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삐. 삐. 삐.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괜히 긴장했다. 어제 만나지 못했으니 사귀고 나서 제대로 보는 건 어쩌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래서야 실천이 문제가 아니라 적응을 다시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수백 번 본 얼굴이 이렇게 적응이 안 돼서야.
“왔어?”
일부러 한 박자 늦게 엉덩이를 뗐다. 현관으로 가자 강세현이 그 앞에서 들어오지 않고 서 있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봤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더 어색해지기 전에 다시 거실로 가려는데, 커다란 손이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툭, 하고 머리로 떨어진 손이 가지런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래. 적응부터 다시 하자.
“뭐 하고 있었어?”
“책 봤어.”
“공부할 거 있었어?”
“아니. 저거 잠깐 빌렸어.”
급하게 일어나느라 그대로 손에 들고 온 책을 들어 올렸다. 책 커버를 본 강세현이 인상을 썼다.
내가 읽던 책은 에세이였다. 제목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무려 두 번이나 들어가는 책. 늘 공부방으로만 쓰이던 서재 한구석에 꽂혀있는 걸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다.
“이런 거 좋아했어?”
“아니. 처음 봤어. 보이길래.”
“어땠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 솔직히…… 이해가 좀.”
강세현은 날 보며 소리 내 웃었다.
“그런데 왜 봐. 다른 거 읽지.”
“전혀 모르는 분야라 신기해서. 넌 다 읽었어?”
솔직히 책장에 이런 책이 있을 때부터 놀랐다. 강세현과 사랑 에세이라니.
“아니. 내 거 아냐.”
“책장에 꽂혀있던데, 그럼 누구 거야?”
“여자친구.”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강세현은 저도 모르게 뱉은 말에 본인이 놀란 듯했다. 아. 낭패다. 얼굴에 전부 드러나 있었다.
“어쩐지. 의외의 취향에 놀랄 뻔했네. 내가 모르는 네 취향도 있는 줄 알았어.”
나름 수습하려고 저렇게 말했지만, 한 2초만 빨랐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 해도 강세현은 구겨진 이마를 펴지 않았다.
워낙 오랫동안 사귄 상대라 ‘전’ 여자친구라는 말이 익숙지 않아 그전에도 몇 번인가 실수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대충 알아듣고 넘겼었고, 강세현도 굳이 따로 정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저 말실수한 것 가지고 강세현은 너무 자책하는 듯했다.
“미안.”
“괜찮아. 뭘 신경 써, 이제 와서.”
“그래도 이런 거 남겨두면 찝찝하잖아. 줘, 버리게.”
“어?”
“보고 싶거든 새로 사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강세현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 안에 있는 책을 억지로 뺏어갔다.
아…….
그제야 알았다. 전 여자친구를 여자친구라고 한, 그런 말실수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일반적이었다면, 여기서 내가 기분 나빠야 하는 거…… 맞지?
보통 연인이 생기면 과거에 만났던 사람의 흔적을 정리하는 게 매너고 설사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도 현재 연인에게 당당히 말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강세현은 자신이 전 여자친구의 물건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사과를 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다른 숙제가 생겼다.
적응하는 것 말고, 실천하는 것도 말고, 내가 강세현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가 시급했다.
정말, 연애는 너무 어렵다.
저녁은 소고기와 치즈가 듬뿍 올려진 필리치즈스테이크였다. 강세현 학교 근처에 꽤 유명한 곳이 있어 가끔 한 번씩 포장을 해 왔다. 포장지를 벗기고 접시에 옮기고 있을 때 그사이 옷을 갈아입은 강세현이 방에서 나왔다.
마실 걸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자 바로 보이는 건 한 칸을 전부 채운 맥주였다.
“맥주 마실래?”
“어.”
“어떤 거?”
“너 마시는 거.”
여러 종류의 맥주 중에서 왼쪽 두 번째에 놓인 걸 꺼냈다. 언젠가 형들이 아저씨 맥주라며 놀렸던 맥주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라고 했을 때 그걸 공감하는 사람은 강세현뿐이었다.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강세현이 물었다.
“어디 안 좋아? 피곤해 보이는데.”
“아…….”
월요일의 피로가 누적됐는지 화요일엔 몸이 더 무거웠다. 그래서 어제는 일부러 오겠다는 강세현을 말리고 일 끝나자마자 집으로 가 곧바로 잠을 청했다. 그런데도 오늘은 더 피곤했다. 이틀 연속으로 일했다고 이 정도로 피곤한 적은 없는데 컨디션이 영 별로였다.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냐?”
“그런가.”
서늘한 손바닥이 갑자기 내 이마를 짚었다. 순간 한기에 몸이 움찔거렸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강세현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가만히 손을 올린 채 무언가를 생각했다.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 한참이나. 숨을…… 잘 내쉴 수가 없었다.
“그냥 피곤한 거야.”
괜히 혼자 어색해서 서둘러 맥주를 들고 식탁으로 갔다. 뒤따라 의자에 앉은 강세현은 목이 말랐는지 곧바로 맥주를 들이켰다.
“미팅은 어땠어?”
“하나 빼고 다 괜찮았어.”
“하나는 뭔데?”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걔.”
단지 한 글자뿐인데 그 안에 많은 뜻이 담겨있었다. 시끄러운 애, 귀찮은 애, 끈질긴 애, 등등.
소문이 빠른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미 강세현은 유명인이었다. 저 정도 외모가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으니 형들 말로는 시카고에 옴과 동시에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강세현은 엮이고 싶지 않다며 한국 사람과 일절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그래도 강세현을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았다.
지금 강세현이 다니는 학교도 한국 사람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 간혹 대놓고 친구를 하자고 덤비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마다 강세현은 무시로 일관했는데 이번에는 과제로 엮여있어 모른 체를 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냥 알고 지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뭐?”
반듯했던 이마가 순식간에 구겨졌다.
“싫어.”
“그렇게 별로야?”
“어.”
목소리가 단호했다.
“성격이 그렇게 맘에 안 들어서?”
“아니, 성격에 문제는 없어.”
“설마 겉모습?”
“알고 지내는데 그게 왜 중요해.”
“그것도 아니면 뭔데. 말투?”
“말투는 오히려 괜찮아. 오해하지마. 걔가 별로라는 게 아니고, 그냥 엮이는 게 별로라는 거니까.”
처음부터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을 따지는 것만큼은 나보다 꼼꼼한 강세현이 ‘별로이지 않다’라고 표현하는 건 그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지내는 것까지 거부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에 나랑 친구 해준 게 신기하다.”
“지금은 친구도 아닌데, 이제 와서 그 이유가 궁금해?”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된 지금, 친구가 아니라는 건 지극히 사실이었으나 그 말에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내 표정을 본 강세현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아 서운해한다고 착각하곤 물었다.
“진짜 말해 줘?”
“어.”
착각이었지만, 이유가 궁금하기도 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위에 없는 타입이라 궁금했어.”
강세현의 주위에 있는 타입이라면……. 머릿속에 맨 먼저 기현 형이 떠올랐고, 차례로 다른 형들이 생각났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였다.
“그전에는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궁금한 사람 없었어?”
“어. 네가 처음이었어.”
처음.
누군가에게 어떤 거로든 처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런 기분일까.
좋아한 게 내가 처음이라는 것도 아닌데, 고작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건 처음이었다는 소릴 듣고 기뻤다. 애써 그렇지 않은 척, 자꾸만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면 만약 지금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친구 할 거야?”
“흠……. 우선은 알고 지내겠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싫어졌다.
생각해 보니 강세현은 나를 친구라고 말해 주기 전, 그저 알고 지내는 동안에도 보통 친구 이상으로 잘했었다. 쉽게 집에 초대한다거나 혼자 있을 땐 불쑥 찾아와준다거나.
만약 다른 사람에게도 내게 그랬던 것처럼 한다고 상상하자 강세현에게 그런 상대가 생기는 게 싫어졌다. 불과 몇 분 전에 그냥 알고 지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해 놓고선.
“아. 근데 이제 그러면 안 되나 싶기도 해.”
“갑자기?”
“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곧바로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강세현은 살짝 찡그린 채 웃었다.
“친구가 친구로 끝난 적이 없어서.”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새삼, 우리가 연인이란 생각에.
몸 상태가 별로라서 술은 맥주 두 잔으로 끝냈다. 원래 술이 들어가면 얼굴이 쉽게 붉어지긴 하지만 오늘은 몸 곳곳에도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 정신도 조금 멍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기대했던 영화를 틀어놓고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물론 옆에 있는 강세현이 묘하게 신경 쓰여 그런 것도 있지만 어쨌든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엔딩 20분을 남겨두고 버틸 수 없을 만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벽에 걸린 시계가 막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내 상태를 눈치챈 강세현이 말했다.
“나머진 나중에 보자.”
끝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아 웬만해선 그냥 보자고 했을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방에서 나와 미적미적 움직이는데 뒤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강세현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있었다.
“자려고.”
당연한 걸 왜 묻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때 긴 손가락이 게스트룸을 가리켰다.
“이제 거기 네 방 아니잖아.”
“어?”
“손님도 아닌데 그 방에 갈필요 없어. 앞으로는 여기.”
그가 다음으로 가리킨 곳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침실이었다.