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고 돌아 너-44화 (44/96)

#44

강세현이 한국으로 간 후, 편안할 줄 알았던 방학은 오히려 괴로웠다.

종일 뭔가 계속 놓치고 있는 느낌.

습관처럼 핸드폰을 보다가, 또 만지작거리다가, 새까만 액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심심하고, 따분하고, 지루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메시지를 주고받던 이의 연락이 드물어지자 처음엔 괜찮았다가, 이틀 만에 공허했다가, 사흘이 되자 쓸쓸해졌다. 그 쓸쓸함을 잊으려고 일부러 다른 것에 몰두해 보려 해도 도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봐도, 책을 읽어도, 심지어 형들을 만나 술을 마셔도.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방학에 일찍 들어왔을 때도 그랬었다. 그때는 지금만큼 매일 보던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그 몇 주가 지겹게 느껴졌었다. 정작 걱정해야 할 건 한국에 간 강세현이 어떻게 지내냐가 아니라 강세현이 없는 내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허전한 거겠지…….

잠잠하기만 한 핸드폰을 꺼내 지나간 메시지들을 읽었다.

강세현: [자?]

나: [아니]

강세현: [안자고 뭐해 늦었는데]

나: [아직 열한신데 왜 벌써 자]

강세현: [그래도 일찍자]

나: [방학이라는거 모르냐 넌 왜 맨날 일찍자래]

나: [그러는 넌 뭐하는데]

강세현: [일]

나: [왜 매일 일만해 좀 놀지]

강세현: [놀아도 재미없어]

나: [노는게 왜 재미없어]

강세현: [너 없으니까]

내가 없으면 재미없다던 강세현은 저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벌써 일주일째 연락이 없었다. 매일 오던 전화도 오지 않았고, 드문드문 오던 메시지도 없었다.

억울했다. 왠지 이렇게 허전함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인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불안해졌다. 나까지 이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할까 봐.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한번 보낸 후 답장이 없었을 때 두 번 보내는 게 어려울 뿐이었다.

<화요일>

-오후 11시 01분-

나: [일하는 중?]

<수요일>

-오후 9시 35분-

나: [많이 바쁘냐]

그 어려운 일을 내가 했는데도 강세현은 답이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를 다 읽었음에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만약 읽지조차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며 몇 번 더 연락해봤겠지만, 일부러 무시하는 게 분명해서 더는 연락할 수 없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 이런 상태에서도 강세현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불쑥 고갤 내미는 궁금증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하.”

강세현에 대해 생각하는 지금, 대체 몇 가지 감정이 내 안을 오가는 걸까.

지루함, 허전함, 쓸쓸함, 답답함, 이 모든 걸로 인한 피곤함. 설마 이대로 이렇게 연락이 끊기는 건 아니겠지? 순간 아찔한 생각까지.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부 다 살아난 듯했다.

와……. 내가 이렇게까지 초조했던 적이 있었던가?

드르륵-.

때마침 울리는 진동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액정을 확인했다. 혹시나 했던 이름 대신 기현 형의 번호가 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 6시에 기숙사에서 모일 거야. 올 수 있겠냐?

분명 술을 마시기 위해 모이는 자리일 테고, 그렇다면 운전을 할 수 없을 테니 기숙사에서 자고 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놀랍게도 여태껏 한 번도 기숙사에서 자 본 적이 없어서 망설여졌다. 매번 술을 마실 때는 강세현의 집에서 모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싫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가는 의미가 없었다. 여러 고민 끝에 결국 알겠다고 답했다.

굳이 원치 않는 일을 감당하면서 술자리에 가려 하는 이유는 술이 마시고 싶어서도, 형들이 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였다.

***

“성하 너 어제도 일했어? 일요일은 원래 안 하는 날 아니냐.”

“같이 일하는 누나가 좀 대신해 달라고 해서요.”

“역시, 우리 성하는 참 착해요.”

착한 거 아닌데.

어차피 나도 얻는 것이 있으니 한 것뿐이었다. 그 사람은 시간을 벌고, 나는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야, 하태진. 공 가져왔냐?”

“어. 지금 해?”

“그러자. 맥주 세팅할게. 제이슨, 너 카드 안 칠 거면 이거 도와.”

기숙사 파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린 지도 거의 반년이 넘었다. 매번 강세현과 함께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놓인 술병들, 테이블 위 널브러진 안주와 바닥에 떨어진 과자부스러기. 곳곳에 쌓여만 가는 쓰레기들을 보고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카드 게임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비어퐁 게임을 하고 있었다.

지저분한 꼴을 더는 참을 수 없어 테이블을 정리하던 참이었다. 탁구공을 손에 든 태진 형이 나를 불렀다. 캠퍼스에서 오며 가며 가끔 마주치는 형이었다.

“성하야, 뭐 해. 빨리 와.”

“아, 전 됐어요.”

“되긴 뭘 돼. 넌 필수 참여야. 아까부터 뭐하냐.”

맥주가 든 컵에 탁구공을 던져 넣어 상대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게임이었다. 누군가 만진 탁구공이 둥둥 뜬 맥주를 원샷 하라니.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은데 상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야, 안 한다는 애 뭐하러 억지로 시켜. 됐어. 그냥 우리끼리 해.”

“카드도 안 치는데 같이 어울려야지. 혼자 술 마시잖아. 너네는 성하랑 친하면서 왜 안 끼워 주냐? 치사하게.”

안 끼워 주는 게 아니라 일부러 안 시키는 건데.

나를 잘 아는 형들이 말려봤지만, 태진 형은 나를 혼자 둔다며 오히려 형들에게 핀잔을 줬다. 결국, 날 생각해 주는 형의 성화에 못 이겨 참석하게 됐다.

같은 편이 된 준성 형이 툭, 옆구리를 찔렀다.

“네 여보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그 여보가 지금 전혀 연락 안 된다는 건 알까.

“애초에 강세현이 있었으면 널 여기 부르지도 않았겠지만. 우리가 너를 안 끼워 주는 게 아니라 네가 안 왔겠지.”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긴. 강세현 그 자식 때문에 너도 언젠가부터 이런 자리 안 왔잖아. 참 대단한 여보다. 여러모로.”

“……그 별명 좀 어떻게 안 돼요?”

“어. 안 돼. 재밌으니까.”

준성 형은 개구진 표정으로 웃었다.

“성하야. 네 차례야. 나와.”

다행히 나와 겨루게 된 상대 팀이 그다지 잘하지 못해 맥주 한 잔으로 끝났지만,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고 억지로 술을 받아마시고 나니 다시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후에는 사람들이 하는 게임을 지켜보거나 소파 한쪽에 앉아 티브이에 나오는 스포츠 경기를 봤다.

뭐랄까, 놀라울 만큼 재미가 없었다. 딱히 심심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뭘 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심지어는 뒤늦게 들른 정우 형과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유가 뭐야.

놀아도 내가 없어서 재미없다는 강세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 맞다. 일요일에 성하 네가 가지?”

게임을 다 끝낸 기현 형이 정우 형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어딜요?”

“공항.”

일요일에 내가 공항에 가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싸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하고 생각한 순간 역시나 예상했던 답이 들려왔다.

“세현이 일찍 들어온다며.”

이 망할 자식이.

“겨울 방학 때 이렇게 일찍 들어오는 건 처음인 것 같지?”

“그렇지. 안 가면 안 갔지, 보통은 개강 직전에 들어오잖아.”

“혹시 이번에 성하가 같이 안 가서 그런 거 아냐?”

“음……. 그럴 수도 있겠다. 강세현이라면 그럴지도. 진짜 열렬하다, 열렬해.”

모두가 웃는 동안 나 혼자 웃을 수가 없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 더는 농담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나 혼자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아, 진짜…… 재미없다.

강세현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5일 후인 토요일이었다.

강세현: [내일 시카고 도착해]

강세현: [할말 있으니까 집으로 갈게]

그동안 무얼 했는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 그런 설명 하나 없이 집으로 온다는 메시지가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 원망보단 반가움이 먼저였다.

***

강세현이 탄 비행기는 눈이 많이 내려 연착됐다. 오후 7시쯤 도착해야 했을 강세현은 3시간이 지난 밤 10시에나 찾아왔다.

똑똑.

노크 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몇 번이나 열어줬던 문인데 그 앞에서 괜히 주춤거렸다.

달칵.

선명한 눈동자와 또렷한 이목구비. 강세현은 언제나 그랬듯 반듯하게 서 있었다.

고작 2주만인데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묘한 감정이 일었다.

“왔냐.”

평소와 똑같지 않다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더 담담하게 말했다. 강세현은 현관에서 몇 초간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은 어땠어?”

“똑같지 뭐.”

대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한국에선 무얼 했냐는 내 물음에 강세현은 ‘일’이라고 대답했고, 그 외에도 한국 방문과 관련된 질문에는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내놓았다.

“정말 별일 없었네.”

“없었다니까.”

“그런데 왜 일찍 오게 된 거야?”

“심심해서.”

“심심한 놈이 내 연락은 다 씹었냐?”

툭, 던진 말에 강세현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

“나중에 말해 줄게.”

“미루지 말고 물으라며.”

“꼭 이럴 땐 말 잘 듣지.”

강세현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웃음이나 다른 말로 넘겨버릴 때가 있었다. 근데 지금, 웃음으로 대화를 무마하려 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어보려다 말았다. 어차피 다시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것보다는 더 궁금한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강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남의 일처럼.

“좋아졌어.”

“어?”

믿기 힘든 말이 또박또박 귓가에 닿았다.

“좋아졌다고, 너.”

놀라고, 놀라고, 또 놀라고. 최근엔 정말 서프라이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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