지 보낼게. 만약 못 받으면 월요일에 강의실에서 말해줘.]
메시지를 넣어달라는 말에 서둘러 말을 고쳤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상대는 이번에도 다른 말로 거부하지 못하게 했다.
[안 보낼까 봐 의심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비상용으로 받아두는 거야.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단체로 보내는 거니까 함께 보낼게.]
아니, 됐다니까.
곤란한 상황이 됐다. 사실 여기서 거절하는 건 상대를 무안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좀 난처했다. 번호를 알려주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왜 안 와.”
갑자기 툭, 오른쪽 어깨가 무거워졌다. 귓가에 낮은 음성이 닿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아……. 지금 가려고 했어.”
“지금 아니고 진즉 왔어야지.”
말은 분명 내게 하는데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쪽에 가 있었다. 내게 어깨동무를 한 강세현은 내 앞에 선 외국인을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레 상대의 시선 또한 나보다 한 뼘이나 더 큰 강세현에게 향했다.
정말 분위기가 이상했다.
와, 내가 어쩌다.
“그게-”
“가자.”
뭐라고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엄청난 악력이 내 팔을 끌어당겼다. 당연히 브라이언이라는 이름을 가진 상대에게 전화번호를 건네긴커녕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가 서 있던 건물에서 한참을 걸었다. 가야 할 곳은 도서관인데 어느새 반대편에 있는 학생지원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어디까지 가게. 이제 그만 가도 돼.”
그 말에 걸음은 멈추었지만 붙잡힌 팔은 여전히 아팠다.
강세현의 표정은 꼭 그날 같았다. 지금도 역시 화가 난 것 같았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서둘러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반대로 와 버렸네. 여기까지 온 김에 카피센터도 들렀다 가자. 복사할 거 있어.”
“그런 말 말고 할 말 없어?”
“아. 덕분에 살았……다?”
“하.”
“좀 곤란했는데, 구해 줘서 고맙다.”
“곤란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어.”
반듯했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잔뜩 인상을 쓴 강세현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무슨 얘기 했는데.”
“아, 강의 노트 교환하자 그래서.”
“그래서?”
“……하기로 했어.”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근데 그게 왜 번호까지 주고받아야 되는 건지 설명해 봐.”
“그러니까…….”
강세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도 많이.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그 이유는 질투 때문이었다. 최근엔 내 주위 사람에게까지 질투하는데 하물며 대놓고 호감을 표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천하의 강세현이 치졸하게 질투라니. 솔직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다 말해 줄 이유는 없는데. 나는 또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것도 영하의 날씨에 바람 부는 캠퍼스 한가운데에 서서.
“너 그러다가 만약 쟤가 고백하면 어쩔 건데.”
조금 전 상황을 다 설명했으니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당연히 거절하지.”
“남자라서?”
“…….”
순간 입을 닫았다.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나, 맞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정답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게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신경 쓰이니까.”
목소리가 단호했다.
“강세현. 너,”
오늘 아침까지 마음먹었던 결심이 터무니없이 무너졌다.
최선이든 최악이든 지금은 일단 질러야 할 것 같았다.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너 나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